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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Feb 23. 2021

반대의 선을 사랑의 이름으로 넘다

오페라 속 여인의 삶과 사랑 - 줄리엣

이 글은 <월간 객석> 2021년 1월 호에 실린 "오페라 속 여인들의 삶과 사랑 - 네 번째 이야기. 줄리엣" 중 일부를 발췌한 내용입니다.




“아, 저 아가씨는 횃불에게 밝게 빛나는 법을 가르치는구나!

너무 아름답고 귀해서 이 속세에는 과분할 정도인걸.

까마귀 무리 속의 새하얀 비둘기인 양 아가씨는 동무들 사이에서 홀로 돋보이네.

이제까지 내가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내 눈이여, 부정하라!

나는 오늘 밤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는구나!”


-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2막 5장, 로미오의 독백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잭 브렘(Jack W. Brehm)은 1966년 ‘심리적 반발이론’을 발표했는데, 개인의 자유선택의지가 제한되거나 박탈된 상황일 때, 사람들은 침해 받은 자유를 회복하려고 한다는 이론이다. 즉,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심리를 설명하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은 대표적인 예로 ‘로미오와 줄리엣’을 든다. 아예 ‘로미오와 줄리엣 효과(Romeo and Juliet effect)’라는 이론도 있다. 부모의 반대가 있을 경우 연인 사이의 로맨틱한 감정이 강화된다는 것으로 1972년 미국의 리차드 드리스콜(Richard Driscoll)이 발표했다. 하지만 사랑은 말리면 말릴수록 더 격렬하게 불탄다는 걸 16세기 말 셰익스피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독을 마시기 직전의 줄리엣" - 알베르트 차우취 (Albert_Tschautsch 1843-1922)


https://youtu.be/eGSKkNdyvqQ

벨리니의 줄리엣 아리아를 불러봤습니다. 간만에 소프라노 테크닉을 총동원하느라 고생 좀 했네요^^;;;


원작은 따로 있다?

원수 집안의 아들인 로미오를 사랑한 대가로 줄리엣은 비극적 운명을 맞는다. 아름답고, 또 열정적인 소녀 줄리엣의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의 수많은 명작 중에서도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으며 현재까지도 영화, 뮤지컬 등 많은 장르로 변주된 작품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 아름답고 애틋한 두 어린 연인들의 이야기를 처음 쓴 사람은 셰익스피어가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1596)보다 65년 전인 1531년, 이탈리아 작가 루이지 다 포르토(Luigi da Porto 1485-1529)가 쓴 ‘새로이 발견된 두 고귀한 연인 이야기’ 라는 소설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의 시작은 이 작품이라고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이 소설에는 작가 루이지 다 포르토의 자전적인 스토리가 반영됐다고 한다.


1511년 어느 무도회에서 26세의 다 포르토는 16세의 소녀인 루치나 사르보냔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그녀의 후견인 지롤라모 사르보과 다 포르토와 각별한 삼촌 안토니오 사르보냔의 사이는 앙숙이었다. 안타깝게도 웃어른들의 악연으로 인해 포르토루치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녀는 다른 사람과 결혼해야 했다. 그렇게 루치나는 떠나갔지만 다 포르토의 마음속에서 그녀는 지분은 여전했다. 몇 년 후 전쟁에서 중상을 입은 다 포르토는 자택인 '빌라 다 포르토'에서 요양을 하면서 가문의 반목으로 힘든 사랑을 하는 두 청춘 남녀 이야기를 소재로 소설을 쓴다.


배경은 근방의 베로나로 설정했지만, 사실 다 포르토는 '빌라 다 포르토' 창 밖으로 보이는 '몬테끼오 마죠레(Montecchio Maggiore)'라는 마을에 있는 975년에 지어진 완전히 다른 스타일의 두 성을 보고 이름을 착안했다. 그래서 지금도 몬테끼오 마죠레에는 줄리엣 성이라고 불리는 벨라구아르디아 성(Castello della Bellaguardia)로미오 성이라고 불리는 카스텔로 델라 빌라(Castello della Villa)가 있다. 그렇지만 이 소설은 다 포르토 생전에는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그의 사후 1531년에야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루치나는 다 포르토에게 일생 특별했던 듯 하다. 이 작품이 루치나에게 헌정됐을 정도였으니..

멀리 보이는 로미오성과 줄리엣 성 (출처: 위키피디아)




징가렐리, 바카이, 벨리니의 로미오와 줄리엣


다 포르토의 소설은 나폴리 악파의 대표주자이자 거의 마지막 주자로 여겨지던 니콜로 안토니오 징가렐리(Niccolò Antonio Zingarelli 1752-1837)에 의해 오페라로 부활했다. 당시 나폴리는 파리와 런던 다음으로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으며 ‘음악의 수도’라도 불릴 만큼 음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징가렐리의 작품도 전 유럽에서 사랑받았을 정도로 인정받았으며, 그 외에도 그는 벨칸토 오페라의 중요한 작곡가인 벨리니, 도니젯티 등을 제자로 키워냈다. 징가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는 <줄리에타와 로메오 Giulietta e Romeo>라는 타이틀로 1796년 1월 30일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됐다. 단 8일만에 작곡됐지만 가렐리의 최고의 작품 중 하나라고 여겨진다. 

