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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비평> 얼굴, 장소, 기억의 그래피즘

다큐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지혜나무 20181222


헤테로토피아로의 여행  


88세,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와 33세, 컨템퍼러리 공공 예술가 JR의 여행을 다루는 다큐 영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무려 55세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케미는 기대 이상이다.

영화의 원제는 불어로 ‘Visages, villages’이다. 영어로 하면 ‘Faces, Places’, 한국어로 하면 ‘얼굴과 장소들’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제목처럼 ‘얼굴과 장소’를 일상의 리얼리즘 그대로 보여주는 누벨바그의 공식을 따라간다. 그러나 원제와 다르게 한국에서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얼굴과 장소 대신 ‘바르다’와 ‘사랑하는’이 들어갔다. 영리한 번역 같다. 바르다?? 하고 검색하면 바로 "프랑스 누벨바그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나 올뿐 아니라 영화를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알만한 장 뤽 고다르가  바로 나오기 때문이다. 왠지 제목만으로도 꼭 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JR은 누굴까? 선글라스를 벗지 않고 이름도 이니셜뿐인 이 신비로운 젊은 예술가는 바로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는 사진작가’로 최근 주목받고 있는 프랑스 출신 반-익명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다. TED 프라이즈 수상자로 더 유명한 JR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감추어졌던 진실된 얼굴을 서로 보게 하는 인물사진 콜라주 프로젝트를 하면서 "세상을 예술로 뒤집자"라고 외친다.

이처럼 독특한 이력의 남녀가 우연이 아닌 ‘운명’으로 만났다. 이 영화 초반 내레이션을 통해서도 그들이 우연이 아닌 운명으로 만날 수밖에 없었음을 재치 있는 반복 화법으로 보여준다.

"놀라운 사진작가인 JR, 그는 비록 내 손주 뻘이지만 우리는 서로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도 나처럼 세계를 산책하며 낯선 얼굴들, 사람들을 발견해내는 데 지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_  바르다

사실 88세 할머니와 33세 청년이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있을까? 남녀가 다르고, 살아낸 시대가 다르고, 사는 공간이 다르다. 예술가가 아니었다면 아예 서로 만날 수 없었을 것 같다. 영화감독 이전에 사진작가이기도 했던 바르다와 현직 사진작가인 JR의 만남이라서 일까? 아니면 그들의 예술적 시도가 닮아서일까? 영화 속에서 두 남녀는 이미 오랜 친구처럼 자연스럽다.

프랑스에서 누벨바그 영화는 일상의 리얼리즘에 주목하면서 거대 담론이나 스펙터클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것들 사람들의 소소한 삶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려는 시도였다. JR의 사진 퍼포먼스 역시 소외된 곳에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건물의 벽 전체에 공공전시를 함으로 미쳐보지 못했던 것을 의도적으로 보게 만드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렇게 나이와 성별, 시대를 초월해서라도 같은 길을 가는, 결이 같은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은 길 위에서 운명처럼 만날 수 있었다. 두 남녀는 그렇게 만나서 포토 트럭을 타고 여행을 떠난다.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그 사람들의 표정을 관찰해 그 사람들의 얼굴과 삶의 터전을 카메라로 찍고, 그 자리에서 5초 만에 슈퍼그래픽 사이즈로 프린트가 되는 과정은 마치 ‘마술쇼’를 보는 것 같다.

이들의 관계와 협업의 결과물은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고 확장되고 강화되는 데리다(Jacques Derrida)식으로 ‘대리 보충(supplément)’이다. 구술된 경험, 증언, 기억 속 이야기와 같은 '청각 세계’를 공공미술이자 거리의 그래피티 같은 구체적 이미지인 ‘시각 세계’로 서로 보완, 확장, 강화되기 때문이다. 두 예술가에 의해 선택받은 건물이 출력한 프린트로 뒤덮어지면 정말 마법처럼 새로운 활력이 생겨나 금세 폐허가 된 마을에 사람이 모이고 잔치가 열리고 버려진 공간은 특별한 공간으로 바뀐다. 비록 한시적이지만 이곳은 미셸 푸코가 말하는 바로 ‘장소’로서 존재하는 유토피아(utopia),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가 된다.


사라지는 장소가 기억 이미지를 부른다


한국어 영화 제목인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라는 제목에서 장소는 드러나지 않지만 영화의 원제인 얼굴과 장소(Faces, Places)인 것처럼 이영화에서는 얼굴만큼이나 장소가 중요하다. 일종의 로드 무비인 이 영화에서 ‘장소’의 의미는 간과할 수 없다. 우연처럼 맘 가는 대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 사실 가야 할 장소는 이미 정해져 있다. 폐광촌 마을의 마지막 생존자, 오랫동안 근무한 카페의 웨이트리스, 8백 헥타르의 농장을 홀로 경작하는 외로운 농장주인, 샤토 아르누 생토방 지역의 공장 노동자들, 뿔을 자르지 않고 생태적으로 키우는 염소 목장주인, 폐허가 된 재개발지역, 르아브르 항구의 여성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우연히 간 것처럼 보이는 그 장소들은 이들에게 복원되기를 기다리는 정확한 목적지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미 과거에 바르다의 영화 촬영 지였거나 루브르처럼 그곳에서 예술사를 공부한 그녀의 추억의 장소들이다. 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잊히거나 사라질 곳들이다. 물론 바르다의 말처럼 가는 곳마다 예기치 못한 ‘우연은 위대한 조력자’가 되어서 그 장소는 운명처럼 기억되는 장소가 된다.

