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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Apr 13. 2022

파친코, 내 안의 K-내러티브를 깨우다

코리안 모먼트 by <파친코>

바야흐로 때가 왔다. 코리안 모먼트가 왔다. 한국에 관련된 모든 것에는 K가 붙으니, K-moment 라 부르기로 하겠다. 영화 <기생충>, <미나리>, 그리고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에 이어 이제 <파친코>다.


언젠가부터 유튜브에 '파친코 해외 반응'과 관련된 영상들이 뜨기 시작했다. 아마 이민진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여러 개 찾아봐서 그런 것 같다. 유튜브에서 <파친코> 요약 영상을 보고 다음 정주행 할 드라마는 바로 이거다 싶어 중요한 회사 프로젝트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보기를 미룬 이유는 감정 소모가 많아서이다. 지난 목요일 두 달간 진행했던 프로젝트가 끝났고, 주말에 걸쳐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를 정주행 했다. 


영어 원서 《파친코》와 애플 tv+의《파친코》


드라마를 보며 원서도 읽고 있다. 안타깝게도 아직 이북(e-book)이 나오지 않아, 원서로 읽고 드라마를 보며 한국어에 대한 갈증을 누그러뜨린다. 보통 아마존에서 책을 주문하면 1-2일 안에 받아볼 수 있는데, 《파친코》는 거의 10일 넘게 기다려 겨우 받을 수 있었다. 드라마와 함께 책도 인기가 폭발하고 있나 보다. 파친코의 저자, 이민진 작가의 인터뷰 영상도 보았다. 본인이 수줍음을 많이 타는 사람이라 이런 공석에서 말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하는데, 아닌 것 같다. 내가 영어 스피치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거의 없는데, 이민진 작가의 말에는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흔들어놓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래서 작가인가 보다. 그중에서 이 문장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I was very lost and lonely; however, because of my mother's and father's stories of their lives, my mind was populated with all kinds of Koreans who had adventures. I knew that Koreans could leave their birthplace, survive wars, start again in the middle of their lives, build businesses, steal from each other, forgive one another, and work hard again after many betrayals. Koreans could reinvent. We could dream and we can struggle in the face of great obstacles. In the absence of an American narrative about Koreans, my mother and father created counter narratives of people who look like me could have their stories and their meaning.

저는 길을 잃었고 외로웠어요.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 덕분에 제 마음은 모험을 떠난 한국인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저는 한국인들이 고향을 떠나, 전쟁에서 살아남고, 삶의 중간 자락에서 다시 인생을 시작하고, 사업을 일구고, 다른 이의 것을 빼앗고, 서로 용서하고, 여러 번 배신을 당한 후에도 다시 열심히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한국인들은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는 꿈꿀 수 있고 엄청난 장애물에 직면해 투쟁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에 대한 내러티브가 결여된 상황 속에서, 우리 부모님은 카운터 내러티브를 만들어 저와 비슷한 처지의 분들이 삶의 이야기와 의미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출처: [2부] 이민진 작가 스피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 유튜브 알쏠이.




주말 사이 드라마 파친코를 5편까지 정주행하고 문득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이 생각났다. 이후 여러 해가 지나 현재 미국에 살고 있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한국인이다. 하지만 삶의 질은 천지차이다.


타지 생활의 시작


나의 타지 생활은 크게 두 번으로 나뉜다. 대학교 때 어학연수로 프랑스에서 1년 남짓 산 적이 있고, 2년간 석사 학위만 취득하고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미국에서 자리를 잡은 지 이제 10년이 되어간다. 프랑스에서 나는 가난하고 순진한 유학생이었다. 지금 이곳, 미국에서는 스스로 의식주 정도는 해결할 수 있는, 세상 물정에 빠삭하지는 않지만 사기당할 정도는 아닌 사회인이 되었다. 시대와 함께 많은 것이 변했다. 나도 변했지만 한국인에 대한 위상과 대우도 극과 극으로 달라졌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프랑스 어학연수를 갔을 그 당시, 나는 한국에 대해 항상 '설명'해야 했다. 들에게 한국은 잘 알려지지 않은 동양의 한 작은 나라일 뿐이었다. 발표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한국의 문화를 소개하는 콘텐츠를 준비해 발표했고, 음식을 대접할 일이 있으면 김밥, 잡채, 주먹밥, 불고기 등을 부지런히 준비해 한국 음식을 소개했다. 내 나라니까 알리고 싶었다.


북한에서 왔니?


한 번은 키오스크 (신문이나 잡지를 파는 매대)에 우표를 사러 간 적이 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께 엽서를 보내고 싶은데, 우표를 몇 개 붙여야 하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가판대 아주머니는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다가 "Corée du Sud ou Corée du Nord?"라고 물어보았다. "남한에서 왔니, 북한에서 왔니?"라는 뜻이다. 나는 어이가 없었다. 속으로 그 아주머니가 참 무식하다는 생각도 했다. "북한 민간인은 자유여행을 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르나, 세상에 나 보고 북한에서 왔냐니..."


