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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Mar 14. 2023

나만 이렇게 패륜인간인가

나는 일찌감치 (프로이트 적으로) 아버지를 죽였다. 내가 다 컸다고 착각했던 초딩시절에 이미 부모님이 물려주고자 하는 세계가 나와 맞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렸고, 따라서 그 세계의 규칙을 따를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개겼고 더럽게 처맞았다. 프로이트가 자신이 정복한 모든 (학문적) 영토를 융에게 물려주려고 했음에도 융이 전적으로 그를 배반한 것처럼, 나는 부모를 극복할 능력이 없는 쩌리 때부터 그 자리를 나로 대체할 것을 꿈꿨다.

  

말투나 옷차림, 루틴 한 삶의 규칙에서부터 생에 대한 태도, 가족과 사회, 국가를 대하는 태도까지 나는 부모님의 것이 다 싫었다. 이 '아버지의 세상'이라는 게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극복의 대상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빨리 전복하고 타도하고 궤멸시킬 세상. 엄빠가 어린 윤지나를 가르치고자 했던 말과 장면 중에 생생히 기억나는 것도 몇개 있는데, 그 때는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지 지금은 천개의 문장이 넘는 반론을 뿜어낼 수 있다. 나는 빨리 어른이 되고 돈을 벌어서 동의하지 않는 이 세계에 할 수 없이 기생해야만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현실에 오롯한 나의 집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일까. 나의 세계를 이룬 현시점에 설하의 오후 보육 때문에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나는 엄마아빠를 또 다른 보육 대상에 한정해 대하고 있다. 엄빠는 설하가 하교하고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시간 동안 '집안 내 어른 역할'을 기능적으로 하는 것 말고는 내 세계에서 설하 같은 어린 아이다. 혼자서는 합리적인 결론과 행동을 도출할 수 없는 존재, 스스로 생존이 불가능해서 나에게 무언가를 계속 요구하는 존재, 절대적 헌신을 요구하는 존재. 우유 한 팩도 자기 돈으로 살 수 없는 존재. 


내가 엄빠를 이렇게 대하고 있다는 사실은 얼마 전 소설에서 주인공의 딸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아버지의 존엄을 무시"하는 묘사를 읽으면서 새삼 깨달았다. '제5도살장'에서 주인공 빌리가 외계인에게 납치됐다는 사실을 얘기할 때마다 딸은 아버지의 정신상태를 의심하며 발설과 판단 자체를 막아버린다. 그녀에게 아버지는 스스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위험한 존재일 뿐이다. 나도 어디선가 아마 올바른 엄빠의 생각과 행동을 막아서고 있겠지. 

  

나는 아빠가 나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장바구니를 들어주는 행동조차 질색을 한다. 아빠의 행동들은 상당수가 스스로를 망치는 일들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눈에는, 얼마 전 팔이 부러진 아빠가 별로 효과적이지도 티가 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완쾌를 미루고 있는 듯하게 보인다. "팔 부러졌던 사람이 왜 이래. 냅둬, 아빠 몸은 제발 아빠가 챙겨"하고 쌀쌀맞게 말하는 나를 보며 내쉬는 아빠의 한숨이 느껴졌다. 나는 잠깐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 다시 화가 났다. 아빠의 의사를 존중해서 장바구니를 조심스레 맡기는 게 맞는 걸까. 겨우 현관에서 주방까지 이걸 든다고 뼈에 다시 금이 가는 것도 아닌데.


설하 등교 준비시키랴 내 출근 준비하랴 바쁜 며칠 전 오전, 평소 잘 시간인 아빠가 주방에서 서성거리며 설하에게 말을 거는 게 엄청 거슬렸다. 일찌감치 아침을 다 먹고 양치를 해야 할 설하한테 아빠가 "우유 줄까?"라고 말하는 순간, 짜증을 참지 못하고 "아, 필요할 때 도와줘. 지금은 아니야"하고 또 차가운 말을 내뱉었다. 억울한 표정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아빠를 보며 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여유 없는 상황에서 그 마음도 오래가지 않았다. 감정은 복잡하다. 


역시 제일 참을 수 없는 건 엄빠가 나에게 충고를 하는 행위, 아버지를 죽인 뒤 내가 만든 세계에서 엄빠가 아버지 역할을 하려고 시도할 때다. 충고 자체와 그 충고가 나오기까지 숙고된 모든 과정에 걸쳐 아무것도 동의할 수 없다. "엄빠의 세계는 나에게 인정받은 적이 단 한순간도 없어!"라고 소리 지르고 싶지만 상대는 부모님이기 때문에 그냥 성질을 삼킨 뚱한 표정만 짓는다. 나의 패륜적 표정을 보며 엄빠도 조언자나 조력자 역할보다는 보육 대상으로 자신의 위치를 축소시키는 것 같다. 엄빠의 메시지는 그래서 소비의 결과(카드결제내역이나 송금내역)나 노동요구의 흔적(더러워진 주방 등 집안)으로만 남는다. 나는 또 화가 난다. 악순환이다. 나는 왜 이렇게 패륜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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