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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Apr 15. 2024

정적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다

변태가 로마 공화정 몰락 과정을 반추하며 깨달은 교훈 수준은 이 정도임.

가끔 생각한다. 내가 조금 더 일찍 태어났다면 아마도 양 허리춤에 긴 칼을 차고 발목에는 단도를 꽂고 다녔을 거라고. 내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칼질을 하고 정적의 가슴에 피가 솟구치는 걸 즐겼을 거라고. 이런 내심의 폭력성은 전쟁사로 달랬다. 아들이 권력을 위해 아비를 죽이거나 단순하게는 복수를 위해, 복잡하게는 공포를 통한 통치기반 마련을 위해 일족 하나를 학살해 버리는 이야기가 짜릿했다. 변태인가. 변태다.  


최근에 읽은 로마에 관한 책 '폭풍 전의 폭풍'에서, 폭력 자아를 숨기고 사는 내가 찾은 교훈은 다음으로 갈음할 수 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마오쩌뚱)" 그리고 "왕국을 빼앗은 뒤 옛 왕을 살려두는 것은 비록 은상을 베풀어 자기편으로 둔다 해도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일인가(마키아벨리)"


인상적이었던 건 술라와 카이사르의 생의 마지막 순간이다. 카이사르야 (셰익스피어 덕분에 실제 했는지 모를 유명한 대사) "부르투스, 너마저" 정도의 멘트만 남기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짧게 넘겼지만, 술라는 대학살을 저지르고 정계를 피범벅으로 만들고도 은퇴 후 한참을 평화롭게 살았다. 어느 정도의 피범벅이었냐면, 술라는 정적이었던 마리우스파 체제의 지도부 전원을 살생부에 올렸고 일족들은 손자 대까지 피선거권을 박탈해 로마의 정치엘리트 집단 하나를 절멸시켰다. 이 과정에서 마리우스 파가 아님에도 재산이나 권력 때문에 시기를 받던 사람들까지 슬그머니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 학살의 대상이 됐다. 술라의 지지자들까지 진저리를 칠 정도로 진행된 살육기에서 유일하게 혜택을 본 사람은 술라 단 한 명뿐이었다. 

 

로마사에 길이 남을 무공을 남기고 로마정치의 정점에 있었던 점에서 카이사르는 술라 못지 않았, 아니 후대의 우리가 지겹게 여러 방식으로 그를 만나는 걸 보면 카이사르는 확실히 술라 이상이다. 그럼에도 술라에 비해 훨씬 비참했던 죽음의 원인은 간단해 보인다. 자비롭게 정적들 대부분을 살려줬기 때문이다. 정적이었던 폼페이우스가 사라지고 권력을 움켜쥔 다음에도 그의 동상을 파괴하지 말고 유지하라고 했는데, 카이사르가 원로원 내 바로 그 동상 밑에서 살해당한 건 굉장히 인상적인 장면이다. 신이라는 극작가가 카이사르라는 주인공을 죽이기로 결심했다면, 너무나 마땅한 장소랄까. 


치명적인 칼날이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기 전까지 스무 번 넘게 찔리며 카이사르는 고통 속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도 술라처럼 정적들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삼니움족 포로 3천 명이 학살당하며 지르는 비명을 듣게 하는 게 맞았을까. 고귀한 자로 하여금 자식과 손자가 눈앞에서 죽을 때까지 맞는 걸 지켜보게 하고, 피범벅이 된 비단옷을 질질 끌며 목숨을 구걸하도록 해서 이 장면을 모두에게 전시하는 게 맞았을까. 그래서 나한테 개기면 어떻게 되는지를 며칠에 걸친 공포 속에 학습시켜 줘야 했을까. 


카이사르는 또 생각했을 것이다. 술라처럼 로마인들이 전통적으로 추구한 도덕적, 사회적, 관습법적 가치관이었던 '모스 바이오룸'을 몇 번이나 파괴하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했을까. 하긴 충격은 공동체에 속한 이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 및 모범이 맨 처음 깨질 때나 컸다. 카이사르를 죽이기 위해 원로원 인사들이 회의장에 단검을 들고 가는 시점에 과거의 규범은 바보들이나 지키는 것이 돼있었다. 카이사르 본인도 최고 권력을 얻는 과정에서 모스 바이오룸을 깨곤 했다. 포룸에 무기를 들고가면 안 된다는 모스 바이오룸 때문에 의자 다리로 사람을 패 죽이던 시절은 나름대로 도덕의 황금기였던 셈이다. 권력을 쥐기 위해서는 존중받는 규범은 파괴해야 하고 권력을 잡았다면 정적을 남김없이 살육해야 할 뿐. 


나란 변태가 얻은 이 교훈은 도시국가였던 로마가 원로원과 평민들 간의 다툼, 동맹 도시국가와의 분열과 로마시민권 확보라는 투쟁을 겪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시비스 로마누스 섬(나는 로마시민이다)'이라는 게 어떤 낭만적(혹은 나이브한) 영화에서는 그 자체로 목적인 것처럼 멋지게 나오지만, 사실 권력가들의 정권 확보의 도구나 정당성 확보의 전형적 수사에 불과했다. 아, 이건 못 보던 초식인데, 싶은 정치적 선택이 난무하고 텅 빈 기호인 '동료 시민'들을 호명해 대는 한국의 정치상황이 겹쳐 보인다. 모스 바이오룸을 깨던 행위는 요즘 '금도를 넘었다'는 표현으로 대체할 만하다. 인간종은 여전히 진화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가죽을 벗기고 댕강 자른 목을 전시하거나 멸문하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좀 나아진 것인가. 


...


분명한 건 정적에게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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