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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ul 13. 2023

미 동부 시골에서 산딸기에 취하다

정원에 물을 주고 있는 나에게 남편이 불쑥 말을 건넨다.


"여보, 이 열매 한번 먹어봐"

"응? 이게 뭐지?"

"며칠 전부터 나기 시작했는데 한번 먹어봐"

"어? 맛있다"

"그래? 먹어도 괜찮겠지?"


서울 그것도 종로 출신인 남편은 이런 것(?)을 본 적이 없었던 서울 남자고, 나는 뒷산을 마구 뛰어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낸 촌년 출신이라 그랬는지 아무 생각 없이 빨갛고 포동한 그것을 냉큼 먹게 되었다.


어릴 적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아빠가 정해놓은 피아노를 두드리고 난 후, 잠깐의 짬을 뒷산을 뛰어다니던 기억이 있어 그나마 나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데 조금은 숨통이 트임을 느낀다.


그런 사소하고 슬쩍이나마 스치는 기억조차 없었다면 나의 어린 시절은 눈물과 회환으로 얼룩졌으리라. 몇해 전 맞이한 그 뒷산이라는 동산은 그저 자그마한 봉우리 정도였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 본 그 뒷산은 지리산이나 백두산의 깊고 깊은 산이었고, 그 높이가 가늠하지 못할 정도도 높은 산이었으며, 그 좁은 산길은 우리의 최대 복잡한 비밀 통로였다. 더구나 어린아이들이 뛰고 걷는 좁다란 오솔길마다 피어난 아카시아의 풍성하게 풍기는 향은 지금도 내 코끝에 진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뛰어다니다 빨갛고 올망졸망하고 작고 포동해 보이는 작은 열매를 만나면 우리는 누구 할 것 없이 그 곁에 쪼그리고 앉아 조막만 한 손으로 손을 뻗어 손톱만 한 딸기를 따 먹기 시작했다. 어린아이의 키에 맞게 자란 그 열매가 산딸기인지 그냥 딸기인지 여기 말로 로즈베리인지 그저 꽃송이에서 나오는 달달한 그 무언가를 열심히도 먹었다. 누가 가르쳐 주는 이 없으니 그저 맛난 사탕이나 초콜릿을 산속에서 만난 것처럼 신나서 입술이 붉게 물들도록 따먹곤 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일단 딸기 모양이고 맛도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으니 핸드폰으로 찍어 확인을 해야 했다. 정원을 가꾼 지 꼭 15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렀건만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어릴 적 먹어본 기억도 흐릿했다. 성격적으로 앞뒤 가리지 않고 덥석 입으로 가져가긴 했지만, 산속에서는 온갖 잡다한 것들이 나는 곳이므로 혹여나 독이 든 열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절이 좋아 금방 확인이 되었다. 100프로는 아니지만 한국말로는 산딸기 영어로는 로즈베리라는 설명이 찍혔다. 와 정말 산딸기였구나!! 그 어릴 때 소꼽 친구들과 숲속에서 먹어보았던 그 맛, 그 잊을 수 없는 추억의  산딸기였다니 그 기쁨은 오랜 친구를 우연히 길에서 만난 순수한 들뜸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한 송이에 7, 8개가 달려야 할 자리에 기껏해야 두세 알이 매달려있는 송이들이 제법 많았다. 그러고 보니 항상 사슴 가족이 이 근처를 배회해서 우리 댕댕이 가출 소동이 벌어지곤 했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열매 때문이었구나! 그 길을 눈으로 따라가 보니 어라, 눈길이 가는 곳마다 빨간 산딸기가 보이는 것이 아닌가? 갑작스러운 출몰에 어안이 벙벙하여 급한 대로 손바닥에 하나둘 딴 산딸기가 양손으로 받기 어려운 지경으로 소복이 쌓였다.


"여보, 안 되겠다. 담을 그릇이 있어야겠어"



얼른 들어가 급한 대로 플라스틱 용기 하나를 냉큼 집어와 눈에 보이는 산딸기를 모조리 따기 시작했다. 따면서도 괜히 사슴 가족을 질투했다. '아니 이리 좋은 것들을 어찌 알고 다 따먹었을까?' '사슴들이 이런 좋은 것들만 먹고 자라서 사슴뿔에 많은 영양이 있나?' '사슴뼈가 그래서 사람 관절에 좋다는 말이 있는 건가?' '여우나 다람쥐 그러고 보니 새들도 여기 주위를 맴돌았는데 다 이유가 있었구나..' 

혼잣말을 열심히 하고 있다가 문득,


"아니 근데 당신은 매번 잔디를 깎으면서 이제야 본 거야?"