생각해 보면 그건 참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는 내가 아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무조건 알고 있다고 (알아야 한다고)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게 자랑스러운 조국, 한국이니 모든 사람이 '남한과 북한의 차이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라고 당연시했던 것이다. 당시 유럽 사람들은 한국에 대해 잘 몰랐다. 한국학이나 한국어를 전공하는 지식인층이 아니면 '동양 = 일본 또는 중국'었다.


그때 만났던 외국인 친구들이 그나마 한국에 대해 알아주는 단 한 가지가 있었다면 그건 '삼성'이었다. 당시 나는 우리 집에 있던 가장 비싼 물건 중의 하나인, 가보와 같았던 '삼성 카메라'를 들고 1년 어학연수를 떠났는데, 이 카메라를 본 외국인 친구들은 하나같이 신기해하며 한 마디씩 했다. 어떤 동유럽 친구는 카메라를 책상에 눕히고 렌즈 부분에 계란을 올려 zoom in, zoom out을 하며 줌 기능이 잘 되는지 실험까지 해보았다. 나는 그럴 때마다 왠지 우쭐해졌다. "너희들이 남한, 북한은 구분 못 해도 삼성은 알아주는구나."


개미와 당나귀


내가 프랑스에서 들었던 말들 중,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하나는 '개미'고,  또 하나는 '당나귀'다. 어학연수 1차를 마치고 여름이 되어 나는 '국제학생캠프'에 참가했다. 그때 각국에서 온 아이들은 국기와 함께 이름이 쓰여있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또 우표를 살 일이 생겨서 키오스크에 갔다. 키오스크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내가 우표를 달라고 하니까, 자기네들끼리 귓속말로 "Ce son't des fourmis (쟤네들, 개미잖아)"라고 했다. 당시 한국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있었다. 한국인들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열심히 독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였다. 100%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속에서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놈의 우표를 사다가 참 많은 언어 테러를 당했다.



한 번은 '국제학생캠프' 관계자에게 얘기해, 버스가 투르 (Tours)라는 도시를 지날 때, 내 짐을 미리 국제학생 기숙사에 맡길 수 있겠냐고 양해를 구한 적이 있었다. 관계자는 마지못해 짐을 내려주면 "C'est un travail des ânes (이건 뭐 당나귀 짐을 옮기는 거나 다름없구먼...) 한국 사람이라 그런가..."라며 투덜거렸다. 당시 나는 준비한 내용을 문제없이 발표해 낼 정도의 불어 실력은 되었지만, 프랑스인들의 이렇게 못되고 독한 말을 위트 있게 받아칠 정도의 날카로운 불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나는 "Quoi, un travail des ânes? (뭐, 방금 당나귀 짐이라고 했니?)라고 노려보았지만, 뻔뻔한 관계자는 미안한 마음은 1도 내비치지 않았다. "도와줄 필요 없어. 내가 들 거야." 나는 집 바퀴를 탈탈 굴리며 씩씩하게 숙소로 향했다. 속으로 '두고 보자'며 이를 갈았다. "하긴 세상천지에 아는 나라가 프랑스밖에 없고, 집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는 네가 뭘 알겠니... 조상이 물려준 문화재로 먹고사는 너희들이 어찌 우리의 인고의 세월을 알 수 있으리..." 내 마음을 보호하기 위해 그를 한심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생텍쥐페리 손녀딸, 홈스테이


여름 캠프가 끝나고 정착한 'Tours'라는 도시에서는 기숙사에 가기 전 한 달간 홈스테이를 하기로 했다. 국비 장학생으로 간 거라 학원에서는 나름 배려해서 생텍쥐페리 손녀딸 집에 배정해 주었다. "내가 읽은 《어린 왕자》에 대해 얘기해야지... 이 할머니와는 문학에 대한 대화를 실컷 나눌 수 있겠군..." 등 온갖 상상으로 들떠 있었다. 첫날 할머니는 생텍쥐페리의 그림과 엽서 액자 등이 진열된 거실과 서재를 비롯해 집 전체를 구경시켜주었다. 유명한 문학가인 할아버지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틀째부터 할머니는 하루는 친절했다 하루를 폭언을 퍼부었다... 기분이 미친 x처럼 널을 뛰었다.


당시 나와 함께 할머니 집에서 홈스테이를 하던 일본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함께 아침 밥상에서 대놓고 비교하기도 했다. 얘는 일본에서 교육을 잘 받아 이렇게 얌전하고 예의가 바른데, 나는 쩝쩝거리면서 예의 없이 먹는다는 것이었다. 내 나이 20 평생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할머니는 또한 (너 같은 한국 애들뿐 아니라) 프랑스어에 영어 악센트가 들어간 형편없는 프랑스어를 구사하는 미국 애들도 혐오한다고 했다. 그날부터 시작해 별의별 것으로 트집을 잡았다. 하루는 옷으로 트집을 잡고, 하루는 불어책을 소리 내서 읽는다고 트집을 잡고, 하루는 부모님과 통화한다고 트집을 잡고, 끊임없이 나를 일본 아이와 비교했다.


