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돌이켜보면 내 삶의 꽤나 큰 변곡점이겠다 싶은 게 바로 코로나 기간이었다. 큰 변화도 많았지만, 소소한 변화도 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와인'이다. 락다운 기간에 하도 할 게 없다 보니, 와인을 시작한 것이다.
독일은 와인 시작하기 참 좋은 나라다. 유서 깊은 와이너리가 곳곳에 있는 건 물론이고, 가격도 참 괜찮다. 게다가 부드러운 프랑스 와인, 가성비 뛰어난 이탈리아 와인, 뭔가 마초의 향기가 나는 스페인 와인 등 이웃나라에서 온 와인들도 다양하게 접할 수 있다.
뭔가 꽂히면 무섭게 몰두하는 나이기에, 책을 읽고 유튜브를 보면서 지식을 쌓아갔다. 그러면서 이 세계가 얼마나 깊은 지 알게 됐다. 세상 어느 것이든 깊이 들어가면 끝도 없는 경지가 펼쳐지는 법이지만...
그러면서 그동안 와인에 무지한 덕에 나도 모르게 종종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에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운 경험이 떠올랐다.
2009년이었다. 유학을 나온 이후로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사실 2007년에 단 3개월치 생활비만 들고 독일행 비행기를 탈 때는, 조국에서 불러주기 전까지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였지만, 감사하게도 합창단 순회연주가 계기가 되어 생각보다 빨리 한국에 갈 수 있었다.
당시에 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하며 유학생활을 연명하던 나였기에 귀국 길에 선물 보따리를 준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은사님께는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내가 쾰른에서 유학할 때, 은사님이 프랑크푸르트에 방문하셔서 뵈러 간 적이 있었는데, 돌아갈 때 기차값 하라고 100달러 지폐 3장을 내 손에 쥐어주셨던 분이다. 그래서 독일의 무언가가 담긴 걸 가져가고 싶었는데, 그분이 와인을 좋아하신다는 게 떠올랐다. 독일 와인은 유명하니까 한 병들고 가면 좋아하시겠지?
그런데 와인 무식자인 2009년의 나는 무엇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당시 남친이었던 현 남편이 - 본인도 와인 무식자인 주제에 - 같이 와인을 고르러 갔다. 문제는 우리가 와인 샵에 간 것이 아니라 슈퍼마켓에 간 것이다. 그것도 레베(Rewe)나 에데카(Edeka) 같은 좋은 슈퍼가 아닌, 리들(Lidl)이라는 가성비로 승부하는 - 그래서 지금도 내가 참 좋아하는 - 슈퍼에 갔다는 것이다. 그 정도로 우리 둘 다 와인에 무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병이 좀 예뻐 보이고 '리즐링(Riesling)'이라는 이름이 붙은 와인을 골랐다. 한참 후에 알았지만 리즐링은 추운 독일 날씨에도 잘 자라는 독일의 대표적인 포도 품종이다. 가격은 2-3유로쯤이었을 거다. 한화로 3-4천 원.....!
"오, 리즐링 유명하지! 그거 좋을 것 같은데"라고 와인에 대해서는 1도 모르는 남친은 반색했다. 자, 이제 이 와인병을 어떻게 한국으로 들고 간담? 남친의 아이디어는 계속됐다. 프린트 토너를 사면 토너를 보호하기 위해 그것을 싸고 있는 완충재가 와인병에 딱 들어맞는다고. 마침 그 완충재가 있어서 그 안에 와인을 고이 싼 후, 옷가지 같은 걸로 몇 겹 더 둘렀다. 깨지면 안 되니까.
그 와인은 무사히 서울 청담동까지 가서 은사님 손에 전달됐다. 그분은 보시고는 "오! 리즐링! 그럼 잘 알지!"라고 하시면 고마워하셨다. 그런데 12년이 지난 2021년에 깨달았다. 그때 내가 선물한 그 와인은 코르크로 밀봉된 것이 아닌 바카스 뚜껑처럼 돌려서 오픈하는, 즉 그만큼 저렴한 티가 풀풀 나는 제품이었다는 것을...
