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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깊은 겨울이 끝나갈 무렵 그러니까 봄의 기운이 오기 전 개나리의 노란 봉오리가 올라오기 직전 그때를 기막히게 맞추어 놓치지 말고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집 주위에 있는 커다란 나무를 잘 살펴 자르고 다듬어야 그 해의 안전을 기원할 수 있다. 그런데 다음 해의 봄 기운은 커녕 이번 가을이 채 가기도 전,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비와 태풍이 불어 높은 나무들이 무섭도록 흔들거리더니 급기야 쿵! 소리와 함께 집 근처 어딘가에서 나무가 쓰러짐을 직감했다.
예상대로 아침에 나가보니 썬룸 바로 옆에 집채만 한 나무가 떡하니 누워있었다. 정말로 다행인 건 나무들 사이사이로 빗겨가며 쓰러졌고 커다란 가지들에 닥지닥지 나뭇잎들을 달고 천연덕스럽게도 아직 단풍이 가시지 않은 살짝 발그레한 모습으로 누워버렸으니 이를 어찌하랴. 겨울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나뭇잎이 달려있는 나무는 자르는 것도 힘들고 자른 뒤의 잔재도 많아 초록을 달고 쓰러져 버리면 헐벗은 나무에 비해 비용이 배로 들어 알뜰히 세워놓은 일년의 계획이 무산되어 버리는 꼴이된다. 자연의 힘에 쓰러지는 맥없는 계획이 무슨 소용이람!
비용이 문제지만 아이들이 오는 땡스기빙은 11월 마지막 주 목요일이니 나무를 처리할 시간은 다행히 남아 있다. 땡스기빙 전에 할 일은 낙엽을 치우는 일인데 이번에는 쓰러진 나무를 이동시키는 일을 추가해야 하니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까? 그러고 보니 처음 이 집과의 대면이 쓰러져있는 나무들과의 만남이었다. 집 사이즈며 실내구조며 정원이며 지은 지 단 1년 된 집이라 깨끗하기도 하고 360도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수목림같고 마침 단풍이 절정에 치닫는 가을날 노란 길에 반했지만 단 한 가지 숲 속에 여기저기 누워있는 나무들이 마음에 걸렸었다.그때는 처리 비용은 생각지도 못했고 그저 숲속의 공기가 누워있는 나무로 인해 스산한 느낌만 받았었다.
30센티의 낙엽이 눈처럼 잔디 위에 앉았다
당장 그해 겨울이 오기 전의 모습으로 가보자. 그렇게나 이쁜 노랗고 빨간 낙엽들이 비 오듯 날릴 때만 해도 몰랐다. 멋진 낙엽비가 쏟아져 천지사방에 수북수북 쌓이는데 마치 눈이 약 30센티정도 잔디 위에 쌓였다고 생각하면 살짝 과장해서 맞는 말이지 싶다. 가만 놔두면 낙엽이 비나 눈에 젖고 젖어져 퇴비가 되고 그러면 잔디가 죽을 예정? 마음이 급해져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낙엽을 치우는 업체와 연락해보니 가격이 글쎄 $500이란다. 아니 낙엽을 걷어내는데 한국돈으로 6십만 원이라니... 그런 눈먼 돈을 낙엽과 함께 날려버릴 수는 없지. 우리가 한 번 해보자.
일단 드라이브웨이 즉 우체통에서부터 집에 오는 길을 시작해보는 거야. 10년이 지난 이야기이고 그때의 우리 아이들은 13살, 8살, 2살이니 에구 무슨 도움이 되랴. 남편과 내가 이리저리 낙엽을 옆으로 밀어 담고 또 옆으로 밀어 담고.... 참으로 어이없는 일인 게 1시간을 해도 1미터 치우는 게 버거우니 이 넓은 낙엽들을 무슨 재주로 하나.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일임을 1시간 뒤에 깨달았다. 그래! 이래서 한국 사람들이 쉽게 이런 곳에 살지 못하는구나. 집이 중요한 게 아니고 정원 사이즈와 나무의 유무가 정말 중요한 집 구매의 포인트 라는걸 몰랐었다.
