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하는 말이다.
8배 확대경으로 본 내 얼굴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난 다른 사람보다 조금 일찍 노안이 왔다. 40대 초반에 한국에서 간단한 수술을 하고 난 뒤 갑자기 거리 이름이 보이지 않아 당황스러웠던 그 날 이후로 내 눈에 엷은, 눈에 있는 것이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이 각막'이 쳐져 버렸다. 작은 활자를 아무리 눈을 비비고 읽으려 해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돋보기를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고 급기야 외출할 때 돋보기가 필수품 1호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그렇다고 항상 돋보기를 착용할 수도 없다. 돋보기는 그야말로 근거리에서만 사용하는 단품이라 평상시에 거리를 걷거나 일상생활을 할 때는 오히려 겹쳐 보이거나 둘로 보여 어지러워서 쓸 수가 없다. 원시와 근시가 있는 복합성 시력을 가지고 있는 나 같은 경우는 평소에 쓰는 안경에 밑면만 돋보기를 추가로 넣는 다초점 안경을 써야 한다.
그것도 한국에서 직접 맞춘 다초점 안경은 편안하게 사용하는데 미국에서 검안사에게 맞춘 안경은 도저히 쓸 수가 없다. 기술력의 차이인지 위아래 초점이 맞지 않아서인지 어지럽거나 머리가 아파서 일반 안경 따로, 돋보기안경 따로 번갈아 가며 목에 걸고 목걸이처럼 사용하는 미국 사람들이 많다. 한국의 안경점은 검안비(미국은 검안사에게 반드시 해야함. 비용은 $100)도 무료에다가 정교한 컴퓨터로 시력을 체크해서 웬만하면 초점이 맞지 않아 고생하는 일이 없는 거 같다. 그래서 미국에서 한국여행 필수코스는 병원 다음으로 안경점이다. 지금도 아이들이 안경이 필요하면 다니던 한국 안경점에서 오더를 해서 배송을 받는다. 배송 비용을 감안해도 한국제품을 따라갈 수는 없다.
돋보기만큼이나 내 눈의 시력을 확대해 주는 물건이 또 하나 있다.
몇 년 전에 미국에서 사 간 물건 중에 가장 칭찬받았던 것인 게 바로 '확대경'이다. 손바닥 반 만 하고 세울 수 있어서 화장할 때 그만이다. 확대경은 최소 2배에서부터 10배까지 모양도 다양하게 내 맘대로 고를 수 있다. 물론 처음엔 한배만 크게 봐도 세상이 달라 보이는데 한번 확대경을 접하면 그다음 단계는 순식간에 높아진다. 마치 한번 커피의 달달함을 알면 한두 잔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하루에 마시는 잔의 수가 무한하게 늘듯 확대경의 확대가 끝을 모르게 내닫는다. 한 번도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는 사람은 없다는 말도 같은 맥락이다.
안경의 도수가 처음엔 1.0으로 시작하다가 금세 2.0이 되듯 확대경도 한배 두 배에서 그 속도가 고속 열차다. 의사들은 되도록 천천히 도수를 높이라고 권고하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가 않다. 1.0에서 시작한 내 안경이 지금은 3.0이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런 속도로 도수가 올라가다가 하나의 글자를 보기 위해 대문짝만한 안경을 쓰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얼마까지 도수가 있나 물어보니, 4.0 이상은 존재하지 않고 사람의 시력은 4.0을 넘지 않는다는 설명을 듣고 그나마 안심했다. 화장대에 있는 확대경은 한배에서 금세 8배가 되었다. 한술 더 떠서 동그란 확대경을 따라 동그랗게 불이 들어오는데 확대경에 불까지 덤으로 밝혀주니 그야말로 백배가 된 기분이다.