코로나가 한창일 때, 갑자기 카카오톡으로 은사님께 연락이 왔다.
"내가 유튜브를 보다가 추천 영상에 네가 뜬 거야. 그래서 역시 지나는 뭐라도 하고 있구나 싶었어. 너 연습 게을리하지 않고 있지?"
뜨끔했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암담함에 연습은 놓은 지 오래였고, 새로 알게 된 와인의 세계는 나의 몸에 혈당과 군살을 더하고 있었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역시 은사님이시다. 나를 너무 잘 아셔.
"선생님, 제가 요즘 와인을 시작했는데요. 그러다 보니, 예전에 제가 선생님께 너무나 큰 결례를 범했더라고요. 제 딴에는 선생님을 생각해서 여기서 와인을 들고 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너무나 형편없는 와인이었어요. 그걸 깨닫고 나니 얼마나 창피하고 죄송하던지요."
"어머, 그랬니? 난 기억도 안 난다, 얘!"
은사님은 하하 웃으셨지만, 나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제발 선생님께서 와인 모임 같은 데서 "이거 내 제자가 독일에서 가져온 거야"라고 그 와인을 꺼내는 참사가 없었기를...!
이 에피소드를 와인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이야기하면 "아무리 그래도 은사님에게 리들 와인을 가져가는 건 너무 했다!"라는 타박이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그 유학생은 이제 독일에 자리 잡았고, 와인을 구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식견을 갖게 됐고, 지인들과 적당히 좋은 와인을 놓고 두런두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 흘러간 세월만큼 거쳐간 제자들의 수도 늘어났다. 그중의 한 제자와 점심을 함께 했다. 빈 국립 음대 시험을 거의 마지막으로 이번 입시 도전을 마무리한 학생이었다. 아쉽게도 좋은 결과는 함께하지 못했지만, 나는 이렇게 치열하게 준비했던 시간이 그 아이의 인생에 분명 큰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
"선생님을 바꿔보는 게 어떨까?"
내 옆에 두는 것보다는 나보다 더 좋은 선생님에게 보내는 것이 학생의 미래를 위해서 더 좋지 않을까 싶었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헤어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언덕 위로 걸어가고, 아이는 전철을 타러 가는 갈라지는 길목이었다.
"선생님, 잠시만요."
아이가 백팩 속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낸다.
"선생님 드리려고 빈에서 가져왔어요."
아이고...! 빈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 레슨 때, "ㅇㅇ야, 오늘 레슨비는 내지 마. 그 돈으로 빈에서 꼭 '비너 슈니첼(Wiener Schnitzel) 사 먹으렴. 진짜 맛있거든. 꼭 칼브(Kalb: 송아지) 슈니첼 먹어봐."라고 말하고 보냈는데, 이 녀석... 뭘 사들고 온 게야. 그 돈으로 맛있는 거 하나라도 더 사 먹지.
"초콜릿 같은 것은 선생님이 안 좋아하실 거 같아서..."
라며 아이가 꺼낸 것은 와인병이었다. 빈(Wien) 이름이 선명하게 적은 샤도네(Chardonnay) 와인. 나 주려고 이걸 비행기에 싣고 온 거구나. 그리고 나 만나러 온다고, 이 무거운 걸 백팩에 넣어서 전철 타고 여기까지 왔구나...!
와하하하하하...!! 웃음이 터졌다. 2009년의 내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정말 고마워. 맛있게 잘 마실게!"
이 녀석도 코르크 마개가 아닌 옆으로 돌려 따는 와인이다. 하하하하! 추억 소환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수천만 원짜리 '로마네 콩티'보다 더 귀한 와인이다. 2009년의 부끄러운 나 스스로가 구원받은 기분이었다. 아마 그때 은사님도 내 마음을 귀히 보셨겠지. 세상에는 가격표보다 귀한 것이 많다고 믿고 싶다.
와인병을 들고 집까지 1.5킬로를 걸어오면서 팔 근육이 뻐근했지만, 유쾌한 뻐근함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2009년의 내가 창피하지 않다. 내 인생 숱한 이불킥 에피소드 중 하나가 구원받아서 승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