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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Apr 20. 2019

아르마니 모델들이 부르는 뮤지컬 같은 오페라

젊은 감각의 코미쉐 오퍼 베를린 <라 보엠>

흔히 성악가의 악기는 그 자신의 몸이라고들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말에 반만 동의한다. 나머지 절반은 '극장' 혹은'연주홀'이다. 성악가는 몸에서 시작된 소리의 핵을 가지고 극장 전체를 사용해서 공명을 만들어낸다. 좋은 성악가들의 연주를 가보면, 소리가 귀로 들리는 게 아니라 그 진동이 전달되어 피부로 그 소리를 느낄 수 있다. 성악가가 온몸을 써서 내는 그 소리를 관객도 피부로 듣게 될 때, 그야말로 소름이 끼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이 오페라와 뮤지컬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본다. 성악가들이 그 공명의 최적점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뮤지컬은 마이크를 사용하여 성악가가 내야 할 그 진동을 첨단 음향장비가 대신한다. 그만큼 가수들의 역동성을 가능케하여, 다이내믹하고 현란한 안무 및 동선, 그리고 일상 대화 같은 자연스러운 대사 처리 등이 가능하게 된다. 오페라와 뮤지컬 중 어느 장르가 우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그만큼 두 장르가 다르다는 의견을 피력하는 중이다.


어제 코미쉐 오퍼 베를린에서 <라보엠>을 선택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는 연출자 때문이었다. 코미쉐 오퍼 극장장이자, 전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연출가 베리 코스키가 만드는 <라 보엠>은 과연 어떨까 하는 호기심과 기대가 컸다. 왜냐하면, 최근에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에서 베리 코스키가 연출한 <카르멘>을 관람했는데, 기존의 <카르멘>을 혁신적으로 재해석한 연출에 나를 포함한 모든 관객이 열광적인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관능의 상징인 집시 카르멘에게 고릴라 복장이나 투우사 복장을 입힌 점. 비제 원작의 레치타티보를 다 없애고 프랑스어 내레이션으로 대체한 점.. 등등 많은 혁신(?)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마치 '뮤지컬 같다'라는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의 절반 이상에 할애된 '춤'이었다. 흡사 아이돌 가수들의 군무를 보는 양, 끊임없이 시선을 빼앗는 화려한 안무와 동선은 "아, 오페라도 이런 게 가능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팟캐스트에서도 프랑크푸르트 오페라 <카르멘>을 다루면서 투우사 에스카미요 역을 맡은 베이스 심기환 씨를 인터뷰했었다. 다시 듣기 http://www.podbbang.com/ch/1769003?e=22877953)


역시나 어제 관람한 오페라 <라 보엠>에서도 시선 강탈하는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이 연출자는 당최 가수가 가만히 서서 노래하는 것을 1초도 참지 못하는 양, 가수들은 계속해서, 때로는 복잡하기도 한 동선을 소화해냈다. 하지만 <카르멘>에서는 춤을 담당했던 전문 댄서 6명이 있었고, 천재적인 안무가의 교묘한 동작과 동선 배분 덕에 가수들은 노래에 지장 받지 않는 선에서 소화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비제의 음악 자체도 리듬감이 넘쳐서 오히려 그런 동작들이 음악의 효과를 더 배가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어제 오페라 <라 보엠>의 작곡가는 푸치니라는 것이다. 옛날 파바로티나 프레니가 로돌포와 미미를 부를 때, 그들이 뚱뚱하고 둔해서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푸치니라는 작곡가의 작품을 소화하려면, 온몸을 사용해서 공간을 공명 시키는 테크닉이 필요하기에 불필요한 움직임을 최소화하여, 악기의 성능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런 노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 어제 생생히 목격했다. 성악가의 소리가 푸치니 특유의 거대한 오케스트라 볼륨에 묻혀서 실종되는 일 말이다. 음악의 절정 부분에서 피부로 소리를 느끼는 건 고사하고 가수의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당연히 감동은 달나라로 갈 수밖에. 


