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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Mar 08. 2022

쌍둥이의 세계

일란성쌍둥이로 산다는 것 (feat. 명랑한 은둔자)


작년 겨울, 한국 방문의 여파로 남들보다 1달 늦게 시작한 2022년 새해. 늦은 감이 있었지만 2월에라도 뭔가를 시작하고 싶어 영어 필사를 시작했다. 2월엔 일편단심 민들레로 단 한 권의 책, 캐럴라인 냅의 《명랑한 은둔자, The Merry Recluse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챕터들만 골라 필사를 했다. 하나하나의 에세이를 확대하면 한 권의 책이 될 정도로... 짧은 생이었지만 진하고 강렬하게 살아낸 저자의 삶이 느껴지는 에피소드와 생각들이 담겨있다. 그렇다고 내용이 다 묵직한 것은 아니고, 때로는 가벼우면서도 웃음이 피실 피실 나는 챕터들도 있다. 그래도 가장 기억에 남는 챕터를 몇 가지 꼽으라고 한다면 <쌍둥이로 산다는 것>, <조이에게 보내는 편지>, <부모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것>, <이름의 사회학>, 그리고 <사람들이 무엇을 못 버리는지 살펴볼 것> 등이 있다.


미국의 전혀 다른 가정환경에서 1959년에 태어나 2002년까지 살아낸 작가가 쓴 글들이 2020년대를 살아내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울림을 줄 수 있는 게 그저 놀랍다. 가족, 사랑, 우정, 고독, 죽음... 관계 등에 대한 생각은 참 인류 보편적인가 보다. 그중에서도 <쌍둥이로 산다는 것, On being a twin> 은 쌍둥이로 살아오면서 느껴온 특별한 감정을 표현할 언어를 찾지 못했던 나에게 선물 같은 챕터였다. 나에게는 없지만 저자에게 있는 예민하고 섬세한 언어를 통해, 쌍둥이 자매의 어린 시절로 다시 여행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 cuncon, 출처 Pixabay

나는 쌍둥이다. 그것도 일란성. 그리고 동생이다. 동생인데 언니보다 등치가 살짝 더 크기도 하고, 아직도 초딩의 얼굴을 유지하는 언니의 동안 덕분? 에 나는 항상 "네가 언니니?" 하는 말을 항상 듣고 살았다. 10개월 동안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수영한 우리는 5분 차이로 이 세상에 태어났다. 5분 차이로 너는 언니가 되었고, 나는 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

많은 쌍둥이들이 그렇듯 우리는 어릴 때부터 참 달랐다. 뱃속에서부터 내가 식탐이 많았던 것인지 나보다 한참 여리여리하게 태어난 언니는 모유가 아니면 금세 알아채고 우유병을 혀로 쏙 밀어내었다고 한다. 반면 나는 모유든 우유든 아무거나 잘 먹었다. 2살 많은 오빠에 쌍둥이까지 키우기 버거우셨던 어머니는 1살 말 무렵 나를 바닷가 할머니 댁으로 보내셨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할머니와 함께 10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서 (거짓말 조금 보태) 1초도 쉬지 않고 울었다고 한다. 1년 후 다시 엄마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또 할머니께 보낼까 봐 엄마 치마만 잡고 다녔다고.


조금 나이를 먹고 나서 식성이 무난하고 순둥순둥 해서 할머니 댁으로 보내진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에게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언니처럼 여리여리함과 까탈스러움을 갖추지 못해서 보내진 것 같았으니까...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사진들을 보면 나는 걸핏하면 울고 있다. 나들이를 가도, 산에 가도, 바다에 가도, 넘어져도 일어나도... ㅎ 세상에 이런 울보가 없다. 철없던 시절에는 앨범을 보며 내가 불쌍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 적도 있다. 이 쓸데없는 자기 연민. 나이를 먹고 언니가 외동딸을 키우면서도 힘들어하는 걸 보면서, 어머니가 나를 할머니 댁에 보낸 것은 어쩔 수 없는, 우리를 더 잘 키우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어머니는 언니와 내가 항상 다른 반에 배정되었으면 좋겠다고 학교에 특별 요청을 하셨다. 본인이 쌍둥이거나 쌍둥이를 키워보신 분들은 이미 느껴 보셨겠지만, 비슷한 외모만 빼면 쌍둥이는 정말 성향이 다르다. 이 다름은 자매나 형제가 조금씩 다른 차원을 뛰어넘는다. 반대가 되려고 억지로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어릴 때부터 이 순리를 아셨던 어머니 덕분에 우리는 항상 다른 옷을 입고, 다른 필기구를 쓰고, 다른 반에 배치되고, 다른 선생님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 한 밥상에서 먹는 음식만 빼고는 다 달랐다. 캐럴라인 냅이 아래 묘사하는 것처럼 쌍둥이들이 다른 사람으로 자라는 과정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다행히 언니와 나는 다른 인격체로 자람에 있어,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쌍둥이들이 자신들을 각자 다른 사람으로 정의하고 떨어지는 것은 어렵고도 복잡한 일로, 리베카와 나는 그 섬세한 개별화의 춤의 안무를 오랫동안 종종 무의식적으로 함께 짜 왔다. 분명히 의식하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서로 다른 영역을 차지하고 가상의 파이들을 - 재능의 파이, 기질의 파이, 생활 방식의 파이 - 나누는 일을 몸에 익혔다. 우리의 합의는 늘 암묵적이었고, 그 내용은 나중에 돌아볼 때에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너는 이게 되도록 해, 나는 저게 될 테니까, 너는 이걸 잘하도록 해. 나는 저걸 잘할 테니까.

