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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ul 26. 2021

가평에는 '아침고요 수목원'이 있다

‘아침고요 수목원’을 굳이 ‘고요한 아침의 수목원’이라 바꾸어 말하며 방문한 수목원이었다. 걷기를 극도로 싫어하지만 이름이 주는 고요함에 이끌려 마법의 세계로 들어갔다.


이제야 인생의 끝을 조금씩 인식해가고 있어서인지 혹은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을 포장하는 차원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입버릇처럼 내 사후엔 자그마한 나무 아래 나의 뼛가루를 묻고 싶다 말했다. 죽음이라는 존엄한 단어, 그 단어가 주는 세상의 끝도 모르면서 그럴듯한 사후를 포장하기엔 수목장이 그만이라 생각했다.


죽음 이후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자체가 아이러니한 일이긴 하지만, 그나마 이 세상에 나왔다 소멸되는 한점 먼지일지라도 세상에 이로운 일을 하고자 한다는 의미에서 수목장은 안정맞춤이리라. 이런저런 이유로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내 사후 풍경 설계나 해 볼 요량으로 눈을 이리저리 굴려보았다.


그래 어디 보자...


아침햇살을 아직 머금고 있는 걸까? 아직 해맞이를 하지 못한 걸까? 흐린 안개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해는 산 중턱을 넘지도 못해 머뭇거리고 있고 비가 올까 말까 잿빛 구름에서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후두득 떨어질 것만 같은 게 수목원의 모든 꽃과 나무들이 한껏 수분을 머금고 축축이 젖어있다. 소리 없이 산에 내려앉은 몽글몽글한 안개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회색 마음을 들게 하는 건 자연의 소리를 연한 피부갗으로 느끼기  때문이리라.



첫 입구의 모습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누군가의 손길로 매만져진 단정한 모습이다. 보통 한국의 산이나 정원답게 자그마한 꽃들과 나지막한 나무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둥글한 소나무도 미국 소나무에 비해 키가 반밖에 되지 않고 팬지나 수국, 들꽃조차도 아담한 키로 형형색색 장식하고 있었다. 중간에 눈에 띄게 키가 큰 미국수국이 나에게는 오히려 익숙한 모습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자그마한 정원을 지나 좌우로 넓게 펼쳐진 능선이 여름의 중간 온도답게 진초록으로 소나무가 지천이고 구불구불한 산등성이 푸근하게 산아래를 감싸 안고 있다. 그러고 보니 구불한 산등성이 요즘 젊은 여자들의 긴 머리를 커다랗게 구불린 파마머리 모습과 닮았다. 내가 젊었다면 한 번쯤 따라 해보고 싶은 고급지고 여성스럽고 아름다운 머리 스타일이다. 거기에 머릿결이 비단결처럼 촉촉하고 빛이 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터인데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저 등선이 딱 그 빛나는 머리 물결이 춤추듯 초록빛이 넘실대고 있었다.


조그만 오솔길을 걷다 보니 크진 않지만 구비구비 아기자기한 계곡도 있고 조각보처럼 깔아놓은 꽃밭의 알록달록한 향연이  춤을 추게 만들었다. 어릴 때 보았던 사루비아 꽃도 있고 흔하디 흔한 들꽃마다 제각각 이름이 붙여져 있고 은빛으로 눈을 뿌려놓은 듯한 반짝이는 나무까지 춤추는 삼매경에 빠져 살짝 언덕을 넘으며 푯말도 없는 숨어 있는 작은 길에 들어섰는데…


지나쳤다면 다시 보지 못했을 고즈넉하면서 웅장한 한옥을 만나게 되었다.


분명 그 당시엔 사람 이름이 쓰인 문패가 떡하니 대문에 걸려 있었을 텐데 이 집은 대감집이란다. 일단 집이름에서 느껴지는 고급스러우면서도 느린 세월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럼 하인 집이라는 문패도 있을까?? 암튼 대감이라는 이름을 가진 커다란 대문턱을 밟고 올라섰다.


와…


평평한 높이가 아니라 대문에서 위로 올라가 집이 지어진 형태라 대문에서 집을 올려다봐야 하기에 우러러보는 시각이다. 성북동이나 가회동에서 봄직한 어느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의 담벼락 높은 집에 집이 언덕에 솟아 있는 집들을 보면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우러러봐야 하는 입장이라 주눅이 든다.


일단 대문 앞에 서서 "이리 오너라" 외치면 금방이라도 "예이~~"하며 문을 지키고 있던 하인이 정중하게 인사를 하며 방문객을 받아줄  같은 그런 육중하면서 고풍스러운 문이다. 거기에 담쟁이가 켜켜이 세월을 감고 올라가  이삼백 년의  때가 쌓여 크고 작게 그리고 진하고 푸른색들로 각각의 모습으로 제각각 늘어지고 비틀어지며 어우러져 있다. 시간이  오백  뒤로 흘러 내가  대문에 서서 담쟁이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는 착각을 들게 했다.



