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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Apr 17. 2022

아무도 모르게, 당사자만 투쟁하라

정유라 사태 당시 이대시위와 전장연 집회 방식 논란이 겹쳐 보이는 이유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하던 때, 이화여대 학생들이 정유라 입학에 문제를 제기하며 본관을 점거한 일이 있었다. 당시 주목받았던 것은 아이돌 노래를 부르고 (보통은 쑥쓰럽기 마련인) 교수들의 석사 논문을 읽어 제끼는 운동 방식이었다. 다들 그들의 신선한 저항 방식에 즐거워할 때, 나는 '오직 이대 학생만 참여 가능'했던 집회 참여 원칙에 눈길이 갔다. 왜 이대학생만? 그게 단순히 이대 학생들만의 일인가? 왜 그들의 저항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차단하지? 이 괴이한 순수성 추구는 뭔가. 


최근 논란이 됐던 전장연의 시위 방식을 두고 국민의힘 이준석 대표와 전장연 측이 벌였던 공방을 보면서도 이대 집회 당시 느꼈던 불편함이 다시 느껴졌다. 출퇴근을 하는 '일반 시민'들이 지하철이 제때 출발하지 못해 곤란을 겪지 않게끔, 그러니까 그 누구도 불편하지 않을 의견 개진 방식이어야 한다고? 이해관계자들만 알게끔 '순수하게' 문제제기 하는 방식이 대체 뭐지? 법과 제도를 만드는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종이 민원을 하면 되는 건가?


갈등을 공적 영역에서 사회구성원들이 함께 논의하는 시도 혹은 함께 논의해 달라고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왜이렇게 부정당하는 건지 이해가 안된다. 아니, 화가 난다.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공론화하고 사회화할 것인가. 그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순수한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함께 목소리를 낼 수 없는가. 당사자들이 주위에 '이런 문제가 있다'고 제기하는 시도들은 타인에게 그 어떤 영향도 없이 발신돼야 하는가. 


우리 사회의 구성원, 그 중 약자가 겪는 어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논란과 갈등을 정치로 작동시키려면, 갈등의 당사자 외에 소위 구경꾼으로 분류되는 제3자의 참여가 전제돼야 한다. 공론화가 가능한 범위를 확대하고 그 갈등에 사회적 관심이 쏠려 사람들의 개입을 최대화함으로써, 사적 영역에서 취약했던 약자들이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전장연은 참으로 오랫동안 이동권을 비롯한 장애인 권리에 대해 투쟁을 벌여왔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공적영역에 진입하지 못했다. 비로소 그들만의 세상, 사적영역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건 '일반 시민들이 불편한' 지하철 지연 집회 덕분이었다!


나는 집회나 파업 때마다 '외부 세력' 운운하는 주장, '무고한 시민들의 피해'라는 논리가 공공연히 돌아다니는 지금 상황이 굉장히 퇴행적이라 생각한다. 그나마 온건한 측에서 한다는 말이, 전장연에게 "당신들의 주장은 맞다. 그러나 시민들이 불편을 겪지 않는 집회 방식을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에게 민주주의란, 정치란 무엇인가. 이 사회의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블록에 갖혀서 아무런 영향도 주고 받지 않고 잘 처먹고 잘 싸면 그만인 게 민주주의고, 각자의 블록을 '뺏기지 않도록' 굳건하게 지켜주는 게 정치인가. 

 

'절반의 인민주권'이라는 고전이 있다. 민주주의가 올바로 작동하려면, '갈등의 사회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 저자 샤츠슈나이더의 생각이다.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위에는 실제 주권 실현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이 어떻게 이 어려움을 극복하느냐. 약자들은 갈등을 사회화시켜 이 어려움을 극복할 기회를 얻고자 한다. 현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비장애인에 비해 장애인은, 자본가에 비해 노동자는, 정규직에 비해 비정규직 노동자는 불평등이 실제한다는 것을 절절하게 체감한다. 분명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정치체를 유지하고 있음에도, 이들의 침해받은 주권을 구원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들 약자들은 처한 조건에 대해 "이거, 문제아닙니까"라며 공론화하고, 이 갈등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켜 지지자를 확보해 상황을 개선, 주권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다시, 갈등의 사회화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같은 노동을 하는 정규직 노동자와 같은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하며 파업을 하는 것은 특정 기업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공적인 일, 사회의 이슈가 되는 것이다. 운동의 순수함과 고립을 당연하다는 듯 요구하고, 약자들의 집회나 시위에 내 작은 편의가 침해당했다고 분노하고 (심지어 자신도 약자면서!), 이걸 또 공개적인 쌈질 정도로 소비하며 떠들어야 하는 내 처지가 진정 화가 난다. 이게 다들 나처럼 끝없는 노동에 탈진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쩔어서 회사에서 출근하는 사람은 내 몸뚱이를 넘어선 사고의 확장이 안되고, 그래서 지하철이 지연되면 그저 너무 화가 나는 것이다!


그나저나  "비장애인이 불편함을 감수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오기를" 라고 SNS에 글을 남긴 안산 선수, 존멋. 언니 날 가져요오오오!! 내가 이렇게 존나 떠든 얘기를 간단하게 정리해주는, 저 오지는 직관적 문장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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