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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a Sep 19. 2019

이런 비트에는 노래 못하겠어요!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 벨리니의 <청교도>

드디어 파리에 오페라 보러 왔다. 그동안 베를린, 런던, 빈, 밀라노, 바르셀로나 등등 유럽 각국을 대표하는 오페라 극장을 순례했는데, 유독 파리에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번에 용기를 냈는데, 기차로 3-4시간 거리여서 생각보다 여정이 매우 수월했다.


바스티유 오페라 극장은 1989년에 개관한 파리 국립 오페라단의 현대식 극장이다. 2,700 석인데, 유럽 극장 중에서는 굉장히 큰 편이다. (여담이지만 1989년 개관할 때부터 1994년에 정치적 이유로 사임할 때까지 정명훈이 음악감독으로 재직하였다. 이거 어마어마한 경력인데, 사람들이 잘 모른다.) 파리 국립 오페라단은 또 하나의 극장을 가지고 있다. 바로 고전미의 절정을 자랑하는 오페라 가르니에다. (약 2,200석으로 뮤지컬과 영화 "오페라의 유령"의 배경이기도 하다.) 하지만 파리 국립 오페라단이 바스티유를 대표 극장으로 지정했기에, 바스티유라는 이름의 상징성은 크다.

고전미 뿜 뿜! 가르니에 극장

이번 시즌 바스티유의 개막작은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 벨리니의 <청교도(I Puritani)>다. 주인공 엘비라는 (노래가 어려워서 미쳐버렸나 싶은) 광란의 장면을 불러야 하는데, 오페라를 이끌어 가는 이 막중한 역할은 신예 스타 소프라노 엘자 드라이지히 Elsa Dreisig가 맡았다. (프랑스+덴마크 혼혈인 그녀의 성을 독일에서는 드라이지히, 프랑스에서는 드레직 이라고 부른다. 이하 엘자) 그리고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아르투로 역은 지금 한창 상종가를 치고 있는 멕시코 테너 하비에르 카마레나가 노래'했었다'.


<청교도> 프로덕션의 첫 공연이 관객들로부터 열광적인 갈채를 받았다는 리뷰를 미리 읽었기에, 내 기대는 뭉실뭉실 커져만 갔다. 엘자와 카마네라는 꼭 실제로 들어보고 싶은 가수들인 데다가 파리에서 보는 첫 오페라라는 개인적 의미가 더해져서 나의 파리행은 설렘으로 가득 찼다. 그랬는데......


결과적으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첫째, 카마레나가 나오지 않았다. 카마레나 같이 거물급 스타 가수는 개막공연과 초반 몇 공연에만 투입하고 그다음 공연부터는 그보다 더 '싼' 가수가 무대를 서는 일은 다반사이다. 카마레나가 떠난 그다음 공연이, 하필 내가 보러 간 바로 그 공연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국립오페라단에서도 노래한 적 있는 테너 프란체스코 데무로는 미성의 테너이긴 하지만, 바스티유같이 큰 무대를 채우기에는 부족함이 느껴졌다.

Javier Camarena 하비에르 카마레나, 다음에 만나요..ㅠ.ㅠ

둘째, 엘자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노이에 슈팀메(Neue Stimme) 콩쿠르와 도밍고의 오페랄리아(Operalia) 콩쿠르라는 현재 오페라 계에서 가장 성공이 보장되는 두 콩쿠르의 우승을 차지한 그녀다. 베를린 슈타츠오퍼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의 간판스타이기도 한 그녀는 특히 프랑스와 독일 레퍼토리 중심으로 이력을 쌓아왔다. 그런 그녀에게 이번 프로덕션은 첫 번째 벨칸토 오페라인 셈인데, 해내기는 했지만, 노련한 면이 없어서 충족감을 주지 못했다. 다른 오페라였으면 그렇게 빈틈이 보이지 않았을 텐데, 벨칸토 오페라는 가수가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벨칸토 오페라를 부르려면 1에서 100까지의 다양한 볼륨과 무지개 같은 다양한 음색이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관객과 심리싸움을 하듯이 "여기서 이렇게 할 줄은 몰랐지?" 이런 식으로 관객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압도적인 카리스마도 있어야 한다. 특히 이번 <청교도> 같은 오페라는 광란의 장면이 있기 때문에, 미쳐버릴 수밖에 없는 가련한 그녀의 상황에 관객들이 빠져들 수 있도록 치밀하게 계산된 연기와 야성적인 흡입력도 필요하다.

