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그 양상이 심각해지는 사회현상인데 문제는 이 문제를 어떻게, 누가, 슬기롭게 대처하느냐가 관건이다. 어릴 적에 집단에서 소외되었던 아픈 기억으로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큰 지장이 초래되어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는, 어찌 보면 어릴 적의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하고 상처만을 안고 병든 어른이 되어 시들다 지쳐 말라버린 그 가족에게는 끝내지 못한 숙제를 남기고 가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을 우리는 가깝게 혹은 멀리 지켜만 봐야 하는 경험들이 많다.
이름으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았다며 울며 학교에서 돌아온 적이 있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영어 이름을 쓰지 않아 한국 이름 그대로 쓰고 불리다 보니 아이의 이름이 그때 한참 일본 애니메이션 '00거북이'의 '00'라고 친구들이 놀렸나 보다. 그리 크게 생각지 않고 있다가 학교 면담시간에 그 이야기를 선생님께 슬쩍 꺼내니 선생님이 크게 놀라며 이건 엄연히 Bully(불리..한국으로 왕따)라며 그렇게 말한 아이들의 이름을 알려주면 개인적으로 엄벌하겠다며 단호히 말했다. 난 딸에게 물어보겠다 하고 일단은 집으로 왔다.
아이에게 그 일에 대해서 친구가 꼭 처벌하기를 원하냐고 물어보니 그렇게까지는 원치 않는다는 말에 간단한 문자로 아이가 처벌을 원치 않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 앞에서 우리 아이의 이름을 다시 한번 정확히 말을 하고 절대 친구의 이름을 바꿔서 말하지 말고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라 말하고 이름으로 인해서 친구가 상처를 받으면 안 된다며 몇 번이고 말했다고 했다. 선생님의 빠르고 정확한 대처로 우리 아이는 더 이상 이름으로 상처 받는 일이 없었다.
학교에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카운슬러라고 밝힌 선생님이 오늘 학교에서 우리 아들이 어떤 아이에게 한 행동에 관한 이야기를 주욱 이어나갔다. 요점은 점심을 먹은 후 다 같이 놀이터에서 모여 노는 20분 정도의 시간에 3명이 모여 한 명의 친구를 Bully(불리)했다는 내용이었다. 3명 중의 한 명이 내 아들이었고 다른 친구 한 명에게 3명이 욕을 하며 왕따를 시켰다는 다소 충격적인 말이었다.
내 아들이기에 엄마인 내가 제일 잘 안다고 자부하던 때라 내가 혹시 말을 못 알아들었나 재차 물었고 교장에게 모두 불려가 서로 사과를 하고 사과를 받았다는 말이었고 아직 어리니까 왕따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시키는 걸로 일단락 짓는다고 했다. 더 이상 크게 번지는 일이 없이 학교에서의 상황은 끝났지만 일은 아들이 집에 오고 시작되었다.
아들에게 일어난 상황을 들어보니 일단 자기도 자기변명을 한참 늘어놓아야 됨은 알겠지만, 먼저 그 아이가 친구들에게 욕을 했다 하고 그 친구는 이상하게 미국 아이가 아닌 동양 아이에게만 연필로 머리를 때린다는 것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당했다고 실토를 하니 대략 난감한 상황이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3명 중의 한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인도 엄마였는데 이건 인종차별적인 행동이라 분개하며 다 같이 교장한테 가서 이야기하고 잘못을 따지자며... 결국은 그 엄마가 우리의 동의를 얻어 이메일을 교장한테 보내고 교장이 사건의 내용을 다시 파악해서 서로의 잘못을 가르고 상황 종료되었다.
누가 보면 아주 사소한 일로 비칠지 모르나 이런 일이 비밀리에 진행되었거나 처음에 일어난 일을 대수롭지않게 넘겼다면 연필로 타인종의 머리를 계속해서 때린 그 아이는 그런 행동이 크게 잘못됨을 모른 채 더욱 큰 사건으로 번질 수 있었고, 그런 일로 피해를 본 아이들의 부모가 강하게 대처하지 않았다면 우리 아이들은 미국의 정서에 피해의식을 가지고 평생 상처 받은 비둘기처럼 웅크리고 이 사회를 살아갈 수도 있는 문제였다.
