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파 오페라의 문을 연 작곡가 크리스토프 글룩
어제는 나폴리악파의 대표적인 작곡가 니콜로 욤멜리에 관해 글을 적었다. 그러면서 동시대 음악가이자 후대에는 욤멜리보다 더 크게 이름을 남긴 크리스토프 글룩의 이야기도 뺄 수 없었다. 18세기 중반에 글룩은 오페라 계에 새로운 바람을 가져왔기에, 오페라사에서 매우 중요한 작곡가이기 때문이다. 욤멜리와 글룩, 두 사람 다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이었지만, 현재 욤멜리의 이름은 일부 바로크 애호가들을 제외하고는 잊혔고, 글룩의 명성은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 모두 1714년에 태어났고, 말년에 뇌졸중으로 신체가 허약해졌으며, 두 번째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인생에는 어떤 차이점이 있었을까?
1714년 초라한 탄생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동남쪽으로 50여 km 떨어진 에라스바흐라는 작은 시골마을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산림 관리인 일을 맡았고, 글룩의 아버지는 사냥꾼도 겸직했다. 아버지가 어떤 귀족을 섬기느냐에 따라 거주지가 자주 바뀔 수밖에 없었다. 부친은 아들이 자신의 뒤를 이어 가업을 물려받기를 바랐지만, 글룩은 어릴 적부터 음악에 매혹됐다.
1727년 혹은 1728년 (13세 혹은 14세) 집 나가면 고생
글룩은 귀족 출신이 아니기에 유년 시절 및 청년 시절 기록이 불분명하다. 이때쯤 부친의 뜻을 거스르고 가출을 했다고 알려졌다. 떠돌이 생활 동안 그에게 끼니와 숙소를 제공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노래.
1731년 (17세) 잠시 학업에 뜻을...
원래 목적지는 빈(Wien)이었지만, 중간에 프라하에 머무른다. 프라하 대학에서 논리와 수학을 공부했다고 알려졌다. 훗날 국제적으로 활약한 글룩의 언어 구사력과 철학적 사유 능력으로 미루어볼 때, 그는 시골의 산림 관리인으로 평생을 보내기엔 너무나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던 듯싶다.
1736년 (22세) 음악의 길을 본격적으로
20세쯤 빈에 정착했다고 알려졌는데, 22세 때 빈의 로브코비츠 공의 실내악단에 연주자로 취직한다. 첨단 유행의 도시 빈에서 당시 트렌드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 오페라를 접할 기회가 많아졌다.
1737년 (23세) 작곡을 제대로 배우다
밀라노에 도착한다. 여기서 교회 음악 및 교향곡 작곡가로 유명한 사마르티니(1700-1775)에게 작곡을 배운다. 글룩이 오페라 작곡가가 아닌 기악 작곡가에게 작곡을 배운 것이 어쩌면 기존의 오페라 관습과 타성에 물들지 않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참고로 같은 해 이태리 남쪽 나폴리에서는 욤멜리가 생애 첫 오페라를 발표해서 큰 성공을 거둔다.
1741년 (27세) 첫 오페라
드디어 글룩도 첫 오페라 '아르타세르세 Artaserse'를 밀라노 테아트로 레죠 두칼레에서 발표한다. 이 극장은 현재의 라 스칼라 극장이 생기기 전 밀라노에서 굴지의 극장이었다. 이 극장이 1776년에 불타고 나서 라 스칼라 극장이 지어졌다. 그러니 글룩의 첫 오페라 데뷔도 꽤나 괜찮았던 편. 게다가 대본도 당대 가장 인기 있는 대본가였던 메타스타지오 (1698-1782)의 것이었다. 문제는 메타스타지오는 글룩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룩의 초기 오페라 대부분은 메타스타지오의 대본으로 작곡되었다. (이 둘의 악연은 몇 년 후 극에 달한다.) 글룩의 오페라들은 이태리 여러 도시에서 공연되는 등 작곡가로서 입지를 다져가게 됐다.
여기서 다시 한번 욤멜리를 소환해보자면, 같은 해 욤멜리는 볼로냐의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에서 회원으로 받아들일 정도로 젊은 대가로 인정받고 있었다. 당시 글룩 입장에서 욤멜리는 넘사벽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르겠다.
1745년 (31세) 런던 그리고 헨델
글룩은 평생 '역마살'의 대명사처럼 살았다. 이 해에는 런던으로 가게 됐다. 미들섹스 경이 초청한 것. 그곳에서 오페라 2개를 올리기로 했으나, 때마침 내란이 일어났다. 흥행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글룩 개인적으로는 의미 있는 행보였으니, 바로 헨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듬해 두 사람은 하이마켓 극장에서 함께 콘서트를 가질 정도였다. 하지만 대략 30년에 달하는 나이 차이만큼이나 두 사람의 음악적 간극은 컸다. 흔히 헨델은 바로크 음악의 대표 주자로 여겨지고, 글룩은 고전파의 선구자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때의 글룩은 아직 자신의 스타일을 정립시키지 못한 신진 작곡가일 뿐이었고, 노대가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대위법도 다 이해를 못하는 애송이로 보였던 모양이다.
