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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Jan 09. 2021

비극에 대한 무한한 사랑

오페라 작곡가 니콜로 욤멜리

18세기 나폴리는 런던, 파리에 이어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특히 나폴리의 음악적인 힘은 전 유럽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래서 '음악의 수도'라도 불리기도 했다. 그중 나폴리 오페라는 특히 유명했고, 나폴리 출신 오페라 작곡가의 작품은 유럽 각지의 극장에서 사랑받았다. 이들을 두고 사람들은 '나폴리 악파'라고 칭한다. 오늘은 나폴리 악파 중 니콜로 욤멜리(Niccolò Jommelli 1714-1774)에 대해 살펴보자.


파리 가르니에 오페라 외벽에 새겨진 욤멜리의 흉상


1725년 (11세), 본격적인 음악 수업을 받다.

나폴리 근교 아베르자에서 부유한 상인이었던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욤멜리는 어릴 적부터 음악에 재능을 보였고, 나폴리에서 본격적인 음악교육을 받을 것을 권유받았다. 1725년 나폴리 음악원 중 하나인 산토 오노프리오 음악원에 입학하고, 3년 뒤에는 피에타 데이 투르끼니 음악원으로 옮긴다.


1737년 (23세), 성공을 안겨준 첫 오페라

나폴리의 테아트로 누오보에서 초연된 희극 오페라 '사랑의 실수 L'errore amoroso’는 23세의 젊은 작곡가에게 큰 성공을 안겨준다. 이 성공은 이듬해 나폴리의 테아트로 데이 피오렌티니에서 오페라 '오도아르도 Odoardo'로 이어진다.


1740년 (26세), 운명적인 오페라 세리아

욤멜리의 세 번째 오페라이자 첫 번째 오페라 세리아(비극오페라)는 '고트 족의 왕 리치메로Ricimero re di Gori'가 로마 테아트로 아르젠티나에서 성공적으로 초연된다. 이 작품을 계기로 욤멜리는 인생의 귀인이었던 요크 공작, 헨리 베네딕트의 눈에 띄게 되고, 이 만남은 훗날 욤멜리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주게 된다.


1741년 (27세), 끊임없이 정진하는 젊은 대가

이미 욤멜리는 젊은 대가로 인정받고 있었고 다양한 이태리의 도시에서 그의 오페라가 올려졌지만, 본인은 연구를 거듭하고, 여전히 수업을 받으러 다녔다. 볼로냐의 유명한 음악가 협회인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가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이자, 이후로는 자신의 재능에 확신을 가지게 된다. 참고로 1666년에 창립된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는 유럽 최고의 음악가들의 연합을 모토로 결성된 단체인데, 엄격한 심사를 거쳐야 회원이 될 수 있다. 당시 최고의 카스트라토였던 파리넬리도 1730년에 회원이 됐고, 훗날에는 로씨니, 베르디, 바그너, 생상, 푸치니, 리스트, 브람스 등등 쟁쟁한 음악가들이 회원이었다.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

1745년 (31세), 베네치아에서의 안정을 뿌리치고...

욤멜리가 나폴리에서 공부할 당시 하세(Johann Adolph Hasse 1699-1783)는 그의 우상이었다. 그는 하세의 작품을 열심히 연구했다. 하세도 15살 어린 후배 작곡가의 작품을 인상적으로 봤다. 1745년에 하세는 베네치아에 있는 여성 음악가를 위한 교육기관인 '오스페달레 델리 인구라빌리'의 음악감독으로 욤멜리를 추천한다. 이 곳에서 종교 음악을 작곡하며 욤멜리는 재정적인 안정을 얻었지만, 그의 마음은 콩밭에 있었다. 오페라 작곡에 대한 열정이 결국 그를 베네치아에서 떠나게 했다.


1749년 (35세), 귀인의 소개로 날개를 달다.

이 해는 욤멜리가 이태리 국내용이 아닌 전 유럽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날개가 달린 해이다. 기독교에서 50년마다 돌아오는 큰 축제인 희년을 기념하기 위해 로마에서는 대대적인 음악 행사가 기획됐고, 이는 로마 귀족들에게는 경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중요했다. 9년 전 로마에서 첫 오페라 세리아를 올리면서 눈도장을 찍었던 요크 공작 헨리 베네딕트(영국 왕 제임스 2세의 손자임)는 그 사이에 추기경이 됐는데(1747년) 그는 욤멜리를 교향 베네딕토 14세와 절친한 알레산드로 알바니 추기경에게 소개한다. 로마에서 욤멜리는 오라토리오 '예수 그리수도의 수난'으로 큰 성공을 거두고, 알바니 추기경은 그를 오스트리아 빈 궁정에 소개하여 그곳에서도 대성공을 거둔다.


