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라라 Oct 29. 2023

방랑하는 예술가





골콩드 Golconde / 르네 마그리트 / 1953


르네 마그리트가 사용한 기법인 '데페이즈망[ dépaysement ]' 은 전치(轉置), 전위법이라는 뜻이다.

본래는 '나라나 정든 고장을 떠나는 것'을 의미 하는데 초현실주의 에서는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어 의외의 장소나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놓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낯선 장면을 보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게 해 준다. 초현실주의에 의하면 이런 그림을 봄으로써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 시킬 수 있다고 한다. 

이러한 낯선 경험, 생각의 이탈, 무의식 세계에서의 해방을 철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방랑하는 예술가 론에서 찾아 보고자 한다. 


"아이러니스트의 마투라나의 방랑하는 예술가론"을 읽으면서 우리 인간은 운명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에 많이 공감했다.

어쩜 운명이 정해 져 있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은 우리의 삶을 절대 변화 할 수 없는 삶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의 불안으로 인해 운명을 점쳐 보기도 하고, 두려운 미래에 대해서 좀더 좋은 예언을 듣거나, 나쁜 예언을 듣는 다면 조심하려 하면서 불안함을 달래곤한다. 이것을 나쁘다고만 볼 수는 없지만, 우리는 태어난건 우리의 선택과 관계없이 운명적으로 태어 났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개척하면서 살았을때,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삶에는 저마다 의미가 있다.


예술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이 둘은 고정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변화 하는 특징이 있다. 그 작가가 살아온 삶, 겪었던 일, 환경, 사건, 만났던 사람들 등을 통하여 변화고 진화하고 계속 표류하게 되어 있다. 마투라나가 말하는 방랑하는 예술가 처럼 말이다.


저마다 격전의 삶의 현장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너무 안락한 삶만을 추구 하며 살면 인간 성숙이 이루어 지지 않는다. 격전의 삶에선 어떤 매뉴얼도, 가장 정확한 답도 없다. 그냥 개인이 걸어온 삶 자체가 결과고, 그렇게 된것이 결과가 된다. 또한 그 누구도 앞으로의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미리 결과를 알 수도 없다. 개인적으로 후회하지 않고,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을지라도 최선을 다 했다면 그게 답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삶도 평가 하고 어떻다 이야기 하는것도 오만이다. 그 격전의 삶에서 얻은 것은 의외로 많다. 내 삶이 망했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것들을 깨닫게 되고, 깊은 바다 속을 손으로 터치 하고 다시 물위로 나온 그런 거랑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냥 그 깊은 바닷속을 보고 나오게 된다. 유난히 시컴한 바닷속의 풍경들... 그곳에 살고 있는 생물체들...

남이 보지 못한것들을 보면서, 그러면서 깨닫게 된것들, 보게 된것들, 다른 이면들을 알게 된다. 

똑같은 인생은 단 하나도 없다는걸 말이다.


위기는 사람으로 하여금 본성을 깨우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본래 살고자 하는 살아 내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에너지가 있다. 위기는 자신에게 있는 그동안 몰랐던 잠재력, 생존본능, 평소에는 발휘하고 살지 못했던 능력같은 것들을 일깨워준다. 

학생들에게도 공부나 수행능력을 붇돋아 주기 위해서 자극이 필요한데, 그것이 동기 이다. 왜 내가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동기가 있어야 하게 된다. 동기가 없이는 내가 현재 하고 있는 일들이 무의미 할 뿐이다. 이렇듯, 위기는 어떤 일을 하게 함에 있어 동기가 되어 준다.

위기로 인하여 무너지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를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앞으로 나아가는데 큰 힘이 되어주고 뒤에서 나를 밀어주는 역할을 한다.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사진출처 : 핀터레스트

다문화 사회를 위해 필요한 자세도 마투라나의 방랑하는 예술가론과 통한다. 구조 접속은 내가 사회와, 삶과, 경험과 상호작용을 통해 계속 변화 되고 진화 한다는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타인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며 타인의 입장또한 나와 다른것일 뿐 배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문화 사회는 이러한 타인 수용, 이해, 인정을 필요로 한다. 사실 나와 다른 남의 삶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겪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해 하고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만으로,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열린 사고만 가져도 우리는 조화로운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가 있다. 우리는 서로 독립된 존재 이지만, 서로 의존하고, 기대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다. 


무언가 경험을 통해 격전을 삶을 살고난 후에는 절대 과거와 같이 살지 아니하겠다는 반성, 나만의 기준이나, 신념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마투라나가 말하는 앎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아가 삶의 지혜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주체성이 될 수도 있다. 그렇고 아니고가 확실해 진다. 그렇기 때문에 앎을 알기 이전과 다르게 행동해야만 다시는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게 된다. 함부로 행동하지 않게 된다. 전후 좌우 맥락을 생각하게 된다. 나의 레이다 망이 여러개가 된다. 나는 혹시 내가 어린애 같진 않은지,  유치하진 않은지, 멍청하진 않은지, 어리석진 않은지 계속 점검 한다. 왜냐하면 방랑하는 예술가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유영만 / 아이러니스트 / EBSBOOKS / 202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