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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May 15. 2023

갱년기, 미국에서도 피할 수 없다

며칠 전부터 눈이 시린 느낌이 들더니 기어이 눈에서 눈물이 흐른다. 이제는 눈이 따끔거려 잠시 눈을 감고 진정을 시켜야 한다. 엄마들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시며 왜 주책맞게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며, 눈이 짓무르니 연고라도 발라야겠다며 면 가재 수건을 필수로 들고 다니시던 기억이 난다. 눈이 좋은 편이었으나 40대 초반부터 이른 노안이 시작되어 지금은 2.5 도수를 쓰지 않으면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는다. 얼마 전 400쪽 책 한 권을 컴퓨터로 필사하면서 얻은 눈병인듯해 자업자득이겠지만, 그렇게 취급해 버리기엔 그 결과가 가열차게 서럽다. 


눈을 시작으로 그냥 화가 나기 시작했다. 


주변에 이런 증상을 이야기하니 모두가 갱년기라 그렇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난 갱년기라는 말이 참으로 싫었다. 갱년기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한번 붙이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 돼지본드처럼 갱년기라는 오래된 꼬리표가 평생 붙어 다닐 거 같아서 최대한 나잇값의 굴레를 늦게 씌우고 싶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도 갑자기 덥다며 손부채로 부산을 떠는 꼴도 보기 싫고 자다가도 땀이 나서 남편과 각방 쓴 지가 오래라며 어찌 같이 자냐며 놀리던 그 중년들의 말들이 나에게는 그저 한낱 핑곗거리로 여겨졌다. '뭐 얼마나 덥고, 뭐 얼마나 화가 난다고 저리 기분이 왔다 갔다 할까나..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그랬던,


자만에 자만을 더했던 나의 오만이 요 며칠 사이 완전히 무너졌다. 타이핑을 하고 있는 나의 손가락 끝에도 화가 스며들어 자판과 자판 틈사이에서 날카롭게 부딪치고 글을 쓰고 있는 머릿속에도 화가 있어 그 열기가 정수리에 뻗쳐져 도대체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될지 알 수가 없다. 머리에서부터 가슴 그리고 온몸에 화가 퍼지고 있으니 화낼 일이 연속으로 생기고 그 화의 기운이 어디로 튈지 몰라 나를 둘러싼 모든 일에 반드시 화가 미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 거 같은 요즘이다.


집안 욕실 공사가 열흘 만에 끝났다.


참고로 미국에서 10일 정도 소요되어 일반 공사가 마무리되었다면 비교적 단시간에 끝났다고 볼 수 있다. 짧은 시간에 끝났으면 좋을 일인데 깔끔하고 새것의 기쁨은 1도 없이 계단이며 가구에 쌓인 먼지를 닦다가 폭발해 버렸다. 2주 동안 소음과 먼지로 고생은 했지만 내가 직접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공사하시는 분들이 애를 무지하니 먹인 것도 아니고 돈이 없어서 빚을 내서 한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나 혼자 청소를 하는 것도 아니고 남편이 쓸고 닦기를 몇 번 하고 아들 또한 자기 화장실이라 열심히 닦고 있는 참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런데도 왜 화가 머리끝까지 나는 걸까? 왜 갑자기 발바닥에서는 불이 나고 발이 저리면서 몸이 뜨거워지고 그 뜨거움이 가슴에 돌고 돌아 머리에서는 화로 번져 나가는지 그 누가 알 것인가? 그냥 화가 나는 데에는 도리가 없다. 결국 내 표정을 읽은 남편이 물었고 나는 발바닥이 아파서 화가 나니까 마사지 기계를 가져오라며 자려고 자리에 누운 남편을 기어이 일으켜 세우고 마사지를 시켰다. 나 같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이련만 그래도 착한 남편은 순순히 내 말을 따라준다. 난 거기에 또 묻는다. "당신은 왜 화도 안 나?"며 더 다그친다.


