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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삶을 예술처럼 예술을 삶처럼

윌리엄 모리스 평전, 박홍규, 개마고원

타향살이에서 시집살이로

영화 <82년생 김지영>, 영화 보는 내내 눈물이 났다. 그런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기 때문일까? 잔잔하게 진행돼 는 이 영화는 출구가 없어 보이던 나의 그 시절을 소환했다. 나름 잘 나가던(?)  디자이너였던 나는 결혼을 하고, 퇴사를 하고, 첫 신혼살림을 미국 남부에서 시작했다. 평범하고 가진 것이 없는 유학생들이 그러하듯 우리 부부는 새로운 문화체험에 대해 동지가 된 것 마냥 평등하게 역할을 나누며 잘 지냈다.

미국에서의 삶이란 거의 자동차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우린  함께 였다. 장도같이 보고, 빨래도 런드리(Laundry) 가서 같이하고, 청소도 같이 하고, 음식도 같이 하면서 웬만한 것들을 협업하며 타향살이의 낯섦에 서로를 의지하며 지냈었다. 그렇게 3 반이 지나고 유학시절이 끝날 무렵, 기다리던 아기가 생겼고, 남들은 원정출산을 한다는 임신 8개월이  돼서 거꾸로 귀국을 했다. ~한국에 간다. 이제 먹고 싶은   먹고, 가족과 친구도 만나고,  없이 그동안 못했던 한국말도 실컷 해야지. 가슴이 뛰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라는 말에서 '사회적 동물'이란 원래 ‘정치적 동물(zōon politikon)’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아직 오늘날과 같은 '사회'라고 부를만한 삶의 형태가 존재하지 않았고, 한나 아렌트는 이를 희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세네카가 ‘사회적 동물(animal socialis)'로 전환시켰고, 그 이후 사회적 동물로 정착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고대 그리스인의 삶에는 두 가지 영역이 있었는데 공적인 토론과 결정이 이루어지는 ‘폴리스’과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는데 필수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오이코스’로 나뉜다고 한다. 잘 알려진바대로 폴리스는 구성원 공통의 과제, 비전, 업무를 논쟁과 토론의 공간을 말하며, 이를 논의하는 ‘정치적 삶’은 바로 성인 남성으로 구성된 시민의 몫이었다.

반면에 오이코스는 인간 삶의 가장 원초적이고 기본적인, 이 차원을 담당하는 사회제도인 "가정"을 뜻하며,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여성, 노예, 어린아이들이 구성하는 물질적 재생산을 담당하던 공간을 말한다. 바로 인간으로 유지시키는 최소한의 물질적 조건과 연관되어 있다. 정리하면, 고대 그리스에서 삶이란 폴리스 영역에서 토론하는 시민의 삶과 오이코스 영역에서 노동을 하며 사는 노예의 삶으로 나뉜다는 것이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든다. 나는 그동안 내 삶이 폴리스에서 시민으로 살면서 투표권이 보장되고 인권이 존중받으며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시민이니까. 그러나 나를 비롯한 현대 여성은 결혼과 함께 폴리스의 삶과 오이코스적인 삶을 병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요구받게 된다. 학교를 다니며 공부하고 배운 지식과 기술로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과 별개로 또 다른 삶이 펼쳐진다. 삶이 유지되려면 누군가는 노예적 삶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민과 노예를 함께 해내야 하는 모순된 상황에 놓이면서 오늘날 가부장제 전통 아래서 결혼한 여성 삶은 필연적 균열이 일어난다.




스스로 오이코스의 삶을 결정할 때까지도 난 내가 폴리스의 삶, 시민의로서의 삶으로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과 첫 신혼살림을 미국에서 시작했다. 기다리던 아기는 유학시절이 끝날 무렵에 생기에 되었고, 난 귀국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당장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우리 부부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이 바로 시댁으로 들어갔다.


타향살이가 끝나자마자 시댁 방한칸에서 시집살이와 육아가 시작됐다. 유학을 마치고 신입사원이 된 남편은 새벽에 나가 한밤중에 오는 남편은 얼굴 보기 힘들었다. 문득 남편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집에서 세끼 밥을 같이 먹어야 하는 시부모님과 결혼한 것을 임을 깨달았다. 말씀이 없으신 시댁 분위기에 난 늘 채한 느낌이었다.

