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콘체르탄테
지휘 프란체스코 란찌롯따Musikalische Leitung Francesco Lanzillotta
합창지휘 틸만 미하엘 Chor Tilman Michael
비올렛타 브렌다 래 Violetta Valéry Brenda Rae
알프레도 마리오 창 Alfredo Germont Mario Chang
제르몽 체리코 루칙 Giorgio Germont, sein Vater Željko Lučić
베스트셀러는 이유가 있다. 찾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퀄리티가 꼭 비례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중성을 획득했다는 것이다. 대중의 마음을 훔쳤다는 것, 대중으로 하여금 지갑을 열게 만들었다는 것.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페라의 베스트셀러는 무엇일까? 일단 한국 오페라계에서는 <카르멘>이라고 한다. 이는 웬만한 한국의 오페라 무대는 다 섭렵하신 어느 테너 선생님의 전언이다. 먼저 음악이 지루할 틈을 안 준다. 하바네라나 투우사의 노래 같은 유명한 아리아도 간간히 나오니 청중은 신이 난다. 집시가 소재이니만큼, 이국적인 볼거리도 풍부하다. 사랑과 유혹, 치정과 살인으로 이어지는 스토리는 또 얼마나 자극적인가.
여기 독일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모차르트다. 독일의 2018/19 시즌 중 모든 베르디 오페라를 다 합쳐도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이번 시즌만 해도 마술피리가 올라가는 극장은 베를린, 뮌헨, 드레스덴을 비롯하여 대략 30여 곳에 이른다. 반면, 우리가 잘 아는 <나비부인>, <리골렛토>, <카르멘> 등은 대략 10~15개 극장에서 상연되고 있다. 만약 모차르트 오페라 작품 전체, 가령 <피가로의 결혼>, <돈 죠반니>나 <코지 판 투테>까지 합치면, 그 수는 어쩌면 이태리 오페라 작곡가들 작품수의 합보다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독일은 모차르트를 사랑한다.
하지만 전 세계 오페라 극장을 놓고 이야기한다면, <라 트라비아타>가 단연 1위일 것이다.(자료를 찾아보다가 너무 많은 곳에서 공연이 올라가길래 조사를 포기했다.) 일단 음악도 스토리도 유명하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 주인공인 비올렛타 역은 소프라노라면 한 번쯤은 꿈꾸는 그런 역이다. 얼마나 많은 소프라노들이 그 역을 하고자 노력하고 준비했을까. 비올렛타는 어려운 역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소프라노들의 경력에 한 줄을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이 말인즉슨, 주역가수가 불상사가 생겨서 무대에 오르지 못하는 비상사태가 생겨도 어떻게든 누군가 데려와서 사태를 수습하기가 용이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렇게 오페라 업계 종사자부터 대중에 이르기까지 친숙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지난 주말,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콘체르탄테 버전으로 보고 왔다. 콘체르탄테란, 오페라를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하는 것이다. 무대 장치나 의상, 혹은 분장 없이 콘서트 형식으로 진행되기에 그 음악을 깊이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프랑크푸르크 극장은 꽤나 괜찮은 극장이다. 도시의 경제력이 그 도시의 문화의 수준을 좌지우지하듯이 프랑크푸르트라는 경제적으로 탄탄한 도시의 대표적인 극장으로서 독일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퀄리티를 자랑한다. <올해의 오페라 극장>으로 선정되기도 한 것만도 4번에 이른다. 내가 프랑크푸르트 극장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레퍼토리의 분배에 있어서 리딩 극장으로서 책임감이 보이기 때문이다. 바로크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적으로 고루 분포되는 것은 물론, 매 시즌 콘체르탄테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지만 오페라사적으로 기념비적인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다.
지난 2월에는 도니젯티의 <로베르토 데브뢰>를 콘체르탄테로 공연했는데, 이 작품은 매우 어렵기 때문에 그간 소프라노 마리엘라 데비아나 에디타 그루베로바 같이 벨칸토 마에스트라가 없이는 잘 공연되지 않는다. 벨칸토 창법의 정수이기 때문에, 그 테크닉이 부재할 경우 세상 지루하고 괴로운 오페라가 돼버리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흔하게 상연되는 작품이 아니어서 부를 수 있는 가수 찾는 것 부터가 난관의 시작이다. 그래서 이런 오페라를 집 근처에서 경험할 수 있다는 건 귀한 일이기에 일치감치 예매하고 영접할 준비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시즌에는 프랑크푸르트가 베르디의 오페라 <해적>을 콘체르탄테로 준비했다. 이 역시 용감한 소프라노들이 콩쿠르나 연주 때 들고 나오는 아주 어려운(그렇지만 매우 아름다운) 아리아만 알려져 있을 뿐, 공연으로 올려지는 경우는 몹시 드물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해적>이 <라 트라비아타>로 변경되었다. 이런 일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이유인즉슨 주역 가수 두 명이 건강상의 이유로 하차한 것이다.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그것도 치료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단다. 이런 경우 대타를 구해야 하는데, 앞서 언급했듯이, 이렇게 자주 상연되지 않는 작품은 대타 구하기가 너무나 곤란하다.