그 가을의 끝 땡스기빙이 지나면서 알게 된 정원에 들어가는 비용이 하나 둘 그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눈이 오기 시작했다. 처음의 눈은 아름다웠다. 5센티 정도까지는 그래도 견딜만하다. 아무런 조치 없이 지나갈 수 있는 높이다. 5센티가 넘어가면 위험 수위다. 눈이 온 다음날 온도가 올라가면 녹아 없어지니 기다리기만 하면 되지만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면 그대로 얼어붙어 빙판길이 되어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버리니 이때는 기온의 높낮이에 온 촉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온도가 내려갈 거라는 사인이 뜨면 곧바로 눈을 치우는 업체에 전화를 한다. 10센티 이하면 $100 정도 선이지만 내가 최대 $500까지 지불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우리 강아지들이 헤엄치며 돌아다닐 정도의 눈높이고 눈 치우는 업체에 비해 수요가 많아 한밤중에 오게 되었고 중장비 몇 대가 사이렌 불빛으로 눈을 치우는 바람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니 눈으로 인한 눈 전쟁이 난 것 같은 한 겨울밤의 눈소동으로 기억된다.
눈이 많이 온 후의 사태는 여기저기의 흔적으로 남기 마련이다. 일단 큰 트럭 앞에 달린 커다랗고 넓적한 포크레인이 산처럼 쌓인 눈을 떠내면서 혹은 긁으면서 생기는 길의 상처는 아스팔트가 깨지기도 하고 움푹 파지기도 하고 금이 쩍쩍 갈라지기도 한다. 일 년에 한 번 아스팔트 위에 도장을 해서 갈라짐을 예방하고 군데군데 실리콘을 집어넣어 더 이상의 깊은 골짐을 방지해야 하고 5년에 한 번 정도는 아스팔트를 아예 다시 높이 얹어야 깨끗한 도로로 오래 사용할 수 있다.
아! 이제는 저 쓰러져 누워있는 내 집의 나무를 처리(?)하고 옮겨야 하는데 자신이 없다. 어떤 나무는 아프리카에 사는 바오밥나무처럼 밑동 구리가 보일 정도로 파여 다람쥐들의 신나는 놀이터가 되어도 오래오래 견디더만 이번에 쓰러진 나무는 밑동도 보이지 않았고 나뭇결도 깨끗하고 나뭇잎도 왕성히 피웠는데 아무런 예고 없는 죽음에 그저 우리의 안전만을 살피게 되니 미안한 마음이다. 어림잡아 그곳에 100년은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터인데..
참으로 희한한 건 이곳 나무들은 뿌리째 뽑혀버리는 그 뿌리가 무시무시한 나무의 크기에 비해 터무니없이 작다는 것이다. 꼭 미국의 짧은 역사처럼 뿌리가 땅속 깊이 자리잡지 못한 상태에서 경제만 비대하게 성장해 버린 큰바위 얼굴을 닮은듯 키는 20미터가 넘을 정도인데 뿌리는 겉으로만 뻗어있는 모양새로 넘어간 뿌리가 얇게 떠져있는 수제비 같다. 그런 나무가 떡하니 누워 있으니 내 힘으로는 감히 치울 수 없는 신의 영역 같은 무게이고 남에게 치우라 말하려니 나뭇잎까지 빽빽이 달려 누워있는 크기가 일반 나무의 서있는 높이만 하니 비용이 엄청날 듯하고 이래저래 미루고 있는 참이었다.
