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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Mar 12. 2021

범인을 잡고보니 또.. 흑인이었다

미국에서 아시안을 향한 증오범죄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다.      


코로나 19가 중국 우한 바이러스라고 트럼프가 말하면서부터 시작된 아시안을 향한 증오는 미국 사람들의 뇌리에 깊게 박혀 그 도를 넘고 있다. 많은 정치인과 언론인 그리고 의식있는 시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을 포함한 아시안에게 인종차별적인 행동과 말투로 몸살을 앓고 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 같은 약자에게 돌아오고 있다. 그동안 드러내 놓고 인종차별을 하지 못했던 조용한 숨은 미국인들이 이제는 대놓고 그 증오심을 폭발하고 있다.     


특히 뉴욕이나 워싱턴 D.C 같은 대도시에서 사는 아시안들이 타깃이 되었는데 요즘엔 내가 살고 있는 조그만 도시에까지 그 위세를 떨치고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와 가깝다는 이유로 버지니아나 메릴랜드는 항상 그 면죄부를 쓰고 있는 주 중의 하나인데 요즘은 하루 걸러 하루 한인들이 밀집한 공공장소에서 묻지 마 폭력이 일어나고 한인 상점만을 골라 약탈한다는 뉴스가 연일 방송되고 있다. 중요한 건 우리 아시안을 공격하고 아시안 상점의 창문을 부수고 계산대를 뜯어가는 인종이 거의 흑인이라는 사실이다.


왜 이러한 일이 빈번히 일어나는 걸까?     


그 이유는 오랜 세월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거 같다. 잘 알다시피 흑인 인권운동이 시작된 시점은 마틴 루터 킹이 주장한 민권법이 통과된 1964년부터였으니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50여 년 전일이다. 킹 목사는 흑인뿐 아니라 인종이나 피부색 종교 그리고 성이나 민족을 이유로 고용에서 차별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짓는데 크나큰 업적을 남겼다. 그 위대한 업적으로 킹 목사는 그해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조선 시대에는 어른과 아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겸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미국에서는 일반 버스에서 백인과 흑인이 앞뒤로 나뉘어 앉을 수 있었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일반 행위조차 할 수 없었던 그런 시대로 봐서는 인종차별을 법으로 제정한 일은 세기의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 아닐 수 없다. 고용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바뀌게 된 위대한 일을 남겼다. 그러한 밑거름에 힘입어 흑인 대통령까지 등장하는 기염을 토할 수 있었다.      


사람의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값지게 사느냐라고 역설했던 마틴 루터 킹, 그는 미국뿐 아니라 억압받고 차별당하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의 희망이었다. 그 힘으로 우리 같은 소수민족이 법적으로 차별받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희망과 업적과는 무관하게 실제로 살아가는 흑인과 우리 아시안 간의 격차는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흑인은 한국으로 봤을 때 사원, 주임 등 시작단계 직위에 해당하는 흑인 비율은 12%로 전체 흑인 노동자 평균과 거의 같은 수치다. 그러나 관리직에 해당하는 매니저 (과장이나 부장 등) 직위에서는 흑인 비율이 7%로 평균을 훨씬 밑돌았다. 이는 관리직 백인 노동자 비율 (66%)의 거의 10분의 1 수준이고, 아시아계 (15%), 히스패닉 (8%) 등 다른 인종에 비해서도 낮은 수치다. (2021. 3. 4 미국 저널)          


이러한 수치는 단순한 차원에서만 봐서는 안 되는 경제지표다. 이는 경제적인 격차와 함께 의료나 사회적 지위, 학벌뿐 아니라 인종별 인식 등 사회 전반적인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흑인은 게으르고 잘 배우지 않으며 마약에 찌들어 있고 일반 미국인들이 내는 세금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인식되게 만든다. 마치 아무리 노력해도 미국 사람들처럼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무의식을 주입하고 즉,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고 그런 상황으로 몰고 가는 식이다.


이런 수치의 뒷면에는 의식 있고 권위적인 경제학자들의 발언이고 정확한 통계로 보는 수치라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그렇게 인식해 버리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검은손이다. 그러한 정신적 학대는 고스란히 약자가 받아야 하는 고통일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성별, 나이별 혹은 학벌로 나누는 수치는 보았어도 인종별로 나누는 수치는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다양한 인종이 없기도 하겠지만, 만약 머리숱이 많은 사람들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수치가 정확한 통계로 산출되어 언론에 노출된다면 머리숱이 없는 그룹의 반발은 어찌 되겠는가? 상상해 보라.