화장실 공사가 끝났으니 채워야 할 것들이 생긴다. 이것저것 사들인다. 반드시 바꿔야 하는 것이 생기고 리턴을 하기 위해 스토어에 갔다. 가면서도 벌써 화가 났다. 이미 화가 난 얼굴을 하고 있으니 누구를 만난다 해도 내 표정이 그전처럼 미소 띤 얼굴이 아닐 것이라 속으로 생각하면서 다른 물건을 보지도 않고 줄을 먼저 섰다. '줄은 왜 이리 긴 거야?' 그전에는 이뻐 보이던 것들도 오늘은 모든 게 밉게만 보인다. 왜 저런 디자인을 한 거야?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머릿속 혼잣말을 계속 이어나간다. 이러다 그 생각들이 입 밖으로 나오면 난 정신 나간 여자일 거야..


드디어 내 차례다.


리턴할 물건을 올려놓는데 점원이 이 상품은 리턴이 안된다고 말한다. 왜? 이미 오픈해서 안 된다고 한다. 아니 미국은 리턴의 천국이 아니었던가? 샤워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 채로 환불을 요구하면 샤워기 리턴이 가능하고 신었던 신발 교환도 가능하고 최대 30일 이내에만 가져다주면 리턴을 해줘야 하는 의무가 있는 나라인데 오픈이 되어 안된다고? 그것도 사용해 보지도 않은 상품을 그대로 리턴한다는데 꼴랑 화장실 바닥 깔판 하나를 교환하는데 안 된다는 게 말이 돼?


상품이 오픈되었다고 하는 이유는 겨우 한쪽 모서리에 붙어있는 라벨과 깔판이 분리되었다는 것인데 가격표를 제거한 것도 아니고 이물질이 묻은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하루가 지난 것도, 열흘이 지난 것도 아닌 아침에 샀다가 6시간 후에 색이 맞지 않을 거 같아 리턴하고 다른 색으로 교환을 하려 했는데 안된다고? 이런!!!


평소 같으면 그냥 리턴이 아니라 색만 바꿀 거니까. 아, 그것도 아니다. 교환하기 전에 다른 칼라를 카트에 싣고 와서 색 교환만 한다고 했겠지만, 이번엔 그냥 교환만을 먼저 했으니까 리턴이 안된다고 했을까? 아무튼 평소 같았으면 모든 걸 내 잘못으로 인정하고 바로 오케이만을 외치며 오히려 미안해하며 그저 창피해서 얼굴 벌게져서 금세 나왔을 일인데 이번엔 달랐다. '누구든 걸리기만 해 봐라'라는 심정인지라 '그래 너 잘 걸렸다' 싶었다.


일단 점원에게 매니저를 불러 달라고 했다.


아, 마침 옆에.. 매니저가 잠깐 살펴보더니 역시나 리턴이 안된다고 했다. 어라? 당신도 못해준다고? 내가 따졌다. '뭐가 오픈인데?' 물으니 라벨과 제품이 분리되어 당신이 이미 사용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헐.. 아침에 구매해서 직장에서 일을 마치고 그대로 가지고 온 것이고 구매할 때 이미 라벨이 덜렁덜렁해 있어서 스스로 떨어진 것이고 난 내 욕실에 깔아보지도 않았다며 소리쳤다. 그런데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코비드 이후로 상품을 오픈하면 리턴이 안된다는 말만 계속했다. '그놈의 코비드 타령은 언제까지 할 거야?'


'그래? 그럼 그런 규칙을 보여 달라'라고 했다. 어디에 그런 규칙이 쓰여있는지, 언제 그런 정책이 바뀌었는지 보여달라고 다그쳤다. 헐, 그런데도 원래 그랬다며 보여주지 않았다. 인종차별이라는 생각을 지울수는 없었지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옆에 있는 손님은 내 편에 서서 나에게 응원의 표정을 지어 보이길래 그 손님한테도 하소연을 했다. 점원은 내게  영수증을 돌려주며 미안해 하기는커녕 'Have a nice day!'라고 말하는데 피가 거의 거꾸로 솟았다. 난 면상에 대고 소리쳤다. "모든 걸 리턴할 거야!!"라며 영수증을 거의 찢듯이 뺏어 들었다.


