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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나 Dec 25. 2018

방상훈 손녀의 통찰

치과에서 계급을 확인하다 

마침 빙구같이 웃고 있는 내 모습. 자세히 보면 어금니 하나가 안보인다. 뿌리까지 금이 간 이들은 갱생의 의지가 없다고 보고 인정 없이 다 뽑아버려야 했다.  

지난 8월 드라마에서나 보던 '실신'이란 신체 작용을 고스란히 겪은 이후 내 몸 여기저기에 흔적이 남았다. 사노비 노릇과 엄마질의 전장에서 훈장 대신 부러진 턱과 깨진 이빨만 잔뜩 얻었다는 건 평생에 걸쳐 억울한 역사로 남을 것이다.  특히 내 이빨. 무려 15개가 완파, 반파... 최소 금이 갔다. 나에게 이렇게 이빨이 많았다니 신라시대였다면 바로 이사금...이라는 드립을 치고 싶지만, 신체의 일부를 잃는 일은 영원히 적응할 수 없는 사건이다. 


 

4대 보험의 위엄과 의술? 의 경지를 실감했던 골절 턱 치료와는 달리 치과에서는 내가 위치한 계급을 실감하고, 조금 안도하고, 또 미래의 불안을 느껴야 했다. 일단 파손된 15개의 이빨을 치료하는 데 건강보험에만 의지한다면, 대략 천만 원을 전후한 돈이 들 것으로 보인다. 내가 당장의 먹거리와 잠잘 곳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라면 결코 욕심낼 수 없는 선택, 치료다.  


그나마 나는 정규직으로 10여 년을 일하면서 꼬박꼬박 산재보험에 돈을 내온 덕분에, 산재로 인정받은 상해를 치료받는 것이라 임플란트와 신경치료 등엔 비용이 들지 않았다. 그러나 임플란트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치과가 주장하는 인공뼈(내 몸이지만 치과가 주는 정보에 의지해야 한다), 미적으로 의미 있는? 소재로 치아를 만드는 치료는 비급여다. 여기에만 3백만 원에 가까운 내 돈이 추가로 들었다. 


그렇다. 치과는 비단 그 불쾌한 치료 과정뿐 아니라 내역 전반을 통해, 내 몸이 처한 상황과 이 불쌍한 육신이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지를 자비 없이 확인토록 한다. 내가 만약 정규직이 아니었다면, 정규직이더라도 산재 처리에 인색한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면, 모아 놓은 돈과 남편의 카드가 없었다면 지금쯤 이빨 수 개를 포기했거나 향후 잇몸이 검어질 수도 있는 소재를 이용한 치료를 해야만 했을 것이다. 혹은 힙합을 사랑하는 중년의 여자처럼 앞니를 금니로...


이빨은 정확한 발음을 내는 데 역할을 하고 음식물 소화를 용이하게 하며 아름다운, 아니 이른바 '정상적인' 외모를 갖추는데 필수적인 신체 일부다. 하지만 없어도 일상생활에 현저한 지장을 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돌아가거나 금이 간 턱과는 달리 나의 조건이 허락하는 만큼만 치료하는 게 가능하다. 게다가 한두 개가 아니지 않은가! 한마디로 이빨은 '포기'가 가능한 신체다. 


그리고 포기의 여부와 정도는 내가 얼마만큼의 돈을 지급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내 계급이다. 조선일보 방상훈 옹의 손녀가 일찌감치 어린 나이에 그 진실을 터득하고 일갈하기도 했다. "일단은 잘못된 게 네 엄마, 아빠가 널 교육을 잘못시키고 이상했던 거야. 돈도 없어서 병원하고 치과도 못 갔던 거야 가난해서"


새삼 확인한 속세의 진실이다만, 가난하면 병원을 가지 못한다. 특히 치과가 그렇다. 기본 치료비는 물론이거니와, 비급여 항목이 너무나 많다. 그만큼 발음이 어눌해지고 소화기능이 떨어져 작거나 큰 질병을 유발할 수 있으며 미적으로 떨어지는 외모를 야기할지언정, 돈이 없을 경우 이빨은 포기할 수 있는, 아니 작별'해야만' 하는 신체인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순수하게 미적 목적으로만 하는 이빨 교정은 (장난스럽게 얘기하지만), 어느 정도 부의 상징이다. 기회가 되면 나이 든 노숙인의 이를 보라. 그들에겐 이빨의 반이 없다. 


+ 요즘에는 치과 서비스 경쟁 와중에 환자들에게 시술의 방법과 목적을 상세하게 설명해주는 게 트렌드인지, 듣고 싶지 않은 과정을 로봇처럼 줄줄 읊어 대는 게 인상적이었다. 임플란트는 그렇다 치고, 이빨에 구멍을 내고 신경을 꺼내는 이른바 신경치료의 상세한 내용은 호러무비 저리 가라였다. 

해당 내용을 숙지하고 치료에 임하면, "이 '갈리는' 소리는... 보아하니 이빨을 쪼개고 있는 모양이군", "신경을 꺼내면서 피가 많이 나는가 보군" 하는 식으로 끝내주는 실존 체험이 가능해진다."아 나는 살아이쒀!!!"

그나저나 신경을 '치료'해 제 기능을 하게 하는 게 아닌 만큼 '신경 치료'라는 해당 작업의 네이밍은 매우 부적절하다. '신경 제거' 작업이라 부르라! 과정의 디테일을 담은 네이밍이라면 '신경 뽑기'가 좋을 것이다. 신경을 무슨 문자 그대로 '슈킹' 기계로 뽑아낸다. 치과의사 친구에 따르면 신경치료는 의사가 가장 힘들어하는 작업이라고 하는데, 여봐, 환자도 진짜 너무나 괴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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