헨리 베네딕트 추기경, 요크 공작 (1725-1807)
베네딕토 14세 (1675-1758)
알레산드로 알바니 추기경 (1692-1779)


1750년 (36세), 영성보다는 세속으로...

원래 1750년 1월 1일부터 욤멜리는 바티칸에서 부음악 감독으로 일을 시작했어야 했지만, 빈에서 큰 성공을 맛본 욤멜리는 또다시 마음이 콩밭(오페라 작곡)에 가버렸다. 그는 바티칸과의 계약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베네딕토 14세가 직접 나서게 되자 그는 6월 14일부터 공무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바티칸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오페라를 계속 작곡했다.


1753년 (39세) 독일로 향하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뷔템베르크 칼 오이겐 공작의 궁정에 음악감독으로 전격 취임한다. 공작은 욤멜리에게 파격적인 특권들을 제공했고, 그중 하나는 매년 이탈리아를 여행할 수 있도록 6주간의 휴가를 가지는 것이었다. 욤멜리는 슈투트가르트에 15년간 재직하면서 그의 최고의 작품으로 간주되는 오페라들을 작곡한다. 그의 명성은 1763년 어린 모차르트가 아버지와 함께 연주여행 중 루드비히스부르크(슈투트가르트 근교 도시)에 들려 욤멜리를 만나고 갈 정도였다.

젊은 시절의 칼 오이겐 뷔템베르크 공작 (1728-1793)

1766년 (52세), 대가의 명성에 균열이...

욤멜리가 비록 첫 작품을 희극 오페라(오페라 부파)를 써서 성공을 거두기는 했지만, 그의 일생의 화두는 오페라 세리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스타 가수의 기교에만 치중하는 당대 오페라의 흐름에 제동을 걸고자 했고, 드라마에 더 집중했다. 그리고 오페라의 개혁을 부르짖었던 크리스토퍼 글룩처럼 비극적인 장면을 매우 격하게 표현했다. 하지만 1766년에 루드비히스부르크에서 올려진 오페라 '볼로제조'의 3막에서 베레니체의 거대한 솔로 장면을 관람한 칼 오이겐 공은 이 작품을 재관람할 자신이 없다고 밝혔다.


1768년 (54세), 블록버스터(!) 오페라

프랑스 오페라의 영향을 받아 더 화려하고 더 거대해진 그의 오페라에는 발레가 삽입되기도 했다. 그의 오페라의 스케일을 알 수 있는 일화로 1768년 2월 11일에 공연된 오페라 '페톤테'의 개정판 공연을 들 수 있는데, 여기서 자그마치 436명의 엑스트라와 86마리의 말이 무대에 등장했다. (현재의 베로나 야외 오페라에서도 상상하기 힘든 스케일이다!) 이 시도는 칼 오이겐 공작의 반대파 귀족들에게 사치스럽다고 맹비난을 받았다.


1769년 (55세), 고향으로 회귀

욤멜리는 1769년 9월 27일에 칼 오이겐 공작 궁정에 사직서를 제출하는데, 이는 바로 수리됐다. 궁정에서의 불안한 조짐은 이미 그전부터 보였다. 같은 해 봄, 그가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있을 때, 궁정의 한 가수가 공작에게 그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다고 알려졌다. 또 이탈리아에서 귀환했을 때, 욤멜리는 공작이 새로운 가수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수를 선발하는 일은 욤멜리 고유의 권한이었음에도 말이다.

나폴리로 귀향했지만,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세리아보다 부파(희극)를 선호했다. 프랑스 풍의 화려한 그의 비극 오페라는 구식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그의 말년 작품은 '버림받은 아르미다'를 제외하고는 인기가 별로 없었다.


1771년 (57세), 시련의 말년

뇌졸중이 발발하여 신체가 부분적으로 마비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작곡을 계속한다. 포르투갈 궁정의 호세 1세가 궁정 지휘자로 모시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정기적으로 작품을 보내기로 약속한다.


1774년 (60세), 나폴리악파의 대가, 세상을 떠나다

두 번째 뇌졸중이 발발하여 사망한다.



로마에서 대박치고 욤멜리를 유럽 전역에 이름을 알려지게 만들었던 바로 그 오라토리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https://youtu.be/OepTMeKFsVk


욤멜리의 오페라 "버림받은 디도네"

https://youtu.be/1q5vicJ0N_g


칼 오이겐 공작을 질리게 만들었던 비장한 솔로 장면이 있는 오페라 '볼로제조'의 3막

https://youtu.be/SjKap5ycW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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