엘자는 시종일관 무대에 등장한 상태로 젊음을 뽐내듯 맨발로 뛰어다녔지만, 노래와 연결될 때는 그 동작의 에너지가 노래로 연결되지 못했다. 가령 체조 경기의 뜀틀을 상상한다면, 선수가 전속력으로 달려온 후 점프 직전 도움닫기에서 주춤하여 그 달려오면서 만든 에너지를 잃어버리고 그저 자신의 허벅지 근육 파워로 뜀틀을 넘는 것과 같았다. 오페라는 음악이고 음악은 리듬이다. 무대 위에서의 움직임 또한 오페라를 구성하는 리듬 중 하나인데, 이 작품에서는 다소 간과되는 것 같아서 아쉬웠다.

고생했어요, 엘자...토닥토닥! Elsa Dreisig © Simon Fowler- Erato/Warner Classics 

..... 리듬의 중요성! 그 기본 중에서도 기본을 이번 작품을 보면서 되새길 수 있었다. 좋은 음악이란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름다운 소리로 음정과 박자를 잘 지키면 90 퍼센트 이상 해결될 것이다. (그 간단한 걸 잘하기 위해 수천 가지의 테크닉이란 게 있지만...) 이번 프로덕션은 그 '기본'이 부족해서 실망스러웠다. 그리고 가장 큰 책임은 지휘자에게 있었다.


리카르도 프릿자의 지휘는 플레이팅에만 신경 쓴 요리 같았다. 그가 이끄는 파리 국립 오페라 오케스트라는 아름다운 음색과 하모니를 들려줬지만 정작 가수들과는 끊임없이 어그적거렸다. 그의 지휘를 보고 있으니, 저렇게 매번 프레이즈의 시작을 모호하게 주고, 프레이즈의 뼈대가 되는 중심박들을 놓쳐버리는데, (혹은 무시하는데) 가수들이 이 어려운 벨리니를 어떻게 잘 부를 수 있을까 싶었다.

유럽 언어에는 영어로 따지면 The와 같은 관사가 있기 때문에 아우프탁(Auftakt: 못갖춤마디, 약박에서 프레이즈가 시작하는 것) 처리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또 다른 전문 용어를 유감스럽게도 꺼내와야 하는데, 이태리 오페라에는 '술 피아토(sul fiato)라고 해서 호흡 위를 흐르듯이 노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편안한 가창'을 관객들이 감상할 수 있고, 더불어 성악가의 목소리도 보호된다. 그런 상태를 나는 '순풍에 돛 단 듯' 노래한다고 표현하고 싶은데, 그러기 위해서는 지휘자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순풍을 불어줘야 한다. 성악가도 억지로 낑낑거리며 노를 젓지 말고 파도에 맡기고 순풍을 믿으며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자신의 배를 잘 알아야, 즉 노래하는 언어의 메커니즘이나 그 작품에 필요한 테크닉도 꿰뚫고 있어야 다양한 바다를 항해한 후 무사 귀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쉽게도 어제는 순풍이 불지 않고 무풍이나 때로는 역풍이 불어서 가수들이 힘들게 노를 저어야 했다. 그리고 가수들도 자신의 배의 기능을 완벽히 꿰뚫지 못한 채 항해에 나선 것 같았다. 여기는 세계 최고의 오페라하우스 중에 하나인 바스티유 아닌가! 350주년이라고 사방팔방에 광고하고 있는 그들의  컨트롤타워에는 이를 해결할 사람이 아무도 없단 말인가? 그것도 시즌 개막작을?


화룡점정은 쌍팔년도에나 했을법한 진부한 연출이었다. 합창단을 4열 종대, 전진 1열 배치 등등 진부한 동선과 조련되지 않는 남성 합창단의 움직임은 당나라 군대가 예비군 훈련하듯 보였다. 또 가수들이  설득력 없는 동선을 보일 때면,  빈약한 무대가 더욱 훵하게 보였다. 지금 우리 시대에 200년 전의 미친 여자 이야기가 공감을 얻어내려면, 그녀의 상황에 복선과 스토리를 채워 넣어줘야 하는데, 이 프로덕션에서는 연출자의 생각이 무엇인지 읽을 수가 없었다.


내가 리뷰에서 읽었던 '관객들의 열광적인 갈채'는 아무래도 테너 카마레나 때문이었나 보다. 그의 무대를 놓쳐서 슬프지만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그리고, 이 모든 실망에도 불구하고, 파리에 다시 올 것이다. 조만간! 반드시! 나는 여전히 바스티유에 기대를 많이 하고 있다. 다음에는 "파리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대박이었다!..."라는 리뷰를 쓰고 싶다,

그리고 다음번에는 엘자가 잘하는 레퍼토리를 듣고 싶다. 겨우 91년생인데다 좋은 면이 많은 가수니까, 5년 뒤, 10년 뒤에는 벨칸토 오페라의 멋진 히로인이 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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