또한 이러한 수치로 보면 아시안들은 흑인 인권운동의 시발점으로 숟가락 하나 얹고 무임승차로 쉽게 정착했음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오히려 그들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소득 격차와 함께 인식의 격차도 벌어져 보이는듯 하다. 흑인 입장에서는 그들의 일자리를 부지런함으로 무장된 아시안들 특히 한인들에게 빼앗겼다 생각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고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LA 폭동이나 볼티모어 폭동이 같은 맥락이다.     


아마도 그들 눈에 비친 동양인은 흑인들에 의해 어렵게 허문 인종차별의 벽을 어물쩡 올라탄 비슷한 인종의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당당히 지위와 경제력을 뒷받침으로 오히려 그들을 역차별하는 모양새로 보여졌을 것이다. 한마디로 밥을 나누어 주었더니 이젠 밥그릇을 빼앗으려 하니 밥을 준 자가 참지 못하고 몸집으로 누르려하는 것과 같다.


미국은 원래부터 다민족이 사는 사회라 인종별로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고 그 시각에 불만이 있는 사회적 계층이 자연스럽게 생기다 보니 소외된 인종이 있고 반대로 우월한 인종이 생기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거기까지 슬프지만 인정.     


여기에서 문제는 백인이 아닌 소수민족끼리는 공통분모로 합세해 유세 떠는 미국 사람들과 맞서야 마땅하다. 예를 들어 회사 안에 임원 그룹이 10%라면 나머지 90%는 열심히 험담 하며 일하면 되지 굳이 90%끼리 싸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왜 같은 소수민족 안에 있는 아시안은 흑인을 싫어하고, 흑인은 아시안을 싫어하는 이상한 현실이 되었을까? 위와 같은 이유로 흑인이 아시안을 싫어하는 배경은 이해가 된다. 하지만,     


가만 생각해보자. 왜 아시안은 흑인을 싫어하는지.     


1970년대 아프리카 노예 쿤타킨테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뿌리>라는 드라마가 생각난다. 흑인 노예로 처절한 인생을 사는 쿤타킨테는 서부 아프리카 감비아에서 붙잡혀 미국으로 끌려와 험난한 수난과 자유를 찾는 주인공이다. 이 드라마는 처음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점차 노예의 생활에 흥미가 되면서 시청률이 높아져 그때까지 인종이 미국 사회의 발목을 잡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이 드라마로 인해 인종과 관련한 논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사람들이 생각될 만큼 대단한 반향을 일으켰다.  

   


6.25 전쟁 때로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1950년 전쟁이 발발되고 미국을 비롯한 약 16개국 나라에서 지원병이 왔다. 그중에는 코쟁이 미군이 가장 많았고 그 안에는 얼굴이 하얀 우리가 생각하는 미군도 있었지만, 얼굴이 까만 미군도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흑인이 참가했고 에티오피아 제국에서도 6천여 명이 참가해 생각보다 많은 흑인이 우리 한국을 위해 싸우고 도움을 주었다. 그런 중에 아직 세계화가 되지 않은 한국 사람들의 눈에 비친 흑인은 키가 크고 몸집이 산만한, 그저 힘 좋은 군인이라고 생각했던 거 같다.      


맞다.


전쟁으로 인한 피폐한 사회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한국인들에게 뿌리 깊게 박힌 흑인에 대한 이미지는 얼굴은 까맣지만,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미국 사람(그때는 외국 사람을 그저 미국 사람이라고 칭했던 거 같다) 일뿐 굳이 인종을 나누어 생각할 틈이 없었다는 말이 맞는 말일 것이다. 그저 고마운 일인데 누가 조금 더 고맙다는 퍼센트로 나누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전시 상황 아닌가?     