매일 똑같이 아침에 일어나 밥하고, 설거지하고, 모유수유를 하고, 청소를 한다. 또 점심밥 하고, 설거지하고, 모유수유를 하고, 아기 보고, 빨래하고, 갠다. 다시 저녁밥 하고, 설거지하고, 모유 수유하고, TV 보고, 집안 정리를 한다.

남편이 지쳐 퇴근을 하면 난 알 수 없는 분노로 말도 하기 싫었었다. 당시 난 정말 나 스스로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하루 종일 남편이 생각났는데 화를 내고 있는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좀비 같은 삶을 살 줄 알았다면 난 왜 결혼을 했는가 하는 질문이 생겼다. 독박 육아를 하는 사람에겐 누구라도 도움이 필요했다고 말할 테지만 난 단칸방이라도 낮에 아이와 둘이 있으면 알꽁달콩 살림하는 재미에 빠질 법도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 없는 시댁의 좁은 집 방한 칸에서 난 식모인지 파출부인지 모르는 삶으로 점점 지쳐갔다.

더 황당한 것은 막상 보따리도 싸도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에게 얘기해야 할지, 어디서 위로받을 수 있기는 한 것인 지였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 울 엄마도 그랬지 않았던가, 분명 이럴 줄 알고 스스로 들어온 것이 아니었던가! 판단 중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때는 참 막막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 우연히 옛날 짐을 정리하다 윌리엄 모리스에 관한 글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알게 된 것은 내가 폴리스의 삶을 살았던 대학 2학년 때였다. 근대 디자인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으로 교수님께 들었을 때 만해도 꼬장꼬장한 고집불통 노인네 같은 느낌이었다. 산업혁명이 되고 세상이 기계화되는데 혼자 ‘수공예 부흥운동’을 펼치다니 좀 황당했었다. 그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리포트를 위해 또는 시험에나 몇 자 적기 위해 외운 지식이 다였다.


그날 난 오랜만에 모유를 미리 짜서 냉장고에 넣고 시어머니께 아기를 부탁드리고 겨우 1시간 남짓의 외출을 했다. 먼저 서점에 가서 모리스의 책을 찾았다. 절판이었다. 다시 집 근처 도서관에 가서 책을 찾아보았다. 도서관 입구에서부터 상쾌한 책 냄새에 코끝이 찡해져 왔다. 갑자기 소원이 하나 생겼다. 하루라도 종일 천장 높은 도서관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육아와 집안일을 다 잊은 채 살아보고 싶다고. 이제 아기가 태어난 지 두 달 정도가 되는데 그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집으로 와 한쪽으로 아이를 안고 젖을 물리고, 한 손에 책을 들고 있는데 갑자기 기분이 참 좋아졌다. 뭔가를 나도 채우면서 주는 느낌이랄까... 아기가 엄마의 불편한 자세에 보채도 미안하지만 더 몰입이 되었다. 그리고 바로 산 후 삼칠일이 되던 날, 난 대학원 면접을 봤고 졸업 후 10년 만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다시 시작한 공부는 디자인이 아니라 역사였다. 윌리엄 모리스부터 시작하는 디자인의 역사도 다시 공부했다. 그러면서 만난 책, 영남대 법학교수인 박홍규 교수가 쓴 윌리엄 모리스 평전이었다. 미셀 푸코의‘감시와 처벌’,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등을 번역한 것으로도 유명한 이 시대의 비판적 지식인 박홍규 교수가 스스로 가장 닮고 싶다는 사람, 윌리엄 모리스의 삶은 이후 내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의 사상인‘생활사 회주의’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신념과, 의식적이며 사고하는 인간이라는 신념에 근거하고 있는 즉, 생활 모든 분야에서의 사회주의적 투쟁을 말한다. ‘삶과 아름다움의 의의를 인식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사회주의’ 이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것으로 ‘생활사 회주의’라 불리며 ‘예술은 인간 노동의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으로 모리스는 주장하였다.