너무 잘 보이다보니 보지 말아야 할 거까지 내 눈으로 자세하게 확인된다. 정확히 말하면 내 눈은 가만히 있는데 요술처럼 거울이 확대되어 벼라별 것들이 다 보인다. 거울에 무슨 짓을 한 거야? 라는 의문이 들 만큼 나를 덮고 있는 표면 그것도 겨우 10*20cm 면적 즉 두 손바닥만한 얼굴을 하루에도 열두 번 들여다보고 8배 확대에 LED조명으로 더욱 빛나게 얼굴을 보며 오르락내리락 한숨을 쉬고 있으니 내 자신이 한심하게 생각된다. 콧등엔 웬 거뭇한 것들이 이리도 많고 드문드문 검은 반점들은 왜 이리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많은거야!
늙음의 열차에 탑승하는 첫 번째 관문이 바로 노안이다. 그 노안을 해결하기 위해 돋보기라는 요술램프를 장착하는데 처음엔 칙, 칙, 폭, 폭, 느린 보폭으로 걸어가지만, 점점 가속도가 붙어 빠르게 칙칙폭폭 내달린다. 처음엔 장난삼아 눈썹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필요했던 확대경이 이제는 콧속의 이물질이나 화장으로 번진 빰, 입 주변의 솜털 등 내 눈엔 보이지 않아 남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는 생활 모습을 확대경으로 확대해서 제거하고 살펴야만 하나 싶으니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든다.
늙은 사람에게서 나는 냄새는 향수나 껌 등으로 희석시킬 수 있지만, 노안은 절대 숨길 수 없다. 자연 현상인 방귀나 재채기처럼 거꾸로 영수증을 보면서 읽고자 안간힘을 쓰고, 내 안경은 이마에 걸친 채 신문을 코 밑까지 가져다 놓고 읽는 것을 볼 때 어쩔 수 없이 나이 듦의 시작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당황스럽다. 젊은이들은 당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미묘한 일이다. 그래서 생각나는 게 나이 차가 아주 많이 나는 부부는 이런 상황을 어떻게 슬기롭게 대처할까? 서로 상처받지 않으며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 예민할수 밖에 없는데 말이다.
그럼 돋보기나 확대경이 없었던 시절엔 어찌 그 늙음을 감당했을까?
서양문화에서 유리가 발전되었을 때 동양은 도자기가 발전되었다. 동양문화는 유리가 늦었기에 현미경이나 망원경의 발달이 늦었고 그만큼 과학의 발전 또한 늦어졌다. 만약 동양이 유리가 더 발전되었다면 필히 돋보기나 확대경 또한 빠르게 발전되었고 그랬다면 솜씨 좋은 동양사람들이 더욱 빠르게 패션이나 과학에 눈을 떠서 지금쯤 세계를 손아귀에 넣었을 가망이 백퍼다.
거울이 없었던 달빛에 비친 얼굴의 모습이 나의 모습으로 알고 산 조상들은 과연 어땠을까? 컴퓨터가 없고 핸드폰이 없던 시절에 살았을 때를 기억해보자. 지금 아이들에게 그런 것들이 없는 시절을 생각해 보라면 우리가 거울이 없었던 시절을 생각해 보라는 것과 같은 것일 텐데 정말 거울이 없었던 시절엔 어땠을까?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가 우리를 보며 자신을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거울이 없어 내 얼굴을 모르는데 남이 보는 내가 어떤 모습일지 어찌 알 것인가? 내가 보는 이쁜 여자가 내 모습일 거라 짐작했을 것이고 내 눈에 보이는 멋진 남자가 내 모습이라 생각하며 산다면 얼마나 재미있는 세상이었을까? 재미있는 상상을 하기엔 거울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면 거짓일까?
가장 오래된 거울은 무려 기원전 6000년 전, 아니면 8천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처음엔 돌을 매끈하게 갈아서 희미하게 실루엣만을 보다가 기원전 3000년경 이집트인들이 구리를 갈아서 거울을 만들었다. 그 후 12세기와 14세기 사이 과학의 발달로 유리 제조기술이 발전했고 16세기 초에 무색투명한 유리판에 주석과 수은의 합금을 붙이는 방법으로 거울이 개발되었다. 본격적으로는 19세기에 은도금의 새로운 기법으로 지금의 거울이 대량생산이 가능해지면서 호화 사치품에서 일상생활 용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거울이란 말의 어원은 거꾸로라는 뜻을 나타내는 '거구루'에 어원을 두고 있다. 흔히 냇가에서 얼굴을 물에 비추면 좌우가 바뀌어 거꾸로 보이기 때문에 그 어원이 왔다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거울은 기원전 6세기경 제작된 청동 거울이고 고조선에서 조선 시대까지 계속 쓰였다. 과거의 거울은 무당의 신기나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본격적인 거울의 생산은 조선 시대에 기술이 크게 발달해 대중화되었고 크기나 두께가 얇아지고 관에서 거울 제조 기술자인 경장을 두었을 정도로 나라에서 거울의 장려를 독려했다고 한다.
