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소 모자란 동시에 전형적인 문과생이다. 그럼에도 사이언스픽션(SF) 류의 영화와 소설을 좋아한다. 현존하는 과학의 극한을 넘어 인간의 상상력을 초인간적으로 펼쳐 보이는 SF 장르는, 문과생에게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극도로 진보한 과학은 마법과도 같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마법은 왠지 이과생 보다는 문과생에게 더 친숙한 영역이고, 그래서 SF장르는 문과생들로부터 환영받는다.(이상한 인과이지만, 문송이 여러분! 설득되지 않습니까?)
아이가 생기면서 SF에서 인상을 받는 부분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는데, 예를 들면 테드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자신과 딸의 운명을 인식하는 몇몇 장면들이 외계인의 기술?보다 기억에 더 남는 식이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은 외계인의 언어를 익힌 뒤 그들의 비선형적 인식 체계를 얻는다. 시간의 흐름대로 상황을 차례대로 '겪는 게' 아니라 '벌어질 일'까지 시간의 흐름 전체를 한꺼번에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남편과 이혼하고 그의 딸이 사고로 죽는 사건까지를 온전히 인식했음에도 왜 그 미래를 바꾸려 하지 않는지, 시간관의 변화에 따른 주인공의 선택에 대해, 소설은 페르마의 최단 시간의 원리 등으로 설명을 한다.(솔직히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네이년 등의 검색포털을 이용해야 했다)고대 희극에서부터 봐왔던 '저항하는 인간' 대신 순순히 운명을 받아들이는 주인공의 인식(하는 방식) 변화는, 딸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함께 겪는 모든 시간들을 소중하게 만든다. 그래, 딸과의 경험. 다시 오지 않을 시간과 사건들. 소중하다고만 표현하기엔 부족한 어떤 여정들.
오늘은 박자에 대해 공부한 딸이 나에게 강약 중강약 거리며 한참을 설명하는데, 갑자기 울컥했다. 마침 최근에 프로젝트 헤일메리라는 SF소설을 막 읽은 터라 그간 관련 영화와 책에서 얻은 감성들이 왕성하게 활동한 탓도 있다. 순간, 테드창 소설의 주인공처럼 설하의 모습이 한꺼번에 보였다. 엄마에게 인정받기를 즐기는 이 작고 귀여운 아이가 피아노 페달을 밟을 수 있을 정도로 길어진 모습, 나와 비슷한 얼굴을 한 여성이 되어 그럴 듯하게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머리카락까지 보인다), 지구에서 사라진 나를 기억하며 창 밖을 보는 더 늙은 설하까지. 나의 사랑, 나의 운명, 그 어떤 저항도 없이 사랑할 나의 설하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