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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Feb 15. 2022

50대 생일에 친구라는 의미는,

창문을 열어보니 밤사이에 소복이 눈이 와 있었다. 겨울이 깊어가고 있는 중인지 이번 해에만 몇 번의 눈 구경을 해서인지 이 정도 눈 쌓임은 눈도 깜짝 안 한다. 눈이 많이 올 때는 무릎까지도 쉬이 오는 동부지역이라 이 정도는 눈 치울 걱정도 없고 미끄러운 차도로의 걱정도 없고 길이 얼어 아이들 학교에 지장이 줄 정도도 아니다. 그저 하늘에서 고맙게 내려 주는 겨울날의 선물 같다. 


아직도 자그마한 눈꽃들이 하늘을 군데군데 수놓고 그 그림 사이로 간간이 강아지 산책에 나선 미국 여자의 흔들리는 옷깃에 나부끼는 눈발이 더욱 크게 수를 놓고 그 위로 비행하는 자그마한 새들의 날갯짓도 미소 짓는 듯 주위를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부낀다. 털모자와 장화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나가 그 길을 걷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휭 나가려는 나를 단단히 붙잡은 건 내 친구의 기억이 소환되면서부터다. 거실 중앙에 있는 나의 최애 의자에 주저앉았다. 흔들의자에 다리를 꼬고 커피를 마시는데 친구의 얼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내 생일이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카톡 한 귀퉁이에 매달린 11개의 메시지가 내 신경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맨 마지막 메시지는 사진이라는 싸인과 함께...


보나 마나 생일 축하 멘트이거나 이모티콘이겠지... 


언제부터인가 문자를 하다가 더 이상 글로 쓰기가 머쓱하거나 일이 바빠 문자 대화를 급히 중단해야 하거나 아니면 간단히 상황을 종료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모티콘을 사용하는데 이런 단축 기호는 여러모로 감초로써의 역할이 크다. 나 또한 맘에 드는 이모티콘을 직접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하고 가까운 지인에게 선물을 하기도 한다. 문자톡을 할때 간단하면서도 충실한 아이템이다. 요즘엔 이모티콘이 그 사람의 성격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더 발전해서 요즘엔 굳이 종이 카드를 사서 직접 손으로 쓰지 않아도 멋진 카드를 인터넷에서 골라 클릭 한 번으로 세상에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보낼 수 있게 되어 누구나 그 편리함을 이용하고 있다. 


하지만 가끔은 이런 일회성 카드나 이모티콘이 기분을 상하게 할 때가 있다. 인터넷상으로 떠도는 어디선가 많이 보았던 카드를 문자 하나 없이 받거나 미안하다는 말을 들어도 시원찮을 판에 간단한 쏘리 이모티콘 하나가 틱 카톡으로 왔을 때... 물론 깊이 있는 문자와 함께 따라오는 이모티콘은 애교로 봐줄 수 있고 진심의 배가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되고 고마운 일이 될 수 있다. 



자, 자, 본론으로 들어가서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드디어 그 문제의 11개 숫자가 달린 메시지를 열었다. 역시나 한 개만 축하 문자가 있고 나머지 10개는 모두 이모티콘이다. 혹시나가 역시나로 전환되는 고개 흔들림이다. 그럴 줄..훗.. 우리 나이가 10대 20대도 아니고 이런 이모티콘이 문자를 대신할 수 있단 말인가!


아웃! 소리가 내 가슴에서 입으로 저절로 나오는 탄성이었다. 


그러면서 차례로 친구가 소환되었다. 죽을 때 친구 3명이 임종을 지킨다면 대단히 성공한 인생이라는 말을 우리는 참 많이 듣고 산다. 난.. 아마도 한 명이나 내 곁에 남을까 싶다. 진심 그렇다. 내 생일에 나에게 축하 메시지를 보내는 친구는 손에 꼽는다. 내가 자연사로 죽음을 예상해 본다면 아직 평균적으로 2, 30년은 족히 남았는데 벌써 손가락을 꼽을 수 있다는 건 아마도 내 예상이 맞을성싶다.


코로나로 많은 사람이 서로의 인간관계를 심각하게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들 한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인간적인 거리 두기로 이어지고 격리가 오래될수록 점점 소외되는 계층이 많아지고 그래서 현대 사회에 만연된 개인주의의 팽창이 인간의 소외에 기름을 부어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이 오히려 정당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동네 사람들과 정답게 살았던 우리의 옛 모습은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고 1인 1가구 시대의 전환점의 폐해가 고스란히 나오는 지금의 문화를 단순히 코로나 19로 치부해 버리기엔 이 사회의 단면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또 꼭 문화 탓으로 돌리는 것만으로 합리화되지는 않는다. 축하할 일이 생기면 스케줄 관리가 힘들 정도로 바빠지는 인간성 좋기로 소문이 난 친구가 있다. 이런 사람을 보면 '꼭 문화와 이 시대의 거리두기 같은 캠페인 탓만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성격 탓일까? 


요즘 유행하는 성격 유형 테스트(MBTI)를 해보니 나는 INFP라는 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합해 열정적인 중재자라는 성격으로 나왔다.


