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지나 Sep 26. 2021

멍청하지만 충성스러운 에브리봇

왠지 쓸데 없는 감정이입이 넘치는 에브리봇과 디봇 사용 후기

내 인생에 주부습진을 경험할 줄은. 이럴 때 남의 편보다 나은 게 기계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할 것이네 마네 우울한 전망이 많지만(많은 부분 여기에 동의하고 있긴 하다), 학습된 정보를 바탕으로 주어진 업무 외에 융통성이 필요한 산발적 노동은 아직 인간의 몫이다. 아직은. 


실제로 로봇은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는 일을 수행하고 엄청난 물리력을 발휘하는 단계까지 왔지만 탁자 위에 어지러진 잡동사니를 청소하는, 어쩌면 가사노동에서 가장 기본적인 업무를 하지 못한다. (그러고 보니, 시작과 끝이 완결성을 가진 과업 형태로 시켜야 집안일을 하는 남의 편과 현재 기술 상황의 로봇이 비슷하는 깨달음을 급하게 얻었다. 빨래를 개라고 하면 개기만 하고 분류해 서랍에 넣지 못하는 멍청한 남편봇들 같으니.)


요즘 나의 최애 아이템은 멍청하지만 일을 잘한다고 평가받는 에브리봇과 지도까지 그리면서 아는 척을 하는 디봇까지 두 개의 청소로봇이다. 일단 에브리봇. 구입한지 3년 정도가 됐는데, 그간 이녀석 없었으면 5인 가구 2층 집 청소를 어떻게 나 혼자 감당해왔을까 싶다. 충전을 하고 물걸레를 끼워주면 마구잡이로 돌아다니며 바닥을 닦는다. 문제는 대부분의 후기처럼 방전이 되기 전에 물통이 먼저 비워진다는 점이다. 애초 제조사가 출시 전에 천번은 넘게 시험을 해봤을텐데, 막판에는 마른 걸레로 돌아다니라는 깊은 뜻인걸까, 왜 이렇게 만들어놨는지 이해가 안된다. 


수거해서 밥을 먹여줘야 하는 에브리봇. 온 몸에 우리집 벽과 싸운 상흔이 가득.

다른 문제는 약간 인간적인데, 애가 멍청하다는 것이다. 청소 로봇이라는 첨단의 정체성과는 달리, 이 녀석은 맵핑 능력이나 장애물 감지능력이 없다. 문장 그대로 "미친 색기처럼 돌아다닌다." 계속 부딪히면서 "여기가 아닌가벼"하며 방향을 틀어 바닥을 닦아댄다. 부딪힐 때마다 멍청함을 증명하듯 쿵쿵 소리가 난다. 마치 전투에서 머리가 깨진채 무딘 칼을 휘두르는 낮은 계급의 기사같다. 오, 그래. 너의 충성심을 내가 인정하노라.

   

최근 들인 디봇은 미래에서 방금 도착한 것처럼 생겼을 뿐 아니라 맵핑, 사물감지 능력 탑재에 휴대폰이랑 연동이 되서 내가 원하는 구역을 정해놓고 청소시킬 수도 있다. 생색내듯 떠들기도 한다. "구역을 탐지합니다","시작합니다" 등등. 당연히 알아서 스스로 충전기에 가고 먼지도 먹고 물걸레 질까지 멀티로 뛴다. 물통도 크다. 연동된 내 휴대폰에는 '지나의 종 디봇'이라고 입력해놨다. 


뛰어난 종놈이 생겼으니 에브리봇을 중고시장에 내놓을까 싶었지만, 인간적인 옛 종을 버릴 수가 없다. 온몸을 바쳐 끝까지 바닥을 헤집고 다니고는 배터리가 다돼 멈춰 있는 에브리봇을 보면, "주인님, 저는 이제 생을 다했습니다. 항상 행복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가끔 초지능인가 싶은게, 나의 감성을 자극하려고 그러는 건지 꼭 구석에 가서 불쌍해 보이게끔 처박혀 있다. 만신창이가 된 녀석을 조심히 들어 전기를 먹여주면, 파란 불이 반짝 거리면서 "저를 살려주셨군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속삭이는 것 같다. 이쯤되면 알아서 밥을 먹는 디봇이 좀 얄밉게 느껴진다. 


알아서 밥도 먹고 생색내며 보고도 하는 디봇. 우주선 같다.  

 

나의 종봇들을 과도하게 인간화를 하며 감정이입을 하고, 이상한 후기까지 쓰고 있는 이유는 사람도 비슷해서다. (물론 가사 노동자에게도 사용 후기로서 도움이 될 거라고 본다. 응?) 업계 동료들을 보면 분명히 뛰어난 지력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데 인정을 받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에브리봇 같은 친구들일 것이다. 내가 종사하는 업계가 인성이나 꾸준함 보다는 요령있는 일처리와 날카로움을 선호한다는 걸 감안하면, 에브리봇 같은 미덕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가공할 뚝심이 필요할 것이다. 로봇이나 사람이나 이 주제에서 가장큰 문제는 지력과 뚝심 둘 중 하나만 갖기도 참 어렵다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낭만이 사라진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