비만아동축에 들어가는 조금 튼실한 남자아이였다. 친구들에 비해 몸집이 크다는 이유로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심하게 당했고 급기야 형부는 학교에 여러 번 처벌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경찰을 대동하고 학교에 들어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학교에서 아이를 보호해 주지 않으니 부모가 직접 보호해야겠다는 취지였지만 아이들이 미성년자이므로 처벌을 받지 않았고 결과적으로는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 부모로서의 소임은 다했을지 모르나 아이가 생활해야 하는 친구와의 소통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오히려 과잉보호라는 굴레를 안은채 전보다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결국 언니네 부부는 외동아들을 캐나다로 유학을 보내고 한국에서의 게임이 끝났다. 캐나다에서는 조카의 몸집이 다른 아이와 비슷했기에 왕따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생활해야 하는 기숙사에서의 외로움을 극복해야 하는 또 다른 문제에 부딪혔다. 먼 훗날 물어본 조카의 대답은 '그래도 한국에서의 왕따보다는 캐나다에서의 외로움이 나았어요. 천천히였지만 친구들이 생겼거든요...' 다행한 일이다.
그때는 왕따라는 개념 자체가 없어서 당한다 해도 소리 내지 못했고 행하는 아이도 크게 잘못된 행동임을 인지하지 못한 채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조금씩 상처 받고 상처 주는 사회였고 사회적인 이슈로 가는 통로도 없었거니와 살아가기 바쁜 우리네 부모에게 그저 공부할 수 있는 학교에 감사하기만 할 때였으니 말하면 무얼 할까?
그래도 기억나는 일은 그때도 성소수자는 분명 있었을 테니 남잔데 목소리가 여자처럼 얇고 행동도 여자다워 친구들과 동떨어진 곳에서 멀리서 지켜만 보는 아이가 있었다. 난 그 남자애가 그렇게도 불쌍해 보일 수 없어서 내가 꼭 붙어 다니며 다른 친구로부터 방어해 주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데 그 여자다운 남자아이는 지금쯤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 나이에, 그때를 상기해보니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우리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내 아이가 남에게 왕따를 당한다면 왕따를 시킨 아이를 만나서 원인을 찾고 그 원인을 대처할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 줘야 하고, 만에 하나 내 아이가 왕따를 시키는 아이라면 더욱 심각하게 그 원인을 파악하고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 엄격한 교육으로 알 때까지 차근히 인내를 가지고 가르키고 가르켜야 한다.
방관은 협조의 다른 하나이다
또한 일부러 왕따를 시키는 그런 유형의 사람도 있지만 방관자의 태도도 올바르지 않다는 사고를 지녀야 함을 그리고 용기 내어 함께하는 사회를 만들어 간다는 사회의식을 가져야 한다. 나에게 내 가족에게 생길 수도 있는 따돌림이다 생각한다면 방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방관은 협조의 다른 하나임을 알아야 한다. 올바름을 올바르다 말할 수 있고 나쁨을 나쁘다 말할 수 있는 인간다운 인간을 만드는 일이 바로 우리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이다.
핸드폰이 없었던 우리 시대에는 그나마 눈을 보며 다투기도 하고 싸웠기에 인간적이라 할 수 있었다. 심각한 건 보이지 않는 폭력이니 그 괴력이 과히 도를 넘는다고 볼 수 있다. 솔직히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무슨 말이든 못 할까? 그게 정말 무서운 일이고 한 사람을 무덤에 이르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을 수도 있는 정말로 위험한 일이다. 얼마나 많은 유명 이들이 유명을 달리했나?
왕따의 예는 차고도 넘친다. 학교 왕따가 학교폭력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직장 내에서도 왕따의 심각성으로 사회가 흔들릴 수 있다.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의지의 한국인이 이제는 아니다. 독불장군으로 키워진 요즘 세대의 직장인들은 강하지 못한 축에 속할 수밖에 없는 사회환경에서 왕따의 경험들을 이겨내는 힘이 없는 나약한 사람들이 소리도 없고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상실의 시대를 조용히 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왕따인채로 말이다.
숫자로의 조합이 훌륭한 이번해에 기념될 만한 일들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일들이 행해지고 마침표를 찍었으면 하는 해이다. 왕따가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그런 마침표를 찍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어릴 때 왕따라는 말이 아예 없었거나 집단 따돌림이라는 말이 너무도 생소했을 때처럼 딱 거기까지만의 개념으로 되돌렸으면 하는 바램이다.
현대 사회에 사는 대부분 사람은 우울증이 있다고 한다. 그 우울증을 헤집고 들어가 굳이 우울증의 원인을 파헤쳐보면 유년시절의 아픔이 용해되지 못한 채 침체되어 있다가 끝내 녹지 못하고 가라 앉혀진 작은 침전물들이 우울증으로 번져 우리의 사고를 굳게 하여 활발히 펼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 유년시절의 아픈 기억이 이처럼 평생을 좌우하는 중요한 시절임을 인식하고 더 이상 또래집단에서 소외되는 아이 없이 밝고 건강한 아이들로 키워야 하는 일이 우리 어른의 소임임을 알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