19세기 서구의 남자로 폴리스의 삶을 영위하면서 그가 하는 주장은 오이코스식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라고 있었다. 당시 모리스는 이미 존재하는 수목에 주택을 조화시키는 노력, 거리 외관을 손상하는 야외광고 부착반대, 매연방지, 쾌적한 공기, 그리고 프라이버시가 보장, 청결한 공기와 일광의 공유가 없어서는 안 됨을, 세탁장, 부엌에 대해서도 명쾌한 편의가 있어야 하고 사적인 공간과 공적인 공간 마련하여 공적 공간이 각 가족이나 개인의 일상생활을 방해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모리스는 집과 가정을 중요시 하였으며 물질적 기초가 생의 리듬이며 예술차원으로 승화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의‘생활사회주의’야말로 폴리스적인 삶과 오이코스적인 삶을 균형 있게 병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나는 내가 전공한 디자인으로 사회를 치유의 역할을 조금은 할 수도 있지 않은가의 가능성을 보았다. 그동안 대한민국에서 디자인이란 늘 국부론적 입장이었다. 근대식, 서구화로 개량하고, 포장을 그럴듯하게 해서 잘 팔아보자는 새마을 운동 같은 의미였다. 나 역시도 디자인에 대한 생각은 자본주의에 철저하게 봉사하는 일이었고,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것이 날 늘 불편하게 하였다.

왜 내가 꼭 자본주의와 기업에 충성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인가 라는 문제는 디자이너로서의 나의 정체성에 늘 풀리지 않는 답답함이었다. 어쩌면 하루 3~4시간을 겨우 자면서 마감시간을 맞추기 위해 정신없는 디자이너로서의 삶이 정말 싫어서, 멀리 도망하고 싶어서 결혼을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떤 문제를 피해 도망은 더 큰 문제 즉, 하루하루를 먹고 살아 내야하는 오이코스의 삶을 내가 다 감당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고, 그나마 엄마가 해주시는 밥을 먹으면서 회사를 다녔던 것이 얼마나 편했던가를 절감하게 되었다. 도움 받을 사람 없는 외국에서의 오이코스의 삶은 고되었지만 어느 날 의, 식, 주, 그 어느 것 하나도 디자인이 아닌 것이 없더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폴리스의 삶이 아닌 오이코스의 삶은 디자인하는 삶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쩜 디자인은 폴리스로 이해되는 거대담론을 다루는‘정치’가 아니다 – 요즘 디자인으로 정치하는 자들은 참으로 디자인의 본질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 게다. 역시 무지하면 용감하다 – 윌리엄 모리스는 디자인이 오이코스의 삶이며 그것을 폴리스에서 사상으로 담론으로 펼쳐낸 사람이었다. 그에게 있어 ‘예술’은 일상생활에서 격리된 것이 아니라 ‘삶 자체’로서, 매일의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노동과 그 노동의 산물이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평범한 일상이 가치 있는 예술의 주제가 되고 예술의 대상이 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술인가 문화인가 이 문제가 나이프나 포크의 문제보다 우위에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술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폴리스와 오이코스에 대해 생각하면서 내가 디자인에서 멀리 떨어져서 하루하루 고된 일상을 살아내고 있을 때 만난 ‘윌리엄 모리스’의 기억으로 고구마 줄기처럼 생각이 연결되었다.




노동자 계급으로 디자이너는 생각하지 못한다. 아니 디자인뿐만 아니라 그 어떤 일도 분업화 파편화되어있는 현대 자본주의에서의 노동자는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게 만든다. 나에게 커리어 우먼에서 전업주부로의 삶의 전환은 수직 하락하는 고통을 주었다.

자유인의 삶에서 노예의 삶으로의 전락 뭐 그 비슷한 느낌. 그러나 결혼은 비로소 내가 나를 돌아보게 하는 사건이었고, 그 삶의 답답함으로 다시 공부 - 시작은 시집살이와 육아로부터 도피하기위해 선택한 공부이긴 했지만 - 하게 하는 원동력이었으며, 한국에서 말하는 자본주의의 꽃으로서의 디자인이 아닌 ‘삶과 일상 속에서 피어나는 예술’로서 디자인을 발견하게 하였다. 그 깨달음은 나아가 디자인이 먼저 여성에 의한 보살핌과 살림살이의 영역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그것이 바탕이 되어 제대로 된 정치, 폴리스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난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경계를 넘나들며 오늘도 공부중이다.

*이글은 2018년 3월 인문학공동체 '행왕'의 20주년 기념문집 『행왕』 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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