이러한 유리의 발전으로 안경이 발견되고 그 덕으로 우리는 얼마나 외모 지상주의에 살고 있는가? 안경 뿐 아니라 확대경의 발달로 나이가 들어도 몸짱이니 동안이니 하는 유행어에서 말해주듯 나이가 꼭 그 사람을 대변해 주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현미경으로 더 자세한 것들을 관찰해서 작게 만들거나 혹은 늘려 더욱 젊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다. 사진은 필터를 끼고 어플을 받아 한 20년은 족히 어리고 이쁘게 만들 수도 있다. 꼭 프로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처럼 평범한 사람도 쉽고 간단히 조작할 수 있으니 이러다 주름지게 늙는 사람은 돈이 없거나 핸펀 사용을 못 하는 사람들만 갖는 오히려 올드패션이 되지 않을까 심히 염려된다.
렌즈를 통해 본 나는, 그야말로 너무 맑아 정나라한 나의 얼굴을 하나의 가감 없이 보여주고 만다. 자잘하게 늘어선 주름들이 나의 나이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눈 밑에 주머니 하나가 검게 드리워져 나의 피곤함이 늘어지게 보일때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언니들의 주름진 이마를 볼 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싶다. 돋보기가 없었다면 모두가 흐릿해서 누구나 이쁘게만 보일 텐데 굳이 현대과학의 힘을 빌어 누구나 늙어감을 한탄하고 덕분에 보톡스니 필러의 성형으로 똑같이 천천히 나이가 들기를 원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누가 더 동안의 대열에 탑승을 오래 할 것인가가 화두인 세상을 한탄하며 나이 든 사람들을 더 굵은 주름으로 내몰고 있다.
누구는 그런다. 나이 듦이 그리 싫지 않다고, 나이가 들면 더욱 성숙된 사고로 세상을 관망할수 있다고, 하지만 난 확대경을 볼때마다 나의 주름진 얼굴이 싫다. 확대경처럼 과학의 발달로 아주 작은 소형 다리미로 조금씩 주름을 쫙쫙 펼수만 있다면 좋겠다. ㅎㅎ
눈은 나에게 쉼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바쁘게만 세상을 보았던 눈을 잠시 내려놓고 천천히 초점을 맞추며 쉬어가라는 의미는 아닐까? 나이가 들어 몸은 느려져 천천히 가라고 말하는데 정신은 젊음으로 착각하여 나이 듦의 속도와 발맞추어 오히려 눈의 도수도 더욱 높여가며 사는 세상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몸의 나잇값과 같이, 눈의 나이도 그대로 두고 세상을 조용히 흐릿한 시선으로 보지 말아야할 건 보지 말고 느릿한 걸음으로 징검다리 걷듯 조용히 주위를 살피며 사는 게 맞는 것인가?
달빛에 비친 내 얼굴을 상상해보니 운치 있는 옛스러움이 묻어나 고즈넉한 저녁의 일상이 그려진다. 초저녁부터 부지런히 저녁밥을 지어 아이들과 둥그런 밥상에서 오손도손 이야기꽃을 피우며 김 한 장 더 먹겠다며 티격태격하는 정겨운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은 두꺼운 이불에서 색색거리며 자고 있고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누런 아이들의 옷을 이리저리 꿰매는 엄마의 굵은 손가락에 주름진 이마가 불그스레 보이는 그런 저녁, 그런 세상이 그리워지는 저녁노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