 《명랑한 은둔자》 쌍둥이로 산다는 것, p.55


텔레파시에 대해

쌍둥이로 자라면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은 1) 정말 텔레파시가 통하니? 2) 다른 반에 들어가 선생님을 놀래켜 본 적이 있니? 였다. 


첫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쌍둥이는 외계인이 아니다. 텔레파시라기보다는 혈연으로 맺힌 가족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항상 있다. 이것은 흔히 자매나 형제에게도 있는 감정이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때 언니에게 뭔가 안 좋은 일이 있는 것 같아 운동장에 나갔는데, 언니가 남자아이들과 싸우고 있었다. 그 아이들이 나에 대해 실없는 욕을 해서 싸움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나이를 훌쩍 먹은 지금도 언니와 조카에 대한 찜찜한 꿈을 꾸면 그다음 날 바로 전화를 하곤 한다. 어쩔 때는 정말 힘든 일이 있는 경우도 있고, 개꿈인 경우도 있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더 어렸을 때, 지금보다 순수한 영혼으로 살았을 때, 상대방의 상태를 알아맞히는 확률이 더 높긴 했었다. 두 번째 질문에 답하자면, 쌍둥이는 복제인간이 아니다.게다가 우리는 그런 (서로 반을 바꾸는)장난을 치기엔 너무 모범생이었다. 한 번도 다른 반에 들어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들통날 것이 뻔하니까... 주변 친구들의 부추김이 여러 번 있었지만, 우리는 꿈쩍하지 않고 각자의 자리를 고수했다.


비교하지 마세요


쌍둥이에게 '비교'는 금물이다. 우리는 친척들의 무한한 '비교'와 '관심'의 오지랖 속에서 자라났다. 정작 부모님께서는 단 한 번도 비교를 하신 적이 없는데 말이다. 우리 집에서 비교에 관련된 단어는 거의 금기어였다. 하지만 친척들과 주변인들의 '비교'로 인해 우리는 번갈아가며 마상을 받았다.


첫 번째 마상은 동생인 내가 받았다. 막내 삼촌은 여리한 언니에 비해 포동포동한 편이었던 나를 '떡자'라고 불렀다.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 '뜩자야~'라고 불렀는데 나는 이 말을 극혐 했다. 추석, 설 등에 할머니 댁에 내려갈 때마다 온 힘을 다해 막내 삼촌을 피해 다녔다. 심지어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이어트를 시작해, 4학년 말에는 목표한 대로 진정 말라깽이가 되었다. 이후로 막내 삼촌은 다시는 나를 '떡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두 번째 마상은 언니가 받았다. 함께 열심히 공부해 외고에 지원했는데 나는 합격하고 언니는 일반고에 가게 되었다. 합격한 것은 좋았지만 나는 티를 낼 수 없었다. 그건 부모님도 마찬가지. 친척분들은 그런 예민함을 눈치채지 못하셨는지, 명절에 만나면 무심하게 그 얘기를 꺼내곤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언니는 항상 나에게 화가 나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더 화가 나서 언니에게 심술 맞게 군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고 미안하다. 요즘에는 외고가 다 없어진다고 하는데, 별것도 아닌 학교에 뭘 그리 신경을 곤두세웠는지... 암튼 쌍둥이에게 '비교'는 쥐약이다. 경쟁심을 자극해 당시에는 학습 성과에 조금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디 둘 사이를 갈라놓고 싶다면 비교해 보시죠..."라고 얘기하고 싶다.




우리는 다른 대학을 갔고 다른 과목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각기 다른 회사에 취직하고, 동등한 '직장인'이 되고 나서야 서서히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어쩔 수 없이 집안의 많은 자원이 나에게 쏠릴 수밖에 없었다. 스쿨버스, 교복, 급식부터 시작해 교재, 수학여행, 연수 (연수는 미안해서 포기했다) 등... 모든 비용이 두 배 이상 들어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항상 미안했고, 언니는 항상 화가 나 있었다. 나는 그런 언니에게 화가 났다. 우리가 지나치게 예민했던 걸까?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의 한정적인 자원과 사랑, 관심, 시간을 나눠야 하는 상황에서, 나이 차이를 들먹일 여지도 없는 쌍둥이라 더욱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진짜 언니, 동생이었다면 한 살 많은 네가 이해해, 또는 네가 어리니까 양보해...라고 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주변의 '비교' 부채질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이렇게 천편일률적인 초/중/고등학교 교육에서 벗어나, 각기 른 인생의 항로를 선택하면서 우리는 다시 가까워지고 애틋해질 수 있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미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해본다. 이곳은 각자의 다름에 대한 수용도가 좀 더 높은 곳이라서... 하지만 모두 과거의 일이다.