멋내지 않아도 세월이 주는 시간이 묻혀지고 묻혀져 지금 이 시간 따위는 감히 생각하지도 못하게 하는 정지화면이 바로 대청마루에서 산마루를 보는 순간이었다. 정확히 옆으로 길게 잘린 직사각형 프레임안에 모든 자연이 들어있는 그 모습을 그 대감은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설계했을까?

 


물론 스페인의 가우디 성당 같은 건축물은 200여 년 전부터 설계되어 아직 완성되지 못하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어마어마한 규모면에서 다르지만 이런 한옥은 큰 규모의 건축물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멋이 있다. 바로 계획되지 않은 자연의 변화와 그 자연과 어우러지는 켜켜이 쌓인 세월의 흔적과의 공존이다.


그 어우러짐에서 흔적을 느끼며 감동하고 공감한다.


위로 올라가 정말 그 세월까지를 생각하고 설계했다면, 만약 그랬다면, 그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고 자연을 진정으로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고 그가 곧 자연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이리 오랜 세월이 흘러 나 같은 한 개인이 그가 만들어 놓은 이 공간을 함께 느끼고 함께 숨 쉴 수 있다는 자체에 무안한 영광을 드린다.


숨이 막힐듯한 그 자연은 산등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짝 옆으로 눈을 돌리니 오른쪽으로 작지만 눈 아래로 펼쳐진 호수는 그야말로  풍유를 논하지 않을 수 없을 듯했다. 시 한수가 절로 나오며 풍유를 흥얼거리며 소리 한 자락과 어깨춤이 나온다. 만약 이곳이 반역자의 유배지라면 평생 이곳에서 유배 하기를 자처했을 것이고 만약 정말로 대감이 살았다면 세상을 다 가진 시인이었을 것이고 풍유를 아는 멋진 대감이 되었으리라…


앙큼한 여인네의 날렵한 뒷태가 왜 연상되는지 뒷방을 보러 돌아선 뒷마당의 붉은 물고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뒷산에서 뒷마당까지 흘러 내려오는 물이 작은 웅덩이진 돌에 갇히고 까슬한 돌 안에서 물놀이하는 올챙이와 두툼한 연꽃들의 어울림이 이상 야릇한 대감과 여인네의 눈빛이 교차되는 듯 출렁였다. 집의 구조와 자연이 주는 야릇한 색과 모양새로 만감이 교차되는 연상을 그때의 대감은 예상했을까?


대감집에서의 아쉬움을 뒤로하니 해가 산등성을 타고 넘어가고 있다. 아직은 해의 빛이 조금은 아쉬운지 살짝살짝 낯빛으로 길과 꽃 그리고 나무 그리고 계곡을 노랗게 물들인다. 계곡을 타고 넘나드는 물소리는 조금씩 밤기운을 맞이하려는지 밤의 제왕답게 산속 기운을 빨아들이고 있다.


이때다 싶었다. 계곡에 들어갈 찬스다. 해의 기운이 떨어졌으니 한껏 달구어진 돌의 기운도 낮아졌으리라. 조심스레 엉덩이를 대고 물을 손바닥에 가져가 본다. 차갑다기보다는 시원함이 낫겠다. 돌을 품고 내려치는 물길이 성이 낫나 보다. 잔잔하면서도 삐죽 옆길로 방향을 틀며 가파르게 내려간다. 가만 보니 그 안에도 붉은 물고기가 춤을 춘다.


계곡을 따라 내려오다 돌무덤과 마주했다. 아주 어릴 적에 가보았던 마이산에서의 돌무덤이 연상되었다. 마이산과는 비교가 되진 않지만 계곡마다 쌓아놓은 돌무덤이 크고 작게 각자의 소망을 각자의 돌로 쌓고 빌고 쌓고 빌고를 반복했으리라 생각되니 그 돌의 소망만큼이나 돌의 무게가 느껴지니 내 마음이 무거운 돌이 되었다.


내려가야 한다는 신호다.


내려가는 길이 다시 올라가는 길처럼 무거운 돌을 마음에 안고 간다. 아주 작은  하나가 커다란  위에 올라앉아 위태하게 소망을 담아내고 있는 모습이 여간 힘겨워보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어딘가에게 내가 원함을 얹어 놓는다는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그깟 작은 돌멩이 하나가 진한 울림으로 알려준다.  


바람이 불어 돌무덤이 무너지면 내 소망이 무너질까 두려워지고 내 뼛가루가 뿌려진 꽃나무가 바람에 쓰러지면 내 사후의 자손에 해가 될까 두려워질 것이다. 수목장으로 내 사후를 설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이다. 산에 들에 나의 흔적을 얹지 않고 흩뿌려져 자유로운 영혼이 되길 소망해본다.


너무도 아름다운 자연의 맛을 제대로 본 아침고요 수목원이다. 다음엔 해가 넘어가는 오후가 아닌 해를 맞이하는 아침 일찍 가서 아침에 보는 돌무덤은 저녁보다는 덜 힘들어 보일는지 봐야겠고 대감집을 드나드는 하인 집 여인네의 흙담 속 비밀도 엿보아야 되겠다.


가평에는 아침고요 수목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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