결국 잊혔거나 소외됐거나 버려진 것을 다시 되돌리기 위한 "행위로써의 그래피즘"은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그 장소는 ‘기억의 이미지’가 되어 각각의 장소에 새로운 이야기를 만난다. 그 장소에서 일어나는 사람들과의 스침과 만남의 순간은 원래 있었던 일상처럼 대수롭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두 예술가는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순간을 포착해서 예술로 승화되고, 그렇게 시골 마을의 카페 종업원, 농장주와 목장주, 우체부, 부두 노동자의 부인들과 공장 노동자들은 평범에서 특별한 존재로 바뀌게 된다.

특히 폐광촌에 가장 마지막에 남은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는 뭉클하다. 바르다와 JR은 곧 없어질 폐광촌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하고 배려가 표정이 예술이 되어 자신의 집의 파사드에 투사된다. 덤덤했던 집주인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한다. 그 장소를 살아낸 사람에 대한 감사와 평범한 소시민을 찾아갔다고 말하기엔 그들은 점점 사라져 가는 존재다.

마치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말하는 형태가 훼손된 사물들에서 보이는 ‘비정형(informe/formless)’이나 바흐친(Mikhail Bakhtin)의 ‘이 세상 어느 것도 흔적 없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에 따르면 잊혀진 기억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자신의 몸속 어딘가에 쌓여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은 또렷하지 않더라도 내 안 존재하면서 언제라도 유령처럼 출몰한다. 마치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가 말하는 ‘비체'(the abject)’와 같다.

사회 안에서 역할을 잘하고 있을 때는 보이지 않다가 그 쓸모를 다했거나 유효시간이 지나서 버려진 것은 혐오의 대상으로 변한다. 사람이 떠난 시골마을이나 재개발지역은 그 사회의 비체에 해당된다. '비정형'이든 '흔적'이든 '비체'와 같은 개념어는 버려진 것이나 잊혀진것들이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되고 의미와 가치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이고 미학적인 근거를 마련해 준다.

이 시대의 예술가답게 바르다와 JR의 작업은 ‘소외되거나 스러져가는 존재’에 주목한다. 사실 이러한 시도는 현대미술에서나 공공디자인, 사회적 디자인 프로젝트라는 라는 이름으로 최근 유행이라고 할 정도로 익숙한 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실존적 인본주의는 어쩌면 90세를 바라보는 바르다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죽음을 직시하고 ‘스러져가는 것에 대한 애잔함’에서 출발해서 프랑스 전역을 갤러리로 만드는 그들의 콜라보 벽화 프로젝트는 숭고함까지 느껴진다.


행위의 그래피즘으로서 벽화


작품은 전시장이 아닌 세상 속에서 거대한 ‘벽화’로 표현된다. 벽화는 두 예술가의 매개이자 이 영화를 보는 관객과 영화의 매개가 된다. 폐허 속에 피어난 이들의 작품을 보면 인류 시원의 동굴벽화가 떠오른다. 동굴벽화는 인류 최초의 예술, 선사시대의 인류와 오늘날의 인류의 공통적인 행위이자, 지구 어디에 살던지 인류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의 경험이다. 이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인물과 대상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느낄법한 공통의 경험을 담아낸다. 물론 원시 동굴벽화가 그 긴 시간 동안 남아있는 것에 반해종이에 프린트된 이들의 벽화는 짧은 제작기간만큼이나 금방 사라진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의 고고학자이자 인류학자 르루아-구랑(André Leroi-Gourhan)은 동굴벽화에 남겨진 흔적, 자국, 발자취, 리듬, 무의식에 각인된 기억의 찌꺼기 같은 것들을 일종의 문자이자 이미지를 '그래피즘(graphisme)'이라 명명했다. 존재가 없어지고 난 자리의 이미지가 흔적과 자국으로 기억하기 위한 ‘행위’로 남겨진 것이 바로 그래피즘이다. 따라서 그래피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행위'다.

바르다와 JR이 만들어낸 사진 벽화는 잊혀가는 얼굴과 일상을 대형 벽화로 만들어 기억하게 하는 ‘행위’이다. 그들의 그래피즘은 벽화를 제작하는 '행위'를 통해 대상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낸다. 베르나르 스티글러(Bernard Stiegler)의 말처럼 ‘기억은 머릿속에 없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내재되어 있다가 원인이 있으면 어느 상황에서 촉발되는 것’이다. 그렇게 벽화가 붙여진 장소는 그 어디에도 없는 특별한 곳으로 두 예술가가 촉발한 대리 보충의 그래피즘(벽화)가 되고, 영화는 두 예술가가 이야기를 듣고 벽화를 만들어 내는 전 과정과 행위 자체를 기록하는 또 하나의 그래피즘(다큐)이 된다.  

JR의 깜짝 선물, 흐릿한 바르다의 눈과 아픈 발은 이제 더 넓은 세상으로.

나이가 들어 눈이 흐릿한 바르다와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두 사람은 일반적인 장면을 선명하게 보지 못하는 대신 그들 눈에는 소외된 것, 버려진 것, 살아있는 것들이지만 오히려 이 두 예술가들에게 복원되어 또렷하게 보는 것으로 바로 이 사회가 꼭 보아야 할 대상들이다.

영화의 말미에 고다르가 만나주지 않은 서운함으로 안 그래도 흐릿한 바르다의 눈에 눈물이 고이면서 블러(blur) 처리가 되는 화면이 나타난다. 초점이 맞춰지지 않는 화면을 보면서 관객 역시 같이 흐릿한 바르다의 시선은 관객의 시선이 되어 먹먹한 공감대를 형성한다. 이때 선물처럼 선글라스를 벗는 JR 덕분에 바르다도 관객도 시야가 선명해지고 함께 웃게 된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오랫동안 잔상으로 가슴에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서라도 살면서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을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소환시키는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_지혜나무 20181222




* 이 글은 2020 autumn Vol.16_랩 타임스 LAB TIMES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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