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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랜Jina Jan 31. 2020

이 시점에서, '늑장 대응한 중국'
비난받아 마땅하다

고등학교 시절 그러니까 1986년도 서울에 큰 홍수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 그 당시의 잠실 큰 사거리에 버스가 물에 반쯤 잠긴 상태에서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질주를 해서 그런대로 무사히 집에 당도한 적이 있다. 그때 당시는 몰랐지만 물이 다 빠지고 다시 버스를 타고 가는 햇볕 가득한 날, 물이 한 바가지 잠겼었던 멀리 서있는 아파트의 2-3개 층에는 물이 들어왔다 빠져나간 선명하고도 굵은 물선이, 그때의 물난리가 어디까지 였는지를 가늠해주는 아픈 선으로 분명하게 그어져 있었다.


보는 이들에겐 그저 물이 들어오고 나갔다는 한 줄이겠지만 그 안에서 고통받았던 그 집에서의 그 사람들이 보는 그 선은  아픔을 넘는 고통의 선이었으리라. 지나고 나면 한 줄, 한 장면으로 남는 스치는 흐릿한 영상이지만 그때가 만약 지금처럼 인터넷이 발달된 선진국이었다면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당할일은 아니었음을 그때 말고도 얼마나 많은 일들이 지나갔는지 말하면 무얼 할까? 우한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무서운 확산 또한 먼 미래에서 지금을 바라본다면 분명 앉아서 당해야만 했던 무지한 기억이 되리라 생각하니 지금의 사람들이 황망하게 죽어가는 사례들이 그때의 고통의 물선처럼 허무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인식의 변화가 자연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이고
일어난 사건의 대처능력과 인식의 전환이 절실


다른 관점에서 경제가 발달되고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들어선 몇 년 전 우면산의 붕괴가 있었을 때에도 내가 아닌 나의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에게도 불어닥친 홍수에 대한 공포가 반복되었을 때를 생각해보면 자연재해는 시대를 넘어 경제나 과학의 발달에도 사람들의 자연재해에 대한 인식이 고정되어 변치 않으면 아무 소용없이 자연의 힘에 무릎을 꿇어야 되는 사건들도 부지기수로 사람의 인식의 변화가 자연을 헤쳐나가는 힘이 되지 않을까? 사람대 사람의 신종 바이러스도 초기대응으로 정확한 매뉴얼대로 숨김없이 대처했다면 이러한 확산을 막을 수 있었다는 사실이 과학이 아닌 일어난 사건의 대처능력과 인식의 전환이 절실한 때라고 생각된다.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엄청난 눈으로 길거리가 새하얗게 변해버려 차들과 사람들이 움직이지 못할 때였다. 대중교통이라면 오로지 버스에만 매달려야 했을 때, 어른 아이   없이 그야말로 만원 버스를 타지 않으면 학교나 회사를   없었을 때가 있었다. 그때는 왜 그리 추웠는지 아마도 집의 난방 시설이 좋지 않으니 집안도 춥고 도저히 따스함을 충분히, 다분히 채워지지 않을 무렵이니 아무리 따뜻한 옷으로 겹겹이 무장하고 장갑이며 스카프로 동여 매었어도 한기가 으슬하니 느껴졌을 때이다. 아마도 지금의 날씨가 그전보다 따뜻해질리는 없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으슬하니 더욱 살벌히 추위를 느끼는 건 유독 나뿐만이 아니리라 생각된다.