그래서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로 급변경됐다고 한다. 이제까지 숱하게 봤던 <라 트라비아타>를 콘체르탄테로?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아 망설였다. 그러다가 관람을 결심한 이유는 제르몽 역으로 나오는 바리톤 체리코 루칙(이 세르비아 가수의 이름은 도대체 어떻게 읽는 것인가!) 때문이다. 어느 지인이 말하길, 그 바리톤이 자기 친구인데, 지금 세계에게 돈 가장 많이 받는 바리톤 3위 안에 든다고, 이번에 프랑크푸르트에 와서 공연하니 꼭 보라며 강력추천을 한 덕분이다. 검색해보니, 메트로폴리탄, 코벤트가든을 누비며 노래하는 가수다. 프랑크푸르트에 가족이 살지만 본인은 늘 연주 때문에 전 세계를 누빈다고. 프로필을 읽어보니 프랑크푸르트에서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솔리스트로 일했고, 그 이후 세계 정상급 바리톤이 돼서 이번에 마치 친정집 들리듯이 프랑크푸르트로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러고 보면 프랑크푸르트 출신으로 세계적인 성악가로 발돋움한 경우가 많다. 소프라노 디아나 담라우도 여기 출신이었고, 오늘 비올렛타를 노래한 브랜다 래도 프랑크푸르트 출신으로 현재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계 정상급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난번 <로베르토 데브뢰>에서 사라 역을 노래한 메조소프라노 앨리스 쿠트도 프랑크푸르트에서 경력을 쌓은 후 세계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경우다. 우리나라에는 테너 김재형이 프랑크푸르트 출신으로 현재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지금은 베이스 심기환이 솔리스트로 있으면서 메트 무대까지 밟은 것으로 알고 있다.
잘 키워서 더 넓은 바다로 보낸 뒤 회귀하는 연어를 보는 느낌이랄까. 이들 가수와 관객들이 느끼는 연대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오페라 콘체르탄테 무대의 의미는 비단 잘 상연되지 않는 귀한 작품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금은 오페라 슈퍼스타가 된 출신 가수들을 데려와, 친정집에서 맘껏 뛰어놀게 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비올렛타 역을 노래한 브랜다 래는 이 날의 주인공으로서 관객을 매혹시켰다. 기량이 출중한 나머지 어떻게 저렇게 부르지??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게 만들었고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감동을 받을 겨를이 없을 정도였다. 알프레도 역의 마리오 장의 노래는 지난번 <로베르토 데브뢰> 콘체르탄테에 이어서 두 번째로 들어보게 되었는데, 그때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여유로운 가창을 들려줬다.(로베르토 데브뢰 역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실감을 했다.) 알프레도 역은 아주 많이 불러본 듯 노련하였다. 다른 베르디 오페라에서도 그렇듯이 <라 트라비아타>에서도 바리톤의 비중은 꽤나 묵직하다. 백전노장 체리코 루칙은 이런 제르몽 역을 맡아 중심을 잡으며 완급을 유연하게 조절하는 대가의 풍모를 보였다. 보여주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그 존재감이 이미 무대 위를 압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날 가수들과 긴밀한 호흡으로 최상의 음악을 선사한 지휘자 프란체스코 란찌롯따와 오케스트라에도 큰 박수 보내고 싶다. 콘체르탄테가 아니었으면, 비올렛타의 아리아에서 클라리넷 주자가 얼마나 혼신을 다해 비올렛타와 교감하며 연주하는지 평생 몰랐을 것이다. 오롯이 음악에만 집중하며 오케스트라와 가수가 만들어내는 화음을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다는 건 새로운 희열이었다.
관객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로 그들의 노고에 답했다. 소확행이 별건가. 17유로(약 2만 원)로 이렇게 좋은 시간을 가졌다니... 유독 잘 풀리지 않았던 그 날의 고단함도 보상받은 것 같았다. 다만 이번에 잘 알려지지 않은 <해적>을 취소하고 이렇게 대중적인 작품으로 대성공을 거둔 것이 한편 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프랑크푸르트 극장이 그동안 가고자 했던 새로운 레퍼토리의 발굴이라는 목표는 아무나 할 수도 없고, 쉬운 길도 아니다. 다음 콘체르탄테는 어떤 작품을 선보일지 기대가 된다, 이왕이면 그 작품이 나를 비롯한 오페라 팬들의 관람 욕구를 마구마구 불 지피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프랑크푸르트여...제발 그 어려운 길로 계속 가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