그렇게 고맙게 생각되었던 흑인이 오히려 <뿌리> 같은 드라마를 통해 세계 문물에 아직 어두운 한국 사람들에게 흑인의 뿌리는 노예고 비천한 노예가 미국에 가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는 그런 인종이었구나, 그래서 저렇게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도 없이 천대를 받는구나, 라며 이해를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들과 함께 비난하며 흑인을 인간 이하로 생각하지 않았나 솔직히 생각해보자.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언론에서 떠들고 드라마에서 보여준 사회의 단면이 마치 전부인양 전 세계로 파급되고 머리에 세뇌되어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이 생긴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유럽 중세 시대에는 흑인을 그들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한다. 인간이 아닌 동물의  종자로 취급하고 노예라는 신분으로 하대하며 인간이   없는 일들을 흑인이 대신해왔던  사실이다. 그런 내용이 각색되어 고스란히 전파를 탔고 흑인은 그저 미국인의 노예라는 사실에 점을 찍어준  이상 그이하도 아닌 고정관념이 되어버렸다. 그뒤로는 링컨이 노예해방을 시켰건  목사가 흑인 인권을 보장하는 법을 통과시키건 뿌리 깊은  차별의 잔재는 지워지지 않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한 예로 한국에서는 믿지 못하겠지만, 미국에는 흑인들만이 사는 지역이 따로 있다. 어느 선까지는 절대 들어오지 않고 넘어가지도 않는 보이지 않는 구역이 나뉘어 있다. 정부에서는 교묘히 흑인이 거주하는 존을 따로 구획하고 있다. 흑인 구역에 사는 흑인에게는 정부의 세금 혜택을 많이 주지만 백인이 사는 거주지에서는 세금 혜택을 주지 않기 때문에 세금 혜택을 받아야만 하는 많은 흑인들은 다른 지역에서 산다는 게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흑인들만 거주하는 존으로 자연스럽게 묶이게 된다.


흑인끼리 사는 곳을 할렘가라 명명하고 범죄 집단이 득실거리는 지역으로 만들고 그러한 곳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런 어른을 보며 자라고 다시 그런 마약과 범죄에 노출되는 어른이 되어가는 그러한 구조로 흑인을 방치, 방임하고 있다. 이러한 고정관념으로 흑인은 배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정부가 주는 세금으로 마약을 사고 겨우 먹고 산다는 이미지를 벗을 도리가 없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고정관념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예를 들어 동남아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왜 우리는 동남아 사람들을 한국 사람보다 낮다고 보는가? 그 또한 인종차별인데 나도 내가 미국에 살면서 인종차별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절대 알 수 없는 일이라 한국에 사는 사람들을 비난할 자격은 1도 없다. 왜냐하면, 그저 남들과 함께 자연스럽게 흐르는 모양대로 산다면 왜 그런 인종차별이 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미국에는 절대 없는 경로우대 사상이 한국에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인종차별을 차별이라고 인식하지도 못하며 사는 게 너무도 당연하다.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이제는 한국에도 흑인을 보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 본토에서도 힘없이 당하는 흑인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한국에 거주하는 흑인이나 아시아의 소수민족에 대한 시각이 조금 달라져야 한다. 당하지 않으면 모르는 일이고, 내가 간만큼만 안다고 하지 않은가? 내가 미국에 살면서 겪는 많은 일 중에 아시안이기에 당하는 언어와 피부의 차별을 그들이 한국에서 겪고 있다. 그리고


나는 미국에 살면서 불필요한 심리적 불안감으로 겪지 않아도  일을 한없이, 말없이 겪고 있다.


미국인이라면 전혀 해당되지 않는 정신적, 심리적 부담을 미국인이 아니라서 짊어져야 하는 과외의 피곤함인 셈이다. 이러한 이유로 소수민족이 겪는 심리적 부담은 판단력을 떨어트려 자기 파괴적인 삶을 선택하게 만든다. 그래서 더욱 약자인 흑인이 아시안의 상점을 약탈하고 아시안은 흑인을 무서워하며 피해의식이 쌓인 악순환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아시안과 흑인이 공통으로 맞는 게 있다. 한마디로 노는 걸 좋아하고 노는 스타일이 맞다. 흑인들의 랩을 동양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가? 랩 하며 춤추며 신나게 목청껏 노는 모습이 정말 닮았다. 그런 모습은 흥이 있다는 증거이고 열정이 있고 그 열정으로 함께 단합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흥과 끼가 넘치는 나라끼리 그 흥으로 즐겁게 일하고 끼 문화로 세계를 단합시키는 민족이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일본에게 진심 어린 과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한다. 일본은 어떻게 더 많은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모른다 하고 한국사람들의 사과 방식에 반기를 든다. 하지만 진정한 사과는 사과를 받는 입장에서 느껴야지만 제대로 된 반성이고 사과라 할 수 있다. 흑인을 노예로 규정지었던 유럽 사람들 그리고 그 전통을 그대로 미국에까지 가지고 온 미국 사람들, 인종차별을 당연시하며 조용하게 뒤에서 움직이는 백인 그리고 그들에게 암암리에 동조하는 우리 같은 소수 민족들... 모두 반성하고 인간적이고 진심 어린 사과를 그들에게 해야 한다. 그러한 진정성이 있을 때 아시안과 흑인의 조화는 이루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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