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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Dec 16. 2018

열등감, 질투 그리고 파멸... 오텔로!

Deutsche Oper am Rhein,  베르디의 <오텔로> 

지휘: 안토니노 폴랴니

연출: 미하엘 탈하이머

무대: 헨릭 아르

의상: 미하엘라 바르트

조명: 슈테판 볼리거 


오텔로 :구스타보 포르타

이아고: 시몬 닐

데스데모나 브리기타 켈레


도이체오퍼 암 라인, 뒤이스부륵 프로덕션


오텔로는 무어인, 즉 흑인이다. 그는 노예였으나, 전장에서 승리를 거듭한 결과 장군의 지위까지 올라왔다. 베네치아 귀족의 딸이자 아름다운 데스데모나가 그의 아내이다. 당시 사람들의 눈에는 맨 주먹으로 모든 것을 이룬 사나이,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사나이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런 그는 내면에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약점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목 졸라 죽이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만들고, 결국 자신의 목숨도 스스로 끓는 비극의 원인이 된다. 그 약점은 바로 자신이 흑인이라는 열등감이었다.

데스데모나: 브리기타 켈레, 오텔로: 구스타보 포르타, 사진출처-operamrhein.de

우리 모두 열등감이 있다. 열등감은 우리를 발전시키기도, 망가뜨리기도 한다.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열등감을 공개하자면, 유럽 오페라계에서 내가 동양인이라는 것이다. 독일에 온 지 어느새 11년.  “나는 동양인이니까 유럽 애들보다 몇 배 더 노력해야 돼.” 이런 마음으로 노력해서 지금 어느 정도 위치까지 왔으니, 그것은 열등감의 긍정적인 작용일 것이다. 한편 열등감은 패배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쓰이기도 한다. “내가 동양인이어서 날 안 뽑은 거야.” 얼마나 간편한 명제인가. 나의 실패는 내가 도저히 바꿀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 때문이고, 이 문장은 내가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는 가장 설득력 있는 핑계가 된다.  달리 이야기하면 이 명제가 나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을 고백한다.


프로이트, 융과 동시대 활동했던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간의 이런 ‘열등감’에 주목하여 연구하고 또 책을 썼다. 그래서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제시했는데, 우선 우월감과 열등감은 빛과 그림자 같아서 결국 하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다. 우월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열등감도 없다는 것이다. 


또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하되, 자신이 능력으로 바꿀 수 없는 것, 예를 들면 내가 동양인이라는 것, 이런 것은 인정해야만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열등감을 갖게 하는 자신의 어느 한 부분을 가지고 나라는 사람 전체를 부정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마지막 사항이 어쩌면 나에게 답이 될 수 있으리라.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지만, 이 점으로 인해 내가 열등하게 되도록 방치하지 말고, 그 외에 내가 성악가로서 가진 다른 장점을 사랑하고 발전시켜 나가면 나는 나만의 길을 갈 수 있으리라. 


오페라 리뷰를 쓰는 블로그에 웬 심리학, 혹은 자기 개발서 같은 얘기만 잔뜩 쓰고 있는가 하면,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를 보면서, 계속 ‘오텔로는 왜 파멸하는가’, ‘오텔로의 열등감의 근원은 어디인가’, ‘도대체 이아고는 왜 저렇게 악인인가’…. 이런 점들을 줄곧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텔로와 데스데모나가 1막에서 부르는 사랑의 듀엣에서 오텔로 심리의 힌트가 있다. 

“Ed io m’amavi per le mie sventure ed io t’amavo per la tua pietà. 

당신은 내가 겪은 위험들을 사랑했고, 그것들을 불쌍히 여겨주는 당신을 나는 사랑했소” 

오페라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셰익스피어 원작의 “오셀로(영어 발음으로는 오셀로 Othello지만 이태리어로는 오텔로라고 읽는다)”에는 둘이 어떻게 어떻게 사랑에 빠졌고, 귀족인 데스데모나가 흑인 노예 출신인 오텔로와 결혼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난이 있었는지 상세히 묘사된다. 오텔로는 자신의 고생담과 무용담을 진심으로 들어주는 데스데모나에게 사랑을 느꼈다. 하지만 데스데모나 집안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고, 결국 이를 극복하고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오텔로가 느꼈을 모욕감과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터. 

데스데모나: 브리기타 켈레, 오텔로: 구스타보 포르타, 사진출처 - operamrhein.de

데스데모나가 오텔로에게 느꼈던 사랑은 진정 연민으로만 시작된 것이었을까? 데스데모나는 오텔로의 강직한 성품, 전사의 기백 등 지금의 오텔로를 만든 수많은 장점 때문에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주기 때문에 데스데모나를 사랑하게 된 오텔로의 내면이다. 여기서 열등감의 우월감화의 징조가 보인다.

