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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Dec 02. 2019

장기기증에 대한 나의 단상

#65ㅣ

나는 항상 입버릇처럼 말하는 게 있다.

차사고나 불의의 사고로 죽으면 장기기증을 한다고 말하고 운전면허증을 받을 때 장기기증을 하겠다 사인을 해서 내 운전면허증 아래에는 검정 하트가 조그맣게 찍혀있다. 그랬는데 이번 땡스기빙에 의과 공부를 하는 우리 딸이 와서 말한다.


엄마, 장기기증은 엄마가 원하면 하는데 엄마 몸은 기증하지 마.
왜? 엄마는 하려고 하는데?
안돼! 엄마, 내가 해보니까 우리가 배우는 사람들이라 잘못해서 그냥 막 함부로 자를 수도 있고... 안돼 엄마 난 엄마 몸이 찢기는 게 싫어.
그럼 누가 너희들의 공부를 도와줄 수가 있겠니? 엄마는 그 말 들으니까 더 해야겠다 생각되는데? 우리 딸처럼 몸을 공부해야 하는 학생들의 부모가 앞장서야겠네..
엄마.... 엄마는 너무 말라서 공부할 것도 없네요 라며 웃었다.


그러면서 딸이 공부하는 비디오를 슬쩍 보았다.

헐... 가슴 부위를 한 겹 한 겹 얇게 뜨며 교수가 설명하더니... 얼굴로 올라간다. 둔탁한 망치로 얼굴뼈를 깨더니 눈 부위를 또 한 겹 한 겹 떠 옆으로 옮기더니 이젠 눈알로.... 난 그만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말았다.

우리 딸이 이런 죽은 사람의 몸을 직접 보고 만지며 공부하는구나. 웬만한 강심장으론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구나. 그래서 내 어릴 때 친구는 의대에 들어가자마자 해부학 첫 시간에 기절했다는 말을 했구나 싶다.


겉으로 보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의 모습은 고고하고 공부를 엄청 많이 해서 지식의 창고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듯보여 겁나 멋있어 보이는데 뒤에서의 의학공부는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사람의 몸을 가르고 찢어보고 들여다보고 일반 사람들이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하는구나 생각하니 안쓰러웠다.


우리 집에 살고 있는 까만 쥐 5마리


그러고 보니 우리 집에는 5마리의 까만 쥐가 살고 있다. 벌써 3년 전에 우리 둘째 아이가 쥐실험을 하다 너무 불쌍해서 데리고 온 녀석들인데 지금도 차고 귀퉁이에 버젓이 살고 있다. 그것도 내가 한국에 있을 때 아빠랑 작당모의를 해서 지하에 기거하기로 합의를 보고 나 몰래 가져왔더란다. 집에 돌아와서도 난 한동안 우리 집에 감히 쥐님이 같이 동거하는지도 모르고 잘 살았었다. 내가 지하로 전기 체크를 하러 내려가지 않았다면 영원히 나를 속일 셈이었던 것이다.


실험을 하기 위한 실험쥐라 일반 야생쥐처럼 오래 살지 못하고 한 6개월만 산다며 날 설득했고 그래, 눈에만  보이면 괜찮겠지 했지만 우리의 정서상 쥐랑 동고동락한다는 자체가 치명적으로 부르르 떨 정도의 끔찍하고 위험한 동거였다. 그래서 난 내 집인데도 불구하고 지하를 내려가지 못한 지 2년쯤 되었을 때 선언했다. 6개월의 시한부가 2년이 되었으니 엄마가 참을 만큼 참았다 엄마도 편히  권리가 있지 않느냐 쥐를 선택하든 엄마를 선택하든 해라... 내가 쥐와의 생존에 목숨을 걸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중간 타협점으로 이젠 지하에서 차고로 이동을 해서 바깥 야생의 공기까지 접하게 된데다가 아직도 똑바로 보지는 못해 슬쩍 보니 놀이시설까지 갖춘 근사한 이층집에 푹신한 솜을 매주 한 번씩 갈아주니 아늑하고 안전함은 물론이고 삶의 질이 최상이니 어찌 6개월만 살 수 있을까? 앞으로도 2년은 더 살지 않을까 심히 걱정이다. 이렇게 언제 죽나를 기다리고 있는 나와 매주 깨끗한 환경으로 오래 살기를 바라는 아이들과의 괴리감은 어찌할까?


동물의 생체실험과 로봇의 대체실험


인간의 건강을 위해 동물의 희생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특히 실험쥐의 생체실험을 반대할 수도 찬성할 수도 없는 입장이다. 하나의 생명을 놓고 보면 쥐나 사람이나 똑같은 생명체임은 분명하지만 우리 인간의 손에 달린 그들의 운명을 어찌 논할 수 있을까만 그래도 꼭 살아있는 생명에 생체실험을 해야 하는지는 고려해보아야 한다. 대체의학이 동양의학인 것처럼 생체실험이 아닌 로봇 같은 대체실험을 연구함이 어떨까? 아마 지금쯤 만들어지고 있진 않을까?


