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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Nov 02. 2020

소녀다움의 분홍이냐 순수의 파랑이냐

핑크 질로 폭주하는 6살 난 딸을 봐야 하는 엄마의 애통한 마음 


분홍에 대한 적개심을 어떻게 숨길 것인가. 6살이 되더니 급격히 친분홍파로 내달리고 있는 딸내미의 폭주를 감당할 때마다 "그렇게 반복적이고 확고하게 여자아이의 정체성을 외모에 고착시키는 색깔을 추구하고 싶니?"라고 진지하게 묻고 싶다.


분홍색은 소녀 시절을 기억하는 의미가 있고 그저 여러 색깔 중의 하나일 뿐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 나의 불편함은 그냥 과민한 반응일 뿐이고, 그래서 딸이 "엄마가 '핑크 질' 그만 하래"라며 거친 엄마를 둔 슬픔을 주위에 하소연하는 상황까지는 불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배울 만큼 배운' 부모들이 자녀의 분홍 폭주에 대해 너그러운 현실의 상황은 1980년대의 경직된 페미니즘이 끝난 증거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이제 여자아이에 대한 속박과 장벽은 사라졌고, 분홍 선호는 자연스러운 욕구의 발현일 뿐이라고 말이다.(마지막 문장은 좀 심각한데, 이 경우 그 많은 소녀들의 분홍 선호를 설명하는 건 생물학적인 것으로 다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중생, 여고생, 여대생, 여성 직장인으로 '여성의~' 한계 짓기가 취미인 세상을 차근차근 밟아 온 내 입장에서는 이 작은 아이가 벌써부터 그런 편견에 묶이는 걸 용납할 수가 없다. 엄마의 자장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널리고 널린 게 속박과 편견인데(나조차도 물론 자유롭지 않다), 나라도 분홍에 적대적인 존재로 기능해야 하지 않겠는가. 


'소녀다움=분홍'이라는 공식은 20세기 중반 이후에야 탄생한 개념이다. 실제로 세탁기가 나오기 전에는 남녀 아이들이 실용적인 관점에서 밝은 색의 옷을 입었다. 심지어 분홍색은 남성적인 색깔이었는데, 강인함을 상징하는 빨간색의 파스텔톤 버전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파란색은? 성모 마리아와 정절 등 순결의 이미지와 연관된 색이었다. 초기 디즈니 공주인 신데렐라의 드레스가 파란색인 이유도 여기 있는 듯하다. 파란색도 함께 싫어진다. 


분홍색과 파란색이 각각 남녀 아이들의 상징색을 넘어서 그런 성향이 DNA에 입력된 듯이 여겨지기 시작한 때는 무려 1980년대, 그것도 중반 이후다. 상황이 바뀐 것이 문명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느냐, 만약 그렇다면 인정할 만한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저 연령과 성별의 차이를 극대화해 시장을 공략하려는 마케팅 전략의 글로벌한 결과일 뿐이다. 


무채색 옷만 입는 예민한 엄마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음, 메릴랜드대 미국학 부교수인 조 파올레티 연구에 따르면~"하면서 분홍의 역사에 대해 줄줄이 읊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분홍에 대한 적개심 때문에 다른 색으로 호기심을 돌린답시고, 한 때는 '순결의 색'인 파랑을 권하기도 애매하다. 그래서 좋아하는 색을 묻는 딸에게(엄마의 인정을 원하는 스타일임) 일종의 회피적 답안인 "무지개색~"이라고 대답하고 있는 게 나의 곤궁한 현실이다.


분홍에 여전히 반대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분홍색 옷을 입고 자신의 외모에 취한 듯한 포즈로 거울 앞에 선 딸내미를 볼 때마다 밀려오는 답답함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외모가 어느 정도 자신감과 관계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외모로만 이뤄진 정체성을 갖고 사는 것은, 보는 순간 가슴을 찔린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수준의 미모를 갖춘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넌 아니야 딸내미야. 그래서 방점을 항상 앞에 둔다. "엄/마/가/ 봤/을/ 땐,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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