내 영어실력은 영어로 싸움을 할 정도의 수준이 절대 아니다. 아직도 영어 울렁증에 시달리고 그놈의 망할 언어 때문에 미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싶지 않은 게 현실인데 진짜 화가 나니까 어찌 그리 영어가 술술 나오는지 앞뒤 잴 것도 없이 뻔뻔한 아줌마가 되었다. 그런 모습이 나에게 이미 내재되어 있었는지 영어가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르게 소리치고 억지 쓰고 눈을 부라리며 다른 사람이 다 듣게 큰소리를 쳤다. 얼굴은 벌게져서 눈빛은 살벌하고 다짜고짜 화를 내며 왜 안되는지 설명하라고 다그쳤다.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저런 무식하고 되먹지 않은 아줌마가 있나? 아줌마가 되면 다 저러나? 나는 절대 저러지 말아야지'라며 내가 전에 마음속으로 비난했던 그런 마음으로 나를 몇 번이고 쳐다보았을 것이다.


화가 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걸 갱년기 증상 중의 하나라며 그냥 지나칠 수도 있다. 갱년기에는 치료제가 없고 중년쯤 보이는 여성이 이상한 행동을 보이며 미친 짓을 해도 무마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어느 정도 조성된 탓도 있다. 중2쯤 아이들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버티고 있기에 봐주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더욱 부채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듯 갱년기 아줌마의 반란 또한 그런 차원에서 엄마의 이상행동에 의해 모든 가족이 희생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남편에게는 마치 갱년기가 모든 중년 여성의 특화된 권리인 양 요구하고 아이들에게는 필요 이상으로 잔소리하며 지나치게 간섭해 부모와 자식 간 갈등으로 이어지고 주위 사람에게는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하소연해 부담으로 이어지고 스스로에게도 갱년기라는 강한 프레임을 씌워 자기만의 연민으로 면죄부를 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이런 나만의 시각과 더불어 사춘기도 조용히 지나갔으니 갱년기도 그러리라 자만을 하지 않았나 싶다. 이 또한 받아들이면 그뿐일걸. 가족들에게 아이들의 엄마로서 남편의 아내로서 끝까지 메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갱년기라는 호르몬 이상이 엄마에게도 왔다는 사실을 말해야겠다. 조금만 참아주면 일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니 화를 조금 내더라도 이해해 주길 바라고 갑자기 우울해져 눈물을 보이더라도 걱정하지 말고 뜬금없이 전화해도 잘 받아주고 선물이 없다며 혹은 적다며 서운해해도 웃으며 넘겨주고 설령 말도 안 되게 고집을 피우면 그때만 잠시 못 이기는 척 져주고 여기저기 아프다고 말하면 집안일도 조금 도와주기 바란다고.


갱년기가 얼마나 오래가려는지 모르겠다.


괜스레 눈물이 주르륵 흐르는 건 물론이고 아침에 눈을 뜨기 싫을 정도로 하루를 어찌 살아야 할지 막막해지고 그저 피곤하다는 생각만 들어 자꾸만 어딘가에 눕고 싶고 누가 나에게 한마디만 하면 열 마디로 되돌려 주고 싶고 혼잣말로 상대를 무지하게 싫어하고 아무 일도 아닌데 화가 나고 발바닥에선 불이 난다. 그렇다고 24시간 이런 증상이 있는 건 아니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아서 나한테 무슨 갱년기! 이러다가 불현듯 기분이 확 나빠지는 게 조석으로 변하는 봄 날씨와 꼭 닮았다.


화가 나서 미칠 거 같아 이런 글을 쓰고 있는데 쓰다 보니 글로 마음의 치유가 되었는지 지금은 마음이 차분해진다. 오늘은 남편과 아들에게 맛난 저녁을 주어야겠다는 생각과 재미난 드라마를 보며 어떤 야참을 먹을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글이 좋은 건지 마음이 널을 뛰어 그저 시간이 약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차가운 주방 싱크대 위에 선풍기를 올려놓고 그 옆으로 올라가셔서 콩나물을 다듬으시던 엄마의 하루가 그리워 나 또한 그 엄마처럼 조용해지기를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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