열등감은 여러 모습으로 발현되는데, 그중 가장 최악의 상황은 (내가 생각하기에) 바로 열등감이 우월감을 만들어내는 상황이다. 자신을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어 그것으로 우월감을 느끼는 상황인데, 불행 배틀에서 자기가 최고가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과 대화하게 되면, 상대방이 아무리 공감을 해주고, 위로를 해줘도 스스로 불행의 수렁에 점점 깊이 빠지기 때문에 도저히 당해낼 재간이 없다.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오텔로는 이제 자신이 믿고 싶은데로 믿는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도록, 옆에서 이아고는 치밀하게 다리를 놓아줄 뿐이다. 데스데모나가 부정하다고 이아고가 증거라고 내놓은 손수건은 너무나 빈약한 증거임에도, 모든 사람 앞에서 그녀를 창녀라고 모욕하고 거칠게 대한다. 마치 그가 데스데모나와 결혼하기 위해 겪었을 모욕을 되갚기라도 하듯이. 그 이후는 모두가 알다시피 파멸로 끝이 난다.


자, 그렇다면 도대체 이아고는 왜!! 이렇게 못 되 처먹은 건가. 자신을 승진에서 누락시킨 오텔로가 싫은 건 그렇다 쳐도 죄 없는 데스데모나까지는 왜? 오텔로가 데스데모나를 독약으로 죽이겠다고 하니까, 사악한 이아고는 데스데모나를 불륜을 범한 그 침대에서 목 졸라 죽이라고 친절하게도 가이드한다. 베르디 오페라에서는 자세히 서술되지 않았지만, 셰익스피어 원작에서는 이아고 대사를 통해 오텔로를 증오하게 된 이유를 밝힌다.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아내 아멜리아와 오텔로가 불륜이라고 수군거린다는 것이다. 자신도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런 걸로 입에 오르내리는 것 자체가 이아고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치인 것이다. 거기에 흑인인 오텔로에 대한 경멸, 자신보다 먼저 승진한 카시오에 대한 질투가 어우러져서 이 비극을 꾀하게 된다. 

이아고: 시몬 닐, 도이체오퍼 암 라인 오페라 합창단, 사진출처 - operamrhein.de

앞서 적었듯이, 우월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열등감도 생기지 않는다. 자신이 오텔로보다 카시오보다 우월하려고 했던 이아고는 대신 열등감을 가지게 되었고, 그 열등감을 개선하려는 그의 선택은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열등감으로 생긴 구덩이에 오텔로의 열등감을 미끼로 꼬셔, 데스데모나까지 빠지게 만든다. 


문제는 베르디의 못 말리는 바리톤 사랑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베르디 오페라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은, 테너는 민폐 캐릭터로 만들고 (알프레도, 돈 카를로, 만토바 공작 등) 소프라노는 그런 테너를 위해 죽는 성녀로 만든다.(비올렛타, 질다, 레오노라 등등) 반면 바리톤은 극을 이끌어 가는 사이다 역할하며 온갖 멋있는 아리아는 다 선사했다. (리골렛토, 포자, 제르몽, 레나토…등등) 여기 오페라 <오텔로>에서도 이아고가 극적으로도, 음악적으로는 훨씬 인상적이다. 이아고의 아리아 Credo에서 느껴지는 음악적인 힘을 보라. 이번에 봤던 뒤이스부륵 프로덕션에서도 대부분의 막의 엔딩을 오텔로가 아닌 이아고가 주목을 받는 연출이었다. (TV 드라마에서도 클로징 장면에 누가 나오느냐로 진정한 주인공이 가려지지 않는가.)


초반에 합창과 오케스트라의 대단한 에너지에 뒤이어 이아고 역의 영국 바리톤 시몬 닐이 노래를 시작하자, 곧 얼마 안돼서, 250km를 운전해서 뒤이스부륵까지 간 나의 선택이 옳았구나! 싶었다. 극을 이끌어가는 이 어려운 역을 탁월하게 해낸 시몬 닐의 바통을 이어받아, 루마니아 소프라노 브리기타 켈레도 난도 높은 데스데모나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가냘픈 몸매에 극장 전체를 울리는 볼륨을 가진 그녀의 아리아까지 듣고는 세상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참 많구나..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 다음에 이 두 사람이 나오는 공연이라면 믿고 봐도 되겠다 싶었다. 미하엘 탈하이머의 연출은 무던했다. 무대도, 의상도 온통 검은색이고, 동선도 단조로울 수 있다 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음악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들었다. 지휘자 안토니노 폴랴니도 오케스트라를 잘 이끌어서 풍부한 베르디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음악적으로도 베르디를 듣고 있다는 충족감이 가득 채워진 공연이었다. 


다시 한번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또 배우면서 독일에 사는 이방인, 오페라를 사랑하는 어느 동양인의 하루하루는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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