1747년 (33세) 좋은 인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독일 드레스덴 근교의 비르니츠에서 오페라 한 작품을 올리게 되는데, 여기서 피에트로 밍곳티의 오페라단을 알게 된다. 이 단체는 오페라 극장이 없는 도시를 순회하면서 공연을 하였다. 그 인연으로 마침 바이에른과 작센 궁정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이를 축하하기 위한 오페라를 써서 대박이 났다. 이 성공 덕에 빈 황실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큰 기회를 받게 된다. 마리아 테레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세미라미데 리코노슈타'를 작곡하게 되는데, 이는 하세와 같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들을 제치고 간택받은 것이었다. 에라스바흐의 시골 산림관리인 아들이 빈 황실에 입성하게 됐다!
여기서 반전은 이 오페라의 대본이 이번에도 역시 메타스타지오 것이었는데, 그는 여전히 글룩의 음악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빈에서 글룩이 해낸 큰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래 머물지 못한 이유가 됐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글룩은 밍곳티의 오페라단과 함께 유럽 투어를 다니게 된다. (인생은 나그네 길....)
1750년 (36세) 인생의 반려자를 만나다
프라하의 카니발을 위해 오페라 '에치오 Ezio'를 하러 왔다가 18세의 마리아 안나 베르긴을 만나 결혼을 하게 된다. (도둑놈) 결혼 후에도 여전히 떠돌이 음악가 생활은 계속됐다.
1754년 경 (40세) 드디어 정착을...
마침내 작센-힐드부르크하우젠의 요제프 왕자의 초청을 받아 궁정 악장이 된다. 어릴 때부터 꿈의 도시였던 빈에 정착할 수 있게 됐다.
1756년 (42세) 기사 작위를 받다
로마에서 오페라 '안티고노'를 초연하고 교황 베네딕토 14세에게 기사 작위를 받게 된다. 당시에 이보다 더한 성공 스토리가 있을까? 모든 것을 이뤘다고 여겼을 것 같은 이때, 글룩이 후대에까지 이름을 남기게 된 고민과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내놓게 된다.
„prima le parole, poi la musica“
'시는 음악 표현의 기초가 되며, 음악은 시에 종속한다.' 당시에 만연했던 스타 성악가의 기교에 의존하는 오페라 관행에 반발을 하기 시작했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모든 것, 서곡, 합창, 춤, 무대 장치, 무대 효과 등등은 극적인 통일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글룩의 생각은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반발도 적지 않았다. 드라마에 더 집중하려는 시도는 욤멜리도 했다. 그렇지만 두 사람이 추구하는 음악적인 방향은 달랐다. 욤멜리는 비극, 드라마에 더 집중했고 자신의 이상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 같았던 슈투트가르트 칼 오이겐 공작에게 갔다. 그리고 이 선택이 욤멜리와 글룩의 삶을 반전시키는 계기가 된 건 아닐까. 화무십일홍이라고 욤멜리와 칼 오이겐 공작과의 밀월관계는 10년이 지나고 균열이 생겼다. 그리고 고향 나폴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오페라는 아름답지만 구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축구로 따지면 EPL에서 전쟁같이 치열한 경쟁을 치르며 살아남느냐, 중동이나 중국 리그로 가서 돈을 엄청나게 받을 것인가.... )
1762년 (48세) 새로운 도전
자신의 사상에 입각한 오페라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발표. 하지만 기존의 이태리 희극 오페라의 인기에 가려 큰 호응을 받지는 못함. 1767년에는 '알체스테'를 발표한다. 이 두 오페라는 지금까지도 글룩의 대표작으로 사랑받고 있다.
오페라 계에 이단아, 혁명론자로 보일 법 하지만 글룩은 사실 큰 보험을 들고 있었다. 어쩌면 나중에 큰 잭팟이 터질 줄 몰랐던 로또를 매주 조금씩 사고 있었던 셈이었을지도. 글룩은 당시 빈 황실의 왕자와 공주들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훗날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는 레오폴드 2세는 글룩의 오페라를 직접 연출할 정도로 황실 가족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훗날 프랑스의 왕비가 되는 마리 앙투와네트가 있었으니.....
1770년 (56세) 잭팟이 프랑스에서 터지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고 나서 자신의 옛 음악 선생인 글룩을 모셔온다. 파리 오페라와 6개의 작품을 계약하게 된 것이다.
1774년 (60세), 환갑의 글룩, 프랑스에서 뜨거운 논쟁에 휩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후원의 결실로 파리에서 선보이게 된 첫 오페라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가 격렬한 논쟁에 휩싸이게 된다. 글룩을 지지하는 프랑스 파에 맞서 나폴리 오페라를 지지하는 이들은 이탈리아에서 니콜로 피치니를 모셔온다. 두 사람은 같은 오페라를 작곡하는 것로 맞붙게 되었는데, 결과는? 현재 스코어로 보면 글룩의 압승이다.
이 해는 글룩에게 구설수도 많았지만 영광도 컸다.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외에도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의 프랑스 개정판이 상연되어 호평을 얻었고, 빈에 돌아와서는 황실 궁중 작곡가로 임명됐다. 이후 몇 년간 빈과 파리를 오가며 활동했다.
1779년 (65세), 육체적인 시련
파리에서 '에코와 나르치스' 리허설 때 첫 번째 뇌졸중을 겪게 된다. 이후 빈으로 돌아와서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된다.
욤멜리의 경우 57세에 뇌졸중이 발발하였지만 신체의 일부가 마비되었음에도 끊임없이 작곡을 계속하였다.
1787년 (73세), 음악사에 고전파의 챕터를 열었던 글룩, 세상을 떠나다.
11월 15일 뇌졸중이 재발하여 몇 시간 후 사망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1789)이 발발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마리 앙투와네트의 험한 말년을 보지 않고 죽은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