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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May 22. 2022

가장이 뭐요, 그러니까 뭐했는데요.

회사에 들어와 근무를 하다가 '50대 기자 가장의 코로나 생존기'라는 노보 글을 읽었다. 보도국의 한 남자 선배가 아들의 코로나 확진에 따른 일상의 변화를 기고한 글이다. 생존을 위해 대체 가장께서 얼마나 큰 영도력을 발휘한 것인가!


다 읽고 화가 치밀었다. 재택근무를 하는 그 '가장' 선배 옆에서 아들 수발을 들고 있었을 아내분에게 극도로 감정이 이입됐다. '50대 기자 가장'이 왜 제목에 필요한 것인가. 굳이 이런 글에서 그 세계가 남성 배우자 중심으로 움직인다는 설명을 할 필요가 있는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제목에 담긴 '50대'라는 정보는 군대에 가거나 고등학생인 아들들의 확진과 연관해 제목에 반영할 수도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글을 읽어봐도 '가장'이라는 단어를 왜 굳이 제목에 넣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가장의 사전적 의미는 한 가정을 이끌어 나가는 사람이다. 어른 장(長) 자를 쓰는 이유기도 하다. 기고 글의 내용 전반에서 이 남자 어른이 장으로서 한 일은 찾기 어려워 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집 전체 소독부터 실시했다"는 대목을 비롯해 각종 대응 행동들은 "감염됐을 가능성이 있"어서 각방을 쓰기로 한 아내와 함께 한 것으로 유추됐다. 장으로서 뭔가 특별하게 수행한 작업이 없다는 나의 의혹은 확진 아들에게 "필요한 게 있으면 엄마에게 전화해 갖다 달라고 하라고 했다"는 대목에선 확신으로 바뀌었다. 뭐여 대체. 아마도 아내분은 격리된 아들 방에 밥을 넣어 주고 따로 쓰기로 한 식기 세척에 자발적 격리를 위해 재택근무를 하는 가장의 식사까지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뭐여 대체. 가장이란 무엇인가.


앞서 나는 코로나에 걸린 딸과 엄마를 격리시킨 뒤 집안 청소와 동시에 근무를 하고 방역수칙을 고지하고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했다. 출근한 동안에는(동안에만!) 격리 공간에 식사를 넣어주는 일을 안 해서일까, 이 기간 동안 나는 단 한 순간도 가장의 정체성을 갖지 않았다. 분명 저 남자 선배가 하는 일을 초과해서 했는데, 여자라서 였을까. 후기를 쓴다고 해도 가장 운운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굳이 쓴다면 '가족 확진자를 둔 직장인의 생존법' 정도로 야마(주제를 뜻하는 업계의 저속한 표현)를 잡았을 듯하다.


정부의 방역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끝난 저 글은 결과적으로 제목과 내용의 결이 맞지 않았고(내재적 비판), 나처럼 인간종 가운데 평균 이상으로 꼬인 개체이자 업무와 육아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워킹맘 입장에서는 분노를 참을 수 없는 글이다(외재적 비판). 아내분 입장에서 외쳐본다. 가장느님이시여, 너 그냥 나가 주시면 안 되겠뉘!!


이 같은 나의 초예민한 반응은 딸의 확진 기간을 힘겹게 보낸 기억 때문일 수 있다. 인간은 진화론적 이유로 아이의 울음소리를 견딜 수 없게 설계됐는데, "머리가 너무 아프다"며 펄펄 끓는 이마를 부비는 자식을 보는 것은 진정 가혹한 경험이다. 이 기간 동안 나는 공감 반응 기제가 과열돼 함께 두통에 시달리는 신체적 반응을 험했을 뿐 아니라 아이가 받는 스트레스를 그대로 느껴 정서적으로도 매우 불안했다. 그래서 어떤 세계에서는 가장으로 불리지만 우리 집에서는 '돈을 벌 줄 아는 나이 많은 아이'인 남의 편과 이때 한 번 살벌하게 싸웠고, 내 결혼생활 십여 년 중 가장 긴, 한 달의 냉전을 치렀다.


아흑, 나 왜 이렇게 꼬인 것인가. 노보를 보고 열받다니, 이 정도면 일상생활 불가능 멘탈 아닌가.

사진은 냉전을 승리로 이끈 내가 전리품을 촬영한 역사적 장면. 감히 까불어댔던 패자는 잘못을 시인하고 기꺼이 전쟁배상금을 지불했다. 다만 승자는 2차대전의 유인이 되지 않도록 패자가 생색도  수 있는 동시에 부담 가능한 수준으로만 배상금을 요구했다. 역사에서 배워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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