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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Mar 16. 2022

이렇게 살면 결국 타살당합니다.

주위에서 초등 1학년을 둔 워킹맘으로 살다가 가족과 사회로부터 타살 혹은 반쯤 자신이 아닌 것으로 변한 크리처에게 자살 당하겠다며 휴직을 선택하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시기를 지난 워킹맘들은 당시에 얼마나 자신의 삶이 가혹했는지를 얘기하거나 운이 좋아서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친구들 중에는 소녀시절 때부터 야망이 넘치는 여성이거나 직업이 나처럼 빌어먹을 기자이거나 그런 애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모두에서 무거운 짐을 어떻게든 이고 지고 가려고 발버둥쳤거나 치는 사례를 많이 본다. 


이상한 것은, 나를 포함해서 그들 다 말 잘 듣는 착한 남편이 있다는 사실이다. 왜 착한 남편들을 둔 아내들이 헉헉대는 걸까. 공적 영역의 야망이, 사적 영역에서도 좋은 엄마로서 성과를 내고 싶은 그녀들의 욕심이 그들을 이토록 힘들게 만든걸까. 그러니까 한마디로 '욕심을 부린 대가'일까. 그렇다면 다 때려치우고 양육자로서 한 개의 정체성만 가지고 부지런히 살아내면 다 해결되는 문제일까. 


아쉽게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던 윤석열 당선자의 개인화된 세계관을 빌리면 불가능한 설명이지만) 어떤 구조적 이유, 예를 들면 남성 가부장의 역할을 강조해온 사회화 때문에 남자들이 가족 부양의 책임을 여자들보다 더 무겁게 진다. 도대체 왜그래~ 그러지 마~ 라고 말리기에 앞서 이는 현존하는 사실이다. 다만 이들은 자신의 일을 통해 재력과 권력을 쟁취하고 돈과 지위라는 구체적 성과를 통해 존재와 힘을 확인할 수 있다. 자아실현이라고 달리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아내와 엄마로 살면, 성과물은 자신으로부터 오롯이 나오는 게 아니라 남편과 아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만 획득할 수 있다. 가정 내 전통적인 성별분업에서 남자들의 성공이 명백한 개인적 성취인데 반해 여자들의 성공은 자신의 성취라는 걸 그간의 헌신을 통해 '인정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 때 내 주위의 착한 남편들 같은 경우는 워킹맘 아내의 노고를 인정 한다. 처지가 비슷한 워킹맘들이 피를 토하며 남편을 욕해도 분명히 불공정한 이 시스템이 돌아가는 데는 이처럼 슬픈 이유가 있다. 하지만 노력의 결과가 자신의 것으로 귀속되지 않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남편에 비해 상대적으로 정신과 에너지 자원을 업무에서 가정으로 돌리는 일이 쌓여가면서 여자의 억울함도 함께 쌓여간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면, 경쟁하던 남성 동료가 나보다 앞서 있는 것을 발견하거나 너덜너덜해진 자신과 마주해야 할 것이다. 물론 후자가 그나마 최선이고 내가 각오한 상황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력감과 분노를 남자들에게는 발견하기 힘들다.  


초등학교 입학식이 2주가 넘은 시점이지만, 아직 나는 딸래미의 시간표를 완성하지 못했다.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그 사이 내가 속한 팀이 담당하는 대선이 있었고 회사를 그만둘까 고민하게 만든 격렬하게 나쁜 일이 있었다. 못나게 버티고 있다. 몸이야 원래 지쳐있는 상태라 그렇다 치고, 정신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아서 한 주 휴가를 냈다. 다 잘 해내고 있었다고 자부했는데, 공과 사 한쪽 기둥에서 균열이 생기면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 입장에선, 양쪽 모두에 공히 헌신했는데. 아, 다시 한심하다. 


울다 화내다 하는 일상 중에 딸래미가 하는 얘기에 까르르 웃은 일이 있었다. 딸래미가 "엄마도 웃을 줄 아네"라고 한다. 눈물이 또 났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왠지 나는 미쳐가는 중이고 이 글의 마침표를 찍고 나면 완전히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나저나 우리 몸이 이렇게 계속 화가 난 상태를 유지할 수도 있는 거구나. 인체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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