층층이 동여매고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멀리서 아슬아슬 눈에 미끄러질 듯 다가오는 버스를 보게 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버스를 향해 달려간다. 가장 먼저 버스 문에 도달해야 그나마 먼저 들어갈 수 있는데 난 왜 항상 운이 없는지 내가 달려가는 그 몇 발작을 버스는 그냥 지나쳐 서든지 아니면 몇 발작 먼저 서서 문이 열리니 힘센 아저씨나 덩치 큰 오빠들에 밀려 맨 뒤꽁무니에 차장 언니의 억센 손으로 엉덩이며 등짝이 밀려 대롱대롱 매달려가야 했다. 그나마 그렇게라도 매달려가면 정시간에 학교에 도착하지만 매달리기도 전에 문이 닫혀버리면 그다음 버스를 타야 하는 기가 막힌 추운 기다림은 그저 힘없는 나의 몫이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그때는 어리기도 했지만 안전에 대한 무지로 버스가 눈에 미끄러져 사람을 친다거나 다른 차와 부딪칠 거라는 건 상상도 해보지 못했고 그저 내가 제일 먼저 올라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으니 그때의 버스 운전기사분은 얼마난 무서웠을 일인가? 자칫하면 대형사고로 이어질 아찔한 일에 어찌 그리 태연하게 그저 타고 밀고 매달리는 일들을 아무런 대책 없이 행해졌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어깨가 오싹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버스 정류장은 그야말로 천국 수준이다. 언제 버스가 오는지가 핸드폰에서 미리 알려주어 그 시간에 맞추어 느긋하게 나가면 되고 버스를 기다리는 벤치에 열선이 깔려있어 추운 엉덩이를 데울 수 있고 어떤 정류장은 겨울에만 설치되는 간이 유리벽이 세워져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천정에서 히터가 나와 깜짝 놀란적도 있다. 버스를 이용하는 대중에게 이 정도의 서비스를 감행한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국도 이렇지만 선진국으로 갈수록 더욱 발달되는 시민들에 대한 처우는 미국에 사는 나에게 피부로 와 닿는 부분이 크게 있다.


일단 눈이 온다는 싸인이 뜨면 소금창고에 문이 활짝 열려 소금 그득함이 보이고 연이어 줄을 대고 쌍라이트를 켜고 밤새 염화칼슘을 뿌려대는 눈 차들의 행렬로 장관을 이룬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큰길에는 언제 눈이 왔나 싶게 말짱히 치워진 날들도 있어 깜짝 놀라곤 한다. 더구나 모든 아이들의 스쿨버스의 의무화로 스쿨버스가 다닐 수 있는 날씨 라야 학교를 오픈하는데 한 곳이라도 스쿨버스 운행이 안 되는 곳이 있으면 학교를 클로즈해야 한다. 모두 안전에 대한 대처가 철저하다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례이다.



한 번은 태풍이 온다 해서 학교를 닫는다고 미리 알려주어


언제 오려나 했는데 해가 하도 쨍쨍하여 설마 하는데도 창문을 나무로 덧대는 집이 있는가 하면 마트에 물이며 우유가 동나는 수준이라 놀랐지만 결국엔 3일 후에나 태풍이 살짝 왔다 지나가는 경험이 있다. 4일간의 장기간 휴교령이어서 지금에 와 생각해보면 과잉대응이 준 피해일 수도 있지만 안전에 대해 소홀히 하다 인명피해로 이어지는 것보다는 백배 천배 나은 결정이라 생각된다.


한국에는 인구가 적기 때문에 더욱더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몇 해 전에 메르스라는 바이러스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아 간 적이 있다. 미국에 살다 보니 인간 존중에 대한 안전대책이 철저할수록 나라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국가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감을 느끼며 살고 있다. 그래서 나라의 부강이 한 개인의 자부심과도 연결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차에 그때의 안전에 대한 늑장대응은 미국의 대처에 비해 너무도 차이가 나 불쾌감마저 든 조치였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미국 사람은 세계 어디에 있든 자국민 우선으로 구한다고...



