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를 숲이 잡아채 진하디 진한 그림자로 꺼멓게 성을 낸다
노란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하다.
내 눈에 펼쳐진 거대한 무대장치는 일단 노란빛으로 정해졌나 보다.
나무에 매달린 나뭇잎이 전체 그림을 노랗게 물들였고 해를 머금은 나무 사이 그림자도 노랑으로 투영되어 반짝이고 조금 더 빛바랜 것들은 진노랑에 거무스름한 점박이가 박히더니 어떤 녀석은 그새를 못 참고 붉게 물들고 있다.
숲 속의 전령사가 또 등장했다.
바로 우리 녀석의 주위를 끊임없이 잡아끌고 있는 청설모다.
나처럼 가만히 노란 화폭을 감상이나 하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닌가 싶은지
과연 숲 속의 지휘자답게 이리저리 발 빠르게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이동 중이다.
그때마다 노란 나뭇잎이 힘없이 하늘을 뱅글뱅글 원을 그리다 초록 바닥으로 춤을 추며 내려온다.
가느다란 생명줄을 툭 놓쳐 버렸나?
나무도 나뭇잎의 존재가 그렇게 한순간에 떨어져 나감을 짐작이나 했을까?
새싹이 나올 때 나무껍질이 찢기는 아픔을 나무 혼자 오롯이 감내하며
숲 속 세계에서 따뜻한 봄햇살을 맞으며 탄생시켰을 것이다.
웃음진 얼굴로 빗방울과 바람소리를 들으며 성장한다.
나무뿌리에서는 물과 양식을 나무 끝에서는 해의 따뜻한 기운을 받는다.
그러다 어느새 나무를 덮어버리며 울창한 숲이 되어 그늘을 만들고 넓적하고 진한 나뭇잎이 되어 여름을 맞이한다.
두터운 나무줄기 사이로 굵은 땀방울을 기억하는 딱따구리며 다람쥐, 뱀, 뿌리에 기생하는 작은 개미에게까지 엄마의 자궁처럼 자신의 몸을 기꺼이 던져 겨울을 나는 굴을 내준다.
써머타임이 끝났다. 겨울이 오는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자연을 거스른 인위적인 써머타임으로 원래의 시간을 빼앗겼지만, 오히려 서머타임이 원래 자기의 시간 인양 우리의 생태 시계가 7-8개월 만에 뒤집혀 버렸다.
하늘도 노란 숲도 바뀌어버린 시간이 영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어둠에 익숙하지 않으려 발버둥 치려는지 아침의 밝음이 어설픈 새벽으로 낯갈스럽다.
어둠에 조금 더 머물기를 바라는지 거슴프레한 이른 새벽은 동트기를 머뭇거리고
초저녁엔 넘어가려는 해를 숲이 잡아채 그 어둠이 땅거미로 내려앉을세라 뒷걸음치며 진하디진한 그림자로 꺼멓게 성을 낸다.
서쪽 붉은 해가 세상 밖으로 사라지기 직전, 세상에서 가장 밝은 빛이 쏟아진다.
그 빛줄기 바로 밑이 가장 어두운 그림자라는 걸 하늘도 아는지
붉은 해가 넘어가기 전의 어둠이 가장 진하고 시커먼 어둠이다.
땅 그림자가 진한 흑색으로 변하는 그 지점에 숲 속 청설모는 극에 단 잰걸음으로 이리저리 이동하며 부산을 떤다.
곧 진한 어둠이 그들의 밤을 먹여 삼키는 걸 아는 모양이다.
더 이상 해가 기다려주지 않는다.
노란 숲이 붉은 해를 잡지 못하고 노란 숲에 투영되어 핑크로 뒤덮인 채 잠시 머무른다.
숨을 한번 고르나 보다.
마지막 한고비는 하늘의 뜻에 맡기는 게 자연의 이치다.
그러다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훌떡 넘어간다.
가느다란 달빛이 서서히 그 자리를 메꾼다.
강한 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달,
그달이 이제서야 그 자태를 뽐내기 시작한다.
언제 있었나 싶게 때론 청순하게 가느다랗게 미소 짓고, 때론 과감하게 반 갈라버리고,
때론 모든 걸 품을 수 있는 완연한 달만의 자태로 밤하늘을 지배한다.
이젠 달빛에 의존해야 하는 노란 숲 속이 기다렸다는 듯이 삐죽 달빛에 아양을 떤다.
아직은 나무에 앙상히 매달려있는 나뭇잎이지만 그렇다고 얕잡아 보아선 금물이다.
노란 나뭇잎이 이슬을 머금고 다시 소생하는 새벽 시간을 보내며 숲 속 가족에게 맑은 물과 맑은소리를 전한다.
후드득..,
조용한 노란 숲 속이 하나둘 나무뿌리가 흔들리는 소리에 잠시 어둠과 교란한다.
노란 그리고 빨간 나뭇잎들이 비바람에 정신없이 춤을 춘다.
누가 더 빨리 누가 더 멋지게 누가 더 큰 원으로 누가 더 크게 춤을 추나!
놓치고 싶지 않은 나무와 춤추고 싶은 나뭇잎이 힘겨루기를 하나보다.
춤을 추다 보니 초록 땅에 노란 잔재가 그득하다.
바람도 그들의 춤에 넋이 나갔는지 더 이상 불지 않고 비도 더 이상 그들을 흔들어 깨우지 않는다.
나무에게도 나뭇잎의 반항을 잠재워 줘야지 싶다.
금빛 너울이 넘실댄다.
초록 땅이 어느새 노랗게 금빛으로 너울댄다.
기운찬 여름의 기운이 노란 가을빛을 받아 투명한 유리잔처럼 이슬에서 무지개가 핀다.
아무리 어둠을 머무르라 종용해도 가을 이슬은 기어이 따스한 해에게 자리를 내주고야 만다.
잰걸음으로 바스락 소리를 내며 나다니는 청설모가 그새 도토리를 채간다.
아침 기지개를 펴기도 전에 오늘의 양식 사냥으로 바쁜 모양이다.
따뜻한 나무의 겨울 굴에서 까먹을 통통한 도토리를 생각하니 침이 넘어간다.
내 겨울 도토리도 쟁여 놓아야지 싶다.
앙상하지만 여전히 노란 숲 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