© miinyuii, 출처 Unsplash
각기 다른 인생의 항로를 택하다


그럼 지금의 우리는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나는 아직 비혼이고, 언니는 결혼을 해 예쁜 딸을 낳았다. 나는 테크 회사 직장인이고, 언니는 영어 선생님이다. 나는 10년 전 미국에 건너와 북캘리포니아에 자리를 잡았고, 언니는 가족들과 함께 한국에서 살고 있다. 미국 첫 직장에서 내가 취업비자로 고군분투할 때, 언니는 찬란한 웨딩드레스를 입고 결혼식을 올렸다 (다행히 대사관에서 스탬프를 받아야 한다는 핑계로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언니가 조카를 출산하는 날,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펍(pub)에서 동료들과 함께 술을 한잔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주최한 네트워킹 행사여서 엄연히 업무의 연속이었지만, 가족들의 문자를 받고 언니에게 전화를 했을 때, 당시 내 모습이 조금 부끄러웠다. 산고를 견디고 10달 동안 품은 귀한 아기를 출산한 언니, 동료들과 함께 술 한잔하며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는 나... 우리의 삶은 이렇게 달라졌다. 그래서인지 《명랑한 은둔자》 중의 이 부분이 특히나 와닿았다.


꼭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이 되려고, 우리의 인생이 너무 긴밀하게 얽히는 것을 막으려고 애쓴 것처럼 느껴진다. 너는 네 영역을 지켜. 나는 내 영역을 지킬 테니까. 꼭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명랑한 은둔자》 쌍둥이로 산다는 것, p.57


나의 반쪽을 닮은 소중한 너에게


고등학교 때의 미안함이 남아서인지 언니에게 보여주지 못한 애정을 지금에서야 쏟아낸다. 한국에 갈 때, 내 짐은 언니와 조카 선물로 언제나 한가득이다. 이제 어머니의 시간과 에너지, 사랑은 오롯이 조카 차지가 되었다. 언니는 그 덕분에 육아 공백 6년 후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때 내가 부모님께 받았던 시간적, 마음적, 물질적 자원은 한국에 있는 언니에게 우선적으로 배당된다. 그다음은 오빠 몫이다. 나는 어차피 미국에 떨어져 살고 있으니 별 불만이 없다.


그래서인지 외동인 조카를 볼 때마다 짠한 마음이 올라올 때가 많다. 우리는 어릴 때 부모님의 한정된 자원? 을 나눠 가지느라 많이 싸우기도 했지만, 커서는 이렇게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정서적 유대감을 공유할 만한 누군가가 없는 조카의 미래가 걱정될 때도 있다. 다중이 역할극을 하며 혼잣말로 토끼 인형들과 재밌게 놀고 있는 조카를 보고 있노라면, 귀엽고 사랑스러우면서도 외로워 보여 코끝이 찡해진다. 조카는 밝고 명랑하게 잘 크고 있는데, 어쩌면 극성 이모의 기우일지도 모르겠다 ㅎ 나의 반쪽인 쌍둥이 언니의 딸이라서, 언니를 또는 나를 닮은 조각이 보일 때마다 내 딸이라는 착각마저 든다. 그래서 더욱 우리가 누린, 이 특별한 연대감을 조카는 누리지 못한다는 점이 한없이 미안하다.




카톡으로 가끔 통화를 하며 결혼 생활의 이모저모로 고충이 많은 언니에게 얘기한다. "삶이 팍팍하다고 느껴지면 언제든지 초롱이 (태명) 데리고 미국에 와." 내가 이 이야기를 할 때면 언니는 조금 안도하는 것 같다. 어릴 때는 쌍둥이라서 겪어야 했던 여러 시련과 마상들이 너무 싫었지만, 지금은 쌍둥이로 태어났음에 감사하다. 이렇게 타지 생활을 하는 동안 나의 분신이 한국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 든든하다. 다른 성향을 한껏 발현하며 살 수 있게 지지해주신 모님께도, 올 겨울 한국에 가면 꼭 감사인사를 드려야겠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언니 덕분에 결혼 생활과 신비한 육아의 세계를 간접 체험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누군가 텔레파시!가 있다고 믿는 외계의 세계를, 나름 특별한 쌍둥이의 세계를 맛볼 수 있어 감사하다. 쌍둥이로 태어난 덕분에 이 생은 반은 먹고 들어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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