이런 유형별 테스트는 그때그때의 상황과 기분에 의해 좌우되는 면이 많은 것이니 꼭 정확히 맞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나를 대변하는 데에는 50% 이상은 맞다고도 봐야 한다. 겉으로 보는 나는 백 프로 외향적인 여자이고 당당한 모습이라고 태어나면서 지금까지 듣고 사는 사람 중의 한 명으로써 이러한 결과지를 받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를 아는 모두가 놀랍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글을 쓰게 되면서 겉으로 보이는 나의 외향과 내 안에서 움틀대는 내면은 온탕과 냉탕의 극렬한 온도차처럼  반대급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뭐든 적극적이고 활발할 거 같은 외형인데 한마디로 쿨할것 같은데 스스로는 왜 계획된 그 누구와의 약속도 극도로 싫어하는지, 나만 혼자 있는 시간이 왜 그리도 불안한지, 왜 정말 친한 그룹이 없는지 그리고 왜 소유욕이나 승부욕이 없는지 등등 치열하게 혼자만의 새장 안에서 움틀대고만 있는 듯하다. 


나이가 들어가며 나의 깊은 자의식과 대면하게 되고 나 스스로 남들과 다른 점을 보면서 알게 되는 한마디로 인생의 맛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내 옆을 스치며 지나가는 사람 1, 2 또는 3과 어떠한 여정으로 어떠한 길을 가느냐에 따라 나의 생각과 사고의 방향성이 180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부터는 더욱 내 옆을 스치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렵고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오늘같이 이런 무의미한 이모티콘을 받았을 때 특히 나는 한없이 나와 사람의 관계를 의심하며 나를 자책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남은 친구를 그나마도 찬찬히 정리해 보았다. 


일단 친구의 개념이 어디까지인가를 정리해야 한다. 흔히 기쁨을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을 나누면 반이 된다고 한다. 슬픔 뿐아니라 나의 기쁨까지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라면 그건 찐친구다. 가족을 빼고 그런 찐은 쉽지 않다는 가정하에 나 또한 쉽지 않다고 봐야한다. 그럼 슬픔을 함께 할 수 있는 친구는? 음.. 몇 명이 떠오른다. 내 슬픔을 공유할 수 있고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친구라면 나이가 허락할 때까지 서로를 이해하며 친구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슬픔을 위로해주고 함께 아픔을 나눌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최소한 친구라는 반열에 오르지 않을까? 


하지만 슬픔을 위로는 해주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막상 친구가 성공을 하거나 너무도 좋은 일이 생겼을때 기쁨을 함께 하기는커녕 기쁨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악용해서 나쁘게 남들에게 말을 할 수도 있을 가망성이 있는 친구라면? 이때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그렇다고 아주 멀리하면 그 화가 배가 되므로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눈인사로 함께 알고 있는 사이라는 정도로만 유지되면 좋을 것 같다. 


그럼 오늘처럼 이모티콘만 잔뜩 날리는 친구라면? 일단 생일을 기억하고 있으니 친구는 맞다. 하지만 이런 친구를 단지 생일을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 친구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왜냐하면 이름만 알고 있어도, 그냥 SNS상 친구만 되어도 자동으로 뜨는 생일날 누구에게나 날릴수 있는게 이모티콘이기 때문에 이는 굳이 친구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사이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친구는 굳이 친구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이어나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저 아는 1인! 

 

그렇다면 그들이 보는 나는 괜찮은 친구일까? 솔직히 나는 남에게 주는 것보다 남에게 받는 게 더 익숙한 사람임을 부인할 수 없다. 5명 중 막내라는 꼬리표가 달리기도 했지만 깔끔한 성격의 엄마 교육에도 개인주의적인 면이 있다고 본다. 물론 성격은 거의 90% 이상 본성에서 나온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으로서 굳이 엄마까지 들먹이지 않아도 나의 본성이 그리 남에게 한없이 베푸는 통 넓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친구한테는 뭐 그리 잘할까나.. 생일날 받는 성적표가 좋을 리 없는 건 당연하다. 열심히 관리도 안 하면서 좋은 성적을 받기를 바란다면 도둑놈 심보다. 이모티콘이라도 많이 받으면 횡재인 거지..


나이가 들수록 생일은 그저 숫자에 불가한 무의미한 날이기도 하다.

 

특별히 챙겨주지 않으면 내 스스로 굳이 찾아서 나이를 되새김질하며 알리고 싶지 않은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생일이라고 해서 스케줄을 만들어 특별히 만나는 것도 귀찮아지고 한 살 더 먹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축하까지 받아야 하는지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무슨 일이든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그리 달가워하지 않은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물을 꼽으라면 실은 이쁜 종이 카드 한 장이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생일 카드 한 장으로 끝내기엔 나에게는 아이들이 너무 많다. 아주 멀리서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큰딸은 꽃 배달로 엄마를 기쁘게 해주었고 둘째 딸은 남자 친구를 핑계 삼아 엄마의 생일까지 챙기게 되어 함께 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고 막내아들은 차가 없다는 핑계로 누나의 카드에 꼽사리 껴 그나마 어물쩡 서운함을 달래며 넘어갔다. 남편의 멋진 생일 이벤트는 그 누구의 선물과 바꿀 수 있을까?


오히려 생일날은 나를 이 세상에 내 놓아주신 엄마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게 맞는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엄마는 이 세상에 안 계신다. 대신 내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는 나의 가족이 없었다면 그리고 나만을 위한 생일상을 차려준 친구가 없었다면 정말 초라한 50대 생일 성적표를 받았을 텐데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내 가족과 친구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이들의 생일꽃과 종이 카드


아직도 조그마한 눈들이 하얀 하늘을 수놓느라 정신이 없다. 수북수북 쌓이는 풍성한 눈은 아니지만, 빙점이 올라 비로 내릴 확률을 거슬러 따뜻하게 내리는 눈이 마음 까지 따뜻해지는 어느 2월, 그것도 내 생일에 맞추어 내려 주는 복이니 참으로 행복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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