하긴 독일 나치시대에는 인간에게 직접 실험을 해서 지금도 독일의 의료기술을 따라갈 수 없다 하고 일본 또한 그들의 기술을 훔쳐오기도 하고 도용하기도 하고 또 직접 일제시대에 한국, 중국, 러시아 그리고 미국 사람들에게 마루타라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731부대 이야기들은 널리 알려져 있는바 인류가 발전하면서 생명연장이라는 얼토당토한 명분으로 또 다른 비인간적인 생명의 희생이 따라야만 했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위한 생명연장이고 누구를 위한 생체실험인지 고개가 갸우뚱해짐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평균수명이 5,60이라면 그 또한 나쁜 일이 아니다


생체실험이 아닌 죽은 사람의 몸을 해부한 동의보감을 쓴 허준은 사람의 몸안을 보기 위한 노력으로 그의 스승으로부터 유언을 받고 스승의 몸 해부를 강행했다고 한다. 그 일이 400년 전이고 그전의 인간의 몸은 짐작으로만 가늠하고 확실하지 않은 잣대의 경험으로 의학이 이어져 왔으니 평균 수명이 5,60이었음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5,60이 평균이라면 또 그러려니 하고 세대가 교체되었을 텐데 그 또한 나쁜 일만은 아닌 게 인간 사이클의 평균수명에 태클을 달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과학의 발달로 이어지는 생명연장


점점 자동화되고 의학이 발달되어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노력뿐만 아니라 더욱더 오래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심에는 한계가 없다는 듯 죽기 전에 자신을 냉동 보관해놓고 과학의 발달을 기대하며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다시 깨어나길 바라는 인간도 오래전부터 있어왔고 줄기세포를 발견해 아프지 않고 천년만년 살기를 바라는 사람도 생겼다. 또한 나와 똑같은 인간이 나올 수 있는 복제인간이 가능한 세상에 살고 있으니 우리는 어디까지가 인간 수명의 한계인지 알 수 없는 이상해져만 가는 세상에 살고 있다.


보톡스가 그전엔 얼굴이 생명인 연예인이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특수한 일로써 누구에게나 눈총 받는 일이었지만 지금은 돈이 없는 사람만 주름이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중화되어 버린 게 사실이듯이 얼마 남지 않은 미래에는 돈이 없는 사람만 일찍 죽는다는 기막힌 말들이 대중화되어 버릴까 감히 무서움을 느낀다. 딴 얘기로 흘렀지만 아무튼 생명연장을 위한 기술로 동물의 생체실험이나 사람의 사후 실험밖에 현시점에선 다른 대안이 없다면 누가 그 실험대에 오를 것인가?


몸을 기증해야 하는 이유


불교의 윤회사상으로 보는 지금의 생은 태어날때부터 이전 생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출발한다고 말한다. 이전의 삶이 반영되어 지금의 생에서 상을 받고 죄를 받는다 해서 오죽하면 요즘 말로 '이생망' 이번 생은 망했다는 말이 나올까? 그럼 다음 생을 위해서 이번 생을 잘 살아야 하는데 죽은 내 몸을 함부로 대하면 즉 내 몸을 난도질해 버리면 다음 생이 갈기갈기 찢겨 잘 살지 못한다거나 다시는 인간으로 태어나지도 못하고 영혼을 떠돈다는 말로 설명이 될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데로 천국에 혹은 지옥에 가야 하는데 가져갈 몸이 없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죄가 더욱 가중되어 가중 죄의 벌을 더 받게 되는 걸까?


아니다. 불교의 윤회설이나 한국의 신체발부 수지부모 (身體髮膚 受之父母)의 부모에게서 받은 몸을 사랑하고 아끼라는 정당성만으로 살아있는 생명을 살릴 수 있음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일단 내가 식물인간이 된다거나 죽기 직전이라면 기꺼이 내 장기를 기증해 단 한 명의 생명이라도 구하고 싶다. 식물인간으로 목숨이 붙어있어 숨만 쉬고 자아가 정지되어 누워있다면 난 기꺼이 장기를 남에게 주어 내 몸이 아닌 그들의 몸에서 건강한 삶으로 살기를 원한다. 생각할 수 있고 내 의지가 눈빛으로 나타나 내 생각이 전달되는 상태, 난 적어도 딱 거기까지의 삶을 살아있는 삶이라 정의하고 싶다.

인간으로 살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


또한 내가 죽은 후의 내 몸뚱이와 몸의 내부를 직접 보며 공부하고 관찰하고 실험해야 더 발전할 수 있는 의학교에 기증하고 싶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인간으로 살다 다시 흙으로 돌아가면 그뿐이고 인간에게 도움이 되고 돌아가면 더 좋지 않은가? 누구나 내가 죽은 모습에서 발가벗긴 채 난도질되는 상황을 상상하기 싫기는 매 한가지다. 하지만 죽은 후의 모습까지 더군다나 사후의 더 미래까지 내가 관여해야 하나? 나의 희생으로 백만 명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실험대상이 된다면 기꺼이 내 한 몸 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래도 딸이 한마디 하기를,

죽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기 위해 사진으로 찍는 것도 안되고 죽어 있어도 환자는 환자이기 때문에 환자에 대한 비밀 준수도 해야 하고 모든 실험이 끝나면 하나의 손실 없이 다시 몸을 만들고 가족들이 모여 기도를 하고 화장을 한다고 한다. 그만큼 기증해 준 사람에 대한 예의와 감사를 전한다고 하니 정말 다행한 일이다. 그럼 됐다. 한평생 실컷 부려먹고 거기에 좋은 일 한다고 몸을 세상에 다시 기증한다면 내 할 일은 다했다 싶을 것이다. 돈도 기부하는 판에 돈도 안 드는 몸을... 김지나 참 잘살았네! 라며 스스로 자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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