나폴리 오페라의 대표주자였던 니콜로 안토니오 징가렐리

2016년 잘츠부르크 오순절 음악축제에서 거의 공연되지 않는 이 오페라가 연주됐는데, 게오르게 페트로우의 지휘로 카운터테너 프랑코 파지올리가 로메오를, 메조 소프라노 안 할렌베르크가 줄리에타를 노래했다. 고전시대에 쓰여진 색다른 ‘로미오와 줄리엣’을 감상하고 싶다면 아래 유튜브 링크에 당시 실황연주가 음원으로 올려져있으니 감상해보시길 권한다.


https://youtu.be/xuKZUz0a0tA


1825년과 1830년에는 5년 간격으로 <로미오와 줄리엣> 오페라 2개가 탄생했다. 벨칸토 작곡가 니콜라 바카이(Nicola Vaccai 1790-1848)빈센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가 그 창조자다. 두 작품 다 셰익스피어가 아닌 다 포르토의 원작을 바탕으로 대본이 쓰였다. 당대 최고의 대본가였던 펠리체 로마니가 두 작품의 리브렛토를 맡았다.


지금은 성악기법으로만 그 이름이 기억되지만 바카이는 나름 당대의 중요한 오페라 작곡가였다. 그의 작품 중 가장 성공한 오페라가 바로 <줄리에타와 로메오>였다. 이 오페라가 성공하자 런던에서도 올려지게 되었다. 거기에서 바카이는  어쩌다보니 성악 선생님으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그 덕에 지금은 오페라 작곡가보다는 마치 피아노계의 체르니처럼 성악 교습법으로 역사에 이름이 남게 되었다.

 

성악계의 하농, 체르니라고 할 수 있는 니콜라 바까이 
당대 미남으로 유명했던 빈센초 벨리니


벨리니는 당시 다작으로 유명한 작곡가 죠반니 파치니가 낸 펑크를 막기 위해 <카풀레티와 몬테끼 I Capuleti e i Montecchi >라는 작품을 가지고 구원투수로 베네치아 극장에 올랐다. 그는 파치니의 공백을 메우는 대신 다른 작곡가들의 세 배나 되는 개런티를 받는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전작 <해적>을 마치자마자 <카풀레티와 몬테끼> 작곡에 착수했다. 스승 가렐리를 존경했던 벨리니는 자신의 작품과 스승의 그것의 타이틀이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제목을 <카풀레티와 몬테끼>로 정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 프랑크 딕시 (1884)

대본은 펠리체 로마니가 썼다. 다 포르토의 원작을 반영한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은 우리가 아는 셰익스피어의 작품과는 많은 부분이 다르다. 배경과 등장인물, 사건의 대략적인 진행은 비슷하지만 극적으로 어떻게 플롯이 진행되느냐는 상당히 다르다. 또한 캐릭터적으로도 달라서 로마니와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가 프랭크 딕시(위)의 그림 속의 로미오라면, 로마니의 로미오는 프란체스코 아예즈(아래)의 그림 속의 로미오 모습에 가깝다는 게 개인적인 인상이다.


셰익스피어가 줄리엣의 아버지, 캐풀릿 영주의 입을 빌어서 “조용하고 훌륭한 청년”으로 로미오를 묘사한 반면, 로마니의 로미오는 적을 공포에 떨게 하는 무자비한 전사의 모습에 줄리엣에게 야반도주를 강하게 요구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에 대응하는 줄리엣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로미오를 사랑하지만 가족과 조국을 쉽게 져버릴 수 없다며 로미오를 달래는 이중창을 부르는데, 셰익스피어의 줄리엣이 보여줬던 금방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약속하는 모습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입맞춤' 프란체스코 아예즈 (1823)



https://youtu.be/wbP5BAvTyv8

독일 막데부르크 극장 솔리스트인 소프라노 이혜진 양과 제가 노래한 로미오와 줄리엣의 이중창입니다.


유명 서사에서 오페라의 명작으로

징가렐리, 바카이, 그리고 벨리니에 이르기까지 이 작곡가들이 쓴 <로미오와 줄리엣> 오페라들은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다. 바로 로미오 역할이 당대 최고의 메조 소프라노들이 사랑하던 ‘바지역할’이었다는 점이다. 칭가렐리는 로메오 역을 카스트라토 지롤라모 그레셴티니(1762-1846)를 위해 이 역을 썼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카스트라토의 자리는 전설적인 메조소프라노들이 대신 채워나갔다.


그 중에서도 콘트랄토부터 소프라노까지 넓은 음역을 가지고 있었던 가수 마리아 말리브란(Maria Malibran 1808-1836)은 징가렐리, 바카이, 그리고 벨리니의 로메오를 즐겨 불렀다. 로씨니의 오페라 <세미라미데>에서 콘트랄토 역인 아르사체와 소프라노 역인 세미라미데를 다 부르고, 또 같은 작곡가의 오페라 <오텔로>에서도 오텔로와 데스데모나 두 역을 모두 부를 정도로 말리브란의 음역은 광활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로씨니의 오페라 중 가장 유명한 <세빌랴의 이발사> 초연 때 알마비바 백작을 불렀던 테너 마누엘 가르시아였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엄하게 음악을 배웠다. 압도적인 가창력과 드라마틱한 연기력으로 전 유럽과 미국에 이르기까지 명성을 떨쳤지만, 강압적인 아버지와의 갈등, 불행한 결혼 생활, 그리고 불과 28살에 삶을 마감한 그녀의 인생은 20세기에 여러 차례 영화화되기도 했다.


1832년 말리브란은 볼로냐에서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끼>의 로메오를 부를 때, 마지막 장면을 바카이의 <쥴리엣따와 로메오>의 마지막 장면으로 대체해서 공연했다. 작곡가들이 뒷목 잡을 만한 일이었지만, 19세기 내내 이 혼합(?)버전이 빈번하게 공연됐다. 심지어 그녀는 바까이에게 2막짜리 원작에 3막을 추가해서 작곡하도록 요청했다. 이 새로운 버전은 1835년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에서 초연되었다.

전설적인 명가수, 마리아 말리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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