이제까지 <라 보엠>을 직접 공연도 해보고, 수십 차례 관람했지만, <라 보엠>은 나에게 일종의 최루가스다. 어제 극장을 가는 길에 동행자에게 줄거리를 설명해주는 와중에도 그만 울컥해서 휴지로 눈시울을 훔치게 만들 정도다. 심지어 2003년 올림픽 체조 경기장에서 테너 배재철 님이 로돌포로 분한 <라 보엠>은, 그 공간이 전문 클래식 연주홀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2막 빼고 1,3,4 막을 엉엉 오열하면서 관람했었다. 어쩌면 항상 <라 보엠>에 등장하는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감정이입을 과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천재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푸치니가 이 오페라에서 때로는 익살맞게, 그리고 때로는 절절하게, 어느 한 소절 버릴 곳 없이 관객의 감정을 쥐락펴락 하도록 썼다. 그야말로 '불후의 명작'이다. 이 명작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은 당연히 가수의 몫이다. 가수는 푸치니 음악의 특별한 힘을 구현해야 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연출가 베리 코스키는 이해할 수 없는 무대로 가수들의 역량을 깎아먹었다. 무대 뒷배경이 없어서 무대 뒤의 그 공허한 공간을 노출한 무대는 신선할지는 모르나, 음향의 반사를 기대할 수 없어서 성악가들이 노래하기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소리의 무덤이 따로 없다. 왜 저렇게 무리한 무대 설정을 했을까 의아했는데, 4막에서 그나마 궁금증이 풀렸다. 미미의 죽음 이후 로돌포를 제외한 모든 배역이 뒷걸음질, 혹은 옆걸음질로 무대 뒤로 사라지는 동선 때문에 그렇게 강행했다고 추측된다. 덕분에 대부분의 가수들은 반사되는 음향도 부족한 채, 각자의 아리아의 절정 부분에서 오케스트라 볼륨을 뚫어보고자 무리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결국 가수의 수명을 단축하는 안타까운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잔혹한 무대 말고도 다른 이유는 미스 캐스팅이다. 이 날 로돌포, 마르첼로, 쇼나르, 꼴리네, 이 남자 주역 가수 4명은 마치 아르마니 양복 모델을 보는 양 훌륭한 외모를 선보였다. 하지만 일부 성악가의 발성은 푸치니를 부르기에는 좀 얕은 감이 없지 않았다. 각자 매력적인 음색과 깔끔한 음악성 등 좋은 가수들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푸치니는 수면 위로 드러나는 빙산의 일각보다 수면 아래의 깊은 중심이 필요하다. 굳이 말하자면 단전 아래의 하체를 얼마나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느냐가 푸치니 음악의 끈끈한 라인과 오케스트라 볼륨 위를 항해할 수 있는 자유를 허락할 것이다. 하지만 어제의 그 젊고 매력적인 가수들 중 일부에게는 이런 점이 아쉬웠다. 그러다 보니, 가뜩이나 하체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많은 동작, 음향 반사를 기대할 수 없는 최악의 무대, 훌륭했지만 자비 없는 오케스트라까지 겹쳐져서 푸치니의 음악이 주는 충족감이 매우 아쉬웠다. 


오페라 <라 보엠>의 히로인, 미미를 부른 소프라노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이 가수는 비스바덴 극장에서 <돈 죠반니>의 돈나 엘비라를 통해 내 기억 속에 각인됐을 정도로 좋은 가수다. 아마 체구 대비 볼륨은 세계 최강이 아닐까. 역시 문제는 푸치니였다. 이 가수의 창법이나 연기는 후련하게 쏟아내는 스타일인데, 그래서 끊임없이 격한 감정 표현을 하는 돈나 엘비라와 찰떡궁합이었다. 그런데 푸치니의 미미는 10개를 쏟아내면, 20개는 간직한 채, 몸 안에서 계속 돌리고 있어야 하는 역이다. 그러다 보니, 그녀의 발성과 연기는 견고한 라인을 갖고 흐르지 못한 채, 잦은 요동침을 보여줘서 안타까웠다. 좋은 가수인데, 너무 일찍 이 역을 맡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사실, <라 보엠>의 최루 담당은 미미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청순함과 비련의 삶인데, 어제 공연 덕분에 이제는 <라 보엠> 이야기를 얼마든지 해도 울지 않을 것 같다. 


매우 실망스러웠을 법한 어제 공연을 볼만하게 만들어줬던 구세주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이 오페라를 보게 한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소프라노 박혜상. 그녀는 이미 1년 반 전에 뮌헨에서 오페라 <코지 판 투테>의 데스피나 역으로 화려하게 유럽 무대 데뷔를 하고 이 브런치에서 "새로운 스타 탄생"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https://brunch.co.kr/@jinaohmezzo/1

1년 반 만에 무대에서 다시 듣는 그녀의 목소리는 지난 시간 동안 엄청난 '발전'을 했다는 걸 느끼게 해 줬다. '발전'이라는 표현은 기량면에서 쓴 것이 아니다. 오페라 가수로서 기량이야 이미 예전에도 출중했었으니까. 여기서 '발전'은 모차르트에서 푸치니에 이르는 간극을 충분히 소화할만한 방향성 면에서의 발전을 의미한다. 


무젯타 역을 맡은 그녀는 2막에서야 등장하는데, 그녀가 무젯타 아리아 "Quando m'en vo 내가 길을 걸을 때" 보여준 리릭한 소리의 풍성함에 그제야 속이 후련해졌다. 그러면서 1년 반의 시간 사이에 확인되는 그녀의 성장에 놀랐고, 또 기뻤다. 2막에서는 무젯타가 주로 무대 앞에서 노래를 하기에 자리 배치 때문에 더 잘 들리는가 싶었는데, 3막에서 4 중창을 할 때는 무대 깊숙이 들어가서 노래를 함에도 자체 공명을 훌륭하게 해내는 걸 보고, 이 날 출연진 중 푸치니를 가장 푸치니 답게 소화해냈다고 마음속으로 엄지 척을 주었다. 무젯타 역에 필요한 카리스마와 끼는 잘 발휘할 거라고 이미 공연전부터 예상하고 있었고,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다가오는 19/20 시즌에도 다양한 유럽의 극장에서 좋은 기회를 받았다는데, 다음엔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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