"매번 봤는데 독이 있는 열매 같아서 그냥 잘랐었지."

"뭐라고? 매년 났었다고?"

"응 내가 산딸기를 본 적이 있어야지"

"그래도 그렇지. 그럼 나한테 먼저 먹어보라고 한 건 독이 있을까 봐 그랬던 거야?"

"아니 당신이 나보다는 낫잖아. 허허"


화낼 겨를도 없이 산딸기의 면적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넓었다. 미국으로 치면 그리 크지 않지만 360도가 나무로 둘러싸인 집이라 커다란 나무 아래 그러한 넝쿨들이 뺑 둘러쳐져 있고 발걸음을 옮기는 곳마다 한마디로 지천으로 깔렸으니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이렇게 많은 산딸기가 매년 이맘때쯤 열렸는데 15년을 산 우리는 이제야 이것의 존재를 알았다니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산삼이 내 집 앞에 묻혀 있다 해도 산삼인지 더덕인지 그냥 풀뿌리인지 모르면 뭘 할 것이고 더 귀한 그 무언가가 있다 한들 내가 모르면 그저 돌멩이인 양 모르고 가는 수밖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 누가 그랬던가 내가 그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냥 이름 없는 들꽃으로 남는다고... 딱 우리가 그런 심정으로 헛웃음이 나온 것이다. 심지어 다른 색도 아닌 그리도 화려한 빨간 열매를 못 보았단 말인가?


산딸기 입장으로 보면 우리 같은 무식한 사람이 주인으로 있다는 것 자체 굉장히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비료 한번 주지 않아서 벌레와 사투를 했을 것이고 야생에서 혼자 크고 있으니 험하고 질긴 풀과 엉겨야 했을 것이다. 매년 그렇게 아름답고 탐스럽게 피워낸 귀한 열매를 알아봐 주지 못하고 심지어 독이 들었을 거라는 의심의 눈으로 매번 그 싹을 베어버렸다니 산딸기의 위용은 그저 사슴이나 여우 그리고 새들의 간식거리로만 제공되었을 테니 미안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플라스틱 통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좀 더 큰 그릇이 필요했고 걸음을 옮기면서 그 한탄과 탄식이 동시다발로 던져졌다. "저기 봐봐, 어머, 여기도, 에고,  안쪽에는 천지가 산딸기네, 어머 어머, 저기도, , 저기도 봐요" 그렇게 작고 통통한 딸기를 맛보며 담다 보니 남편이 좋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여보 당신 좋아하는 복분자주를 담가보는 게 어때?"

"복분자술이 산딸기로 만드는 거야?"

"잘 모르겠는데 그게 그거 아닌가?"

"응, 해보자"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소주를 사러 술가게를 가는데 '누구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옛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운전하는 길마다 나무 아래에 포진되어있는 가느다란 줄기에 옹기종기 빨갛고 탐스러운 산딸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 작지만 용기 있게 음지 양지 가리지 않고 자기 자리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질긴 줄기의 가시마다 엉겨 붙어 있었다. 이제는 척 보면 바로 알아볼 수 있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4홉들이 소주 한 병을 샀다. 한 번도 과실주를 담가보지 않았기에 일단 인터넷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소주 한 병에 산딸기는 약 3/2 양으로 깨끗이 씻어 종이타월로 물기를 제거하고 설탕을 적당히 버무려 유리병에 넣었다. 산딸기 주를 담는다고 하면 거창하리라 생각했지만 따라 해보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담자마자 살짝 핑크빛이 도는 게 여간 이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결과는 적어도 100일이 지난 후에나 나오는 일이라 시작점은 번개처럼 빠르고 쉬웠지만, 그 끝점의 결과는 미지수다.


어느 가을날, 우리 앞마당에 널브러져 있는 딱딱한 것들이 도토리라는 사실을 알게 해 준 이웃이 생각난다. 그때 그분이 마당에서 도토리 한 자루를 주워 도토리묵을 만들어 오셨다. 다람쥐가 먹는 양식으로만 생각해서인지 맛은 생각나지 않지만, 우리 마당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에 그저 감격에 취했었다. 10여 년이 훌쩍 흐른 오늘은 뒷마당에서 귀한 산딸기를 발견했다. 중요한 건 여름마다 신선하고 달콤한 산딸기 맛을 무한정 맛볼 수 있고 건강에도 좋은 복분자 술을 매년 맛나게 마실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 취한 것처럼 웃음이 난다. 이름이 복분자라 그런지 복을 많이 받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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