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나에게.
나아지는 거 같던 우울증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서였다.
나는 어릴 때 늘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이혼한 가정으로 인해 보육원에서 살게 되었다. 보육원에 살면서도 친가 쪽이 나의 보호자였기에 계속해서 아빠를 만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괴물이라고 생각했고, 늘 얼굴이 터져라 고함치고 화내는 아빠가 내 부모라는 게 끔찍했다. 저 괴물로부터 동생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끊임없이 하며 혐오를 키워왔다.
키가 자라고 머리가 클수록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아빠 만나기를 피했다. 그러다 서운함이 터진 아빠와 전화로 대판 싸웠다. 늘 무서워서 순응하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아빠에게 소리를 질러댔다.
“아빠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게 뭐가 있는데? 내가 왕따 당한 것도 자해한 것도 죽고 싶어서 자살시도한 것도 아빠는 모르잖아!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아빠 말만 들어주길 바라는데? 아빠는 제대로 아빠노릇 한 적 있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처음으로 엉엉 우는 아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 이후로 연락하지 않았다. 저런 사람과는 연을 끊어도 미련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1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고, 아빠가 자살했다. 고모 말로는 혼자서 앉은 채로 죽었다고 했다. 어떻게 죽었는지도 어떤 상태였는지도 모르게 그저 미안하다는 말이 잔뜩 적힌 유서만 달랑 쥐어졌다. 문득 아빠를 비난하던 나의 모습이 생각나며 눈물이 줄줄 흘렀다. 아빠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해도 생각나는 게 없었다. 나도 아빠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내가 아빠를 죽음으로 떠밀어버린 거 같아 죄책감에 잠을 못 이루었다.
장녀라는 이유로 유골함을 들고 산을 올라가면서도 아빠가 너무 가볍다는 생각을 하며 계속 울었다. 흙을 파면서도, 덮으면서도, 산을 내려가면서도 울었다. 아빠의 자살을 쉬쉬하는 가족들에 떠밀려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그저 묻어주는 게 전부였다.
그래서 죽고 싶었다. 아빠에게 너무 부끄러웠다. 마지막까지 아빠의 아픈 손가락이 된 게 부끄러웠다. 편안해지고자 죽은 아빠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럼 나도 죽어야겠다. 나도 편안해질 수 있겠지.
자살충동을 견디다 못해 응급실에 갔고, 정신과 안정병동(폐쇄병동)에 입원해 주치의 선생님과 아빠를 애도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내가 자살 유가족이라고 하셨다. 믿기지 않았다. 나는 아빠의 죽음을 직접 마주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자살 유가족이라고 하더라.
“마음에 묻어두고 좋은 추억을 간직하며 기억하는 것만 해도 잘하고 있는 거예요”
주치의 선생님이 나를 위로하며 말씀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의 애도반응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조금 마음이 수그러들었다. 그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구나.
잘 애도하는 법은 아직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아빠를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죽은 아빠는 내 안에 살아 숨 쉰다. 떠난 가족을 잊지 않고 좋은 기억들을 추억하는 것이 아빠를 향한 애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아빠를 추억한다.
그리고 이제야 아빠를 사랑하게 되었다. 밉고 못된 아빠의 모습은 다 보내줄게. 서투르게 우리를 사랑하던 아빠의 모습만 남겨둘게. 그곳에서는 편히 쉬길 바라. 아빠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