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우리 자매를 친할머니댁에 두고 내리막을 뛰어내려 갔다. 쫓아가라던 할머니의 고함도, 미친 듯이 달리던 엄마와 이모의 뒷모습도, 평생 만날 수 없을 거란 두려움에 두 사람을 따라 뛰어내려 가던 내게 "이렇게 쫓아오면 평생 안 볼 줄 알아!" 하며 처음 보는 매서운 눈초리로 따라오지 말라 하던 엄마도. 이래도 저래도 평생 못 볼 거 같아서 자리에 우뚝 서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우리를 차에 태워 이동하는 동안 계속해서 내게 하신 말씀이 있다.
"이제 동생은 네 책임이니까 잘 돌봐야 해. 그리고 엄마가 두고 가는 거 버리는 게 아니야. 따라오지 않아야 다시 만날 수 있어."
나는 겨우 초등학교 2학년을 시작하는 시기 었는데, 졸지에 소녀가장이 된 것처럼 많은 임무를 부여받았다. 버리는 게 아니라는 말이 왜 핑계처럼 들렸을까? 본인 마음 편하자고 내뱉은 말 같았다. 졸지에 시골 작은 동네에서 살게 된 나는 초등학교도 급하게 가까운 곳으로 전학하게 되었고, (여태 사귄 친구들이랑 인사할 시간도 없었다.) 아빠가 친가에서 살게 된 이후로는 거의 매일 가정폭력을 당했다.
학교에 다녀와서 피곤할 때에도 무언가에 심기가 뒤틀린 아빠가 나가라고 한 마디 하면 신발도 못 신고 내리막을 달리던 나와 동생이 선명하다. 겁에 질려 아스팔트를 달렸다. 꼭 엄마가 우리를 두고 도망치듯 떠난 것 마냥, 아무리 아파도 무작정 발이 닿는 대로 뛰어야 했다. 잡히면 팔아넘기겠다며 협박하던 아빠를 피해서. 엄마가 왜 그렇게나 허겁지겁 길을 내려갔는지 조금은 알 거 같았다. 나를 피해 달렸겠지. 내가 잡으면 마음이 약해질 테니까.
엄마에게 향하던 폭력이 나를 향하게 된 것도, 동생이 삶의 이유가 된 것도 이 시기의 영향이 크다. 부모자식은 절대 떨어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쉽게 끊어져버린 연락은 다시 관계를 돌이키고 싶지 않게 만들었다. 물론 엄마가 우리를 떠올리며 열심히 견뎌온 시간들을 이해하지만, 과연 아빠와 함께 사는 우리가 안전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현재는 엄마와 연락을 자주 하고 있다. 그러나 그뿐이다. 엄마에게 정을 붙이거나 크게 탓하지 않았다. 그냥 낳아준 엄마. 나를 버리고 간 엄마. 그리고 뒤늦게 딸들이 딸 노릇을 하길 원하는 엄마. 점점 내가 아는 엄마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화가 나고 펄쩍 뛰었던 말을 골라보라면
"딸들이 커서 여행도 같이 가고 놀러도 가고 하면 좋겠네~"
당연히 우리가 효도할 거라 생각하던 엄마의 생각. 다른 집 애들은 딸이 여기저기 데리고 가는데 우리도 그렇게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화가 났지만. 엄마를 용서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미웠고, 노후연금으로 우리를 낳은 거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제대로 키우지도 않았는데 조금 못돼게 이야기하자면 내가 엄마의 말 하나하나 좋게 생각할 이유가 있나? 싶었다.
나는 아빠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엄마와도 연락을 끊었을 거라 생각한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또 엄마가 이 글을 잃지 않길 바라지만... 너무 밉고 원망했던 엄마와 강제로 떼어지던 순간은 나에게 큰 이별의 순간으로 남아있다. 세상의 모든 이별을 두려워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