새벽바람부터 요란한 웅웅 거림에 창밖을 보니 건장한 남자 다섯 명이 누워있는 나무에 달라붙어 나뭇가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하루도 미루지 못하는 성격의 소유자인 남편이 나에게 말도 없이 시작한 일이다. 낙엽 치우는 일까지 세트로 묶어 $1500에 퉁쳤다며 자랑스럽게 딜한 가격을 내놓았다. 한화로 백칠십만 원쯤 되는 돈을 영양가 없이 날려버린 듯해 이놈의 집 이사를 가는 게 낫지 싶다가도 우리 아이들이 곧 온다는 생각에 그런 생각을 날려야 한다. 타주에서 공부를 하다 명절이라 가족이 모이는 공간이 이 집이고 어린 시절 성장했던 미국 이민 1세대의 첫 집 임을 상기하며 힘겹게 작업해 주는 저들이 그저 고맙다. 아이들이 오기 전에 깨끗함을 선사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돈과 맞바꿔야 한다. 허나,
커다란 고목나무가 가로로 쓰러져있는 모습은 죽은 나무의 검게 타들어가고 찢겨진 나뭇결이 안쓰럽지만 한편으론 무서운 마음에 행여 검은 그림자의 액운이 우리 집에 미칠까 염려스러워 기어이 그 긴 나무를 토막 쳐 놓고 숲 속 더 안으로 밀어 넣으려 해도 너무 무거워 인간의 힘으로 어쩌지 못해 토막 낸 그 모습 그대로 토막 낸 생선처럼 누워있는데 그래도 기다랗게 누운 모습보다는 토막 낸 모습이 액운의 느낌에서는 안심이 되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점점 나무의 무덤이 되어가는 숲 속의 죽은 모습이 시럽도록 스산한데 토막 친 토막나무는 동글동글 그 속살이 보이는데도 통통 튀는 살아있는 맛이 나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이미지의 희비다. 사람의 모습이라면 어떨까?
아마 나무나 인간이나 똑같지 싶은 게 지금도 미이라의 모습으로 몇천 년이 흐른 뒤에도 지금 막 죽은 사람처럼 숨죽여 눈만 뻥하니 떠있고 온몸이 붕대로 칭칭 동여메여 누워있는 모습이 얼마나 기이한가? 천주교나 미국의 기독교에서의 장례 문화에서도 관 안에 죽은 자의 얼굴을 볼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이 난 솔직히 무섭고 싫다. 왜 죽은 자의 모습을 우리가 그들의 허락 없이 봐야 하는가? 내가 만약 죽은 자라면 유쾌한 일은 아닐듯하다. 아 이참에 유언에 덧붙일 말을 추가해야겠다. 나 죽은 후의 얼굴을 공개하지 말 것! 또 엉뚱한 방향이다. 내 눈앞에 없었으면 좋았을 나무가 토막 쳐 누워있으니...
집의 소유는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이고 아이들의 자존감이다
아무튼 첫 집에서의 낙엽과의 사투로 시작된 집 밖의 비용은 한낱 쓸데없는 돈으로 여겨지는 건 처음이나 지금이나 매 한 가지지만 그 대함의 태도는 분명 달라져 있다. 일 년을 통틀어 집 밖의 관리로 드는 비용을 한 달로 환산해 계산해보면 대략 $600인데 이 비용으로 인한 우리 집의 값어치를 따져보면 매년 일정하게 유지하는 동네 커뮤니티의 동참에 상승되는 집값의 가치는 미비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퍼센트이고 더 중요한 건 내 가족의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고 더불어 우리 아이들의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기도 하다. 피부색이 달라 확연히 다른 유색인종으로서 그들 속의 리그에 동참하고 함께 뛸 수 있는 준비된 자들로 이방인이 아닌 한국인의 자랑스러운 자손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다.
집 하나를 소유한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자존심에 자존감까지를 내세우냐 하겠지만 나 같은 이민 1세대의 바람은 별개 아니다. 황무지 같은 이곳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근간이 집에서부터라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선 앞으로도 이런 쓸데(?) 없는 비용을 지급해야만 하겠지만 어쩌랴 우리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은퇴를 해도 이 집에서 살았으면 하고 우리가 능력이 안되면 자기들이 유지하도록 열심히 돈을 번다니 믿어보는 수밖에... 동그랗게 토막 쳐 누워있는 저 나무의 맨 꼭대기는 그 끝을 동경만 하고 가보지 못한 다람쥐의 세상이 되었다. 물론 우리 아들도 손으로 만져보지 못했던 나무의 끝을 밟아보는 저 세상의 끝이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