그때랑 너무도 비슷한 일이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호흡기를 통해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인데 이번에도 사스 때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은폐와 늑장대처로 확진환자가 오늘 현재 만명에 육박했고 사망자수가 현재 이백명을 넘어선 상황에서 온세계가 떨고 있다. 우한시로 미국의 전세기를 띄워 자국민을 실어 나른다는 뉴스를 접했고 뒤이어 한국도 한국인을 데려오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선진국의 자국민을 살리려는 사투를 벌이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인은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라가 되어가고 있는 요즘 단  명의 생명이라도 살리기 위한 노력을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이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는 그 시작점이 수산시장이라는 추측이 난무한 가운데 중국사람들의 날아다니는 건 비행기를 빼고 다 먹고 굴러다니는 건 타이어를 빼고 다 먹는다는 우스꽝스러운 말들이 있듯이 아직도 신선한 동물의 피가 건강에 좋다는 인식에 살아있는 모든 걸 상거래하는 시장에서 이러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나왔다는 거에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물론 문화는 중요한 한 나라의 산물이고 그러한 맥락은 이어감이 마땅하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고 경제가 발달되어 선진국의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시점이라면 세계의  흐름에 어느 정도 발맞추어 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언제까지 공공장소에서 침을 뱉어 눈을 찌푸리게 할 것이며 언제까지 유목민을 대처하는 농경사회의 화장실 문화로 문을 못달게 하는 전통을 따를 것인가?  


살아있는 생명체를 대하는 전통에도 문제가 있었지만 한국이나 중국 아시아의 빨리빨리 문화가 가져다준 장단점이 이러한 바이러스에 대처하는 시각에서도 생각해 볼 일이다. 천천히 그리고 정확히 하려는 것보다는  지금까지 그렇게 해오던 습관으로 대충이라도 누가 더 빨리 먼저 하느냐가 관건인 사회에서 과잉으로 무언가를 미리 대처하기엔 빨리 다른 일들을 해결해야만 하고 일단 일이 터지면 조금 숨겼다가 일이 더 커지면 해결하면 되고 확대가 안되면 좋은 일이지 싶었을게다.


그러다 바이러스라는 무서운 호흡기 전염 확산이 전 세계로 흩어지고 있다.


한 발 차이가 산을 넘고, 강을 넘어, 하늘을 날아가고 있으니 이 사태를 넘기기에는 수많은 생명의 희생이 너무도 황망하고 중국 당국의 늑장대처에 화가 난다.  오히려 미국이나 유럽의 느린 행동이 늑장대응을 할거 같지만 느리지만 일에 있어서는 매뉴얼데로 따라야 하는 정확한 습성으로 일이 터진 후보다는 미리 앞서서 천천히 다져놓는 모습으로 보이기에 오히려 늑장이 아닌 과잉대응으로 비춰지지 않나 생각된다.


속마음은 모르겠지만 눈앞에 보이는 모습에서의 이들은 남녀노소, 상하 직급을 떠난 인류애가 동등하다는 입장에서의 인간에 대한 예우가 똑같다는 심지어 동물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귀한 생명의식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선진국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 평소에 매뉴얼만을 강조해 느려 터진 행정처리며 공공장소에서 조차도 느리게 행동하는 이들을 답답해했었음을 인정하지만 이럴 때, 이런 상황에서의 대처는 역시 기본에 충실한 것들을 잠시 반짝하는 행동으로 따라갈 수 없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에 대한 불감증이 만연


중국의 늑장대응이 가져온 파장이 전 세계로 퍼지고 있는 마당에 이제 와서 잘잘못을 따지기엔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버렸다. 인간존중 나아가 모든 살아있는 생명에 대한 불감증이 만연되어 있었지 않았나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자신의 허점을 드러내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드러내지 않았을 때 그것이 생명과 연관된 것이라면 생명을 유린한 것으로 간주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은폐되거나 늑장을 부려서는 결코 안될 일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상해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오늘 들은 소식인데 우한에서 한 달 전에 온 사람들도 모두 불려 가 14일간 지켜보고 음성으로 나온 사람들만 집으로 돌려보내고 각 학교에도 2주간 휴교령이 내려 마트나 길에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초극단 대책으로 대응을 하고 있으니 가닥이 잡힐 거라는 희망 메시지를 받았다. 이번 기회를 발판으로 더 이상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게 중국 당국이 먼저 머리 숙여 국민들에게 사죄해야 하고 아니 전 세계인에게 반성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에이즈 치료제가 되었든 탈모제가 되었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의 치료제가 나와 더 이상 사상자가 없기를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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