결국 나는 2 만에 학원에  상황을 고발하고 다른 홈스테이를 알아봐 달라고 얘기했다. 되면 아파트로 이사  생각이니 2 비용을 환불해달라고 요청했다. 학원에서 친해진 덴마크 언니와 작전을 짰다. 함께 쳐들어가서 그동안 할머니가 휘두른 차별과 언어폭력을 낱낱이 까발리고, 짐을 싸서 나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할머니 집으로 갔다. 앞으로 하숙집에서  거라고 하니까, 할머니는 수저와 접시를 함께 사용하는 그런 더러운 집에서 어떻게 사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당신 같은 귀족 자제들은 모르지만 우리에게도  사는 방법이 있다"라고 받아쳤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당신 집보다 따뜻한 친구들이 반겨주는 더러운 아파트가 차라리 낫다고 했다. 덴마크 언니는 옆에서 수려한 프랑스어로 거들어주었다. 생텍쥐페리 손녀딸과 가난한 외국인 학생의 대결이었다. 귀족과 프롤레타리아의 개싸움이었다. 다시 한번 '두고 보자' 외치며 나왔다.




K-열풍이 불기 전 프랑스에서 살았던 그 1년은 나에게 많은 생채기와 함께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다. 그 경험들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무엇보다 '잘 살고 싶다'는 삶의 의지였다. 가슴에서 뜨거운 불이 타오르는 것 같았다. 작은 나라 한국에서 왔다고 차별하는 키오스크 아줌마, 캠프 관계자, 생텍쥐페리 손녀딸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내가 준비한 한국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고 눈을 반짝이며 나의 한국 문화 소개를 들어주는 외국인 친구들도 있었다. 한글과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개인적으로 물어봐 주는 친구들도 꽤 생겼다. 프랑스에서 키운 이 '두고 보자' 정신과 외국인 친구들과의 우정은 내 삶에 꽤나 큰 영향을 미쳤. 내 무대는 더 이상 한국이 아니었고, 그 게임에서 이겨먹고 싶었다. 드라마 <파친코> 2화에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한수가 바위에 그린 세계지도를 보며 자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가 일본이라꼬에? 신기하네... 우리보다 억수로 큰 나라라고 생각했십니더. 다 집어삼킬라카는 거인처럼예. 우리가 겁낼 필요 없겠네예. 우리도 이길 수 있겠네예." (드라마 '파친코' 중)


영어 원서  《파친코》- 페이퍼백 (위)과 하드커버 (아래)

파친코 속, 선자의 아버지는 언청이로 세상의 무시를 한 몸에 받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딸을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아버지의 이런 사랑을 받으며 자란 순자는, 훗날 아무리 감당하기 어려운 삶의 고난이 찾아와도 특유의 강인함으로 고난을 헤쳐나간다. 순자의 어머니, 고아인 복희 언니, 시누이인 경희, 파친코에 나오는 여성들 모두 저마다의 방법으로 강인하게 삶을 살아낸다. 부모님의 사랑, 친구와의 우정, 조국에 대한 그리움, 나라 잃은 설움, 이 모든 것이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 된다. 딸을 너무 오냐오냐 키우는 게 아니냐고 나무라는 선자 어머니에게 선자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한다.


"돈이 아니라 정이지. 세상에 정이라는 게 있다는 것도 알아야 되는 기다. 그래야 강하게 사는 기다."

(드라마 '파친코' 중)


프랑스에서, 배낭여행을 했던 유럽 각국에서,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미국에서, 고향을 떠나 삶을 꾸려나가는 다양한 한국 사람들을 만났다. 나처럼 나 홀로 이민을 온 유학생들부터, 해외 발령이 난 남편분과 함께 이민을 온 분들도 있고, 조부모님이나 부모님 세대에 이민을 와 이민 2, 3세로 살아가시는 분들... 이민의 이유는 각기 다양하다. 공통점이 있다면 하나같이 다 '열심히 산다'였다. 그렇게 치열할 수가 없었다. 이민진 작가의 부모님이 다음 세대를 위해 '카운터 내러티브'를 만든 것처럼, 내가 만난 한국인들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K-내러티브'를 만들고 있었다.


K-friend


나의 외국인 친구들은 가끔 의아해한다. 한국인들은 왜 그렇게 열심히 사냐고. 그러면서 한국사람이라는 이유로 나를 아껴주기도 한다. 나는 이런 관심과 사랑이 참 낯설다. 프랑스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이 나에게 보낸 사랑과 우정은, 보잘것없이 작은 나라에서 와 열심히 공부하는 자그만 한국 여자아이를 향한 '연민'에 가까웠다. 친구들은 항상 나를 안되게 생각했고 걱정해 주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후, 미국에서 받고 있는 이 모든 관심과 사랑과는 차원이 달랐다. 미국의 gym에서 운동하며 알게 된 필리핀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에게 를 '한국인'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한다. 꼭 셀럽이 된 기분이다. 그때부터 이야기보따리가 쏟아진다. K-pop, K-movie부터 시작해, K-drama, K-beauty까지... 본인이 알고 있는 드라마 이름과 배우 이름을 줄줄이 대며 한국에 꼭 가보고 싶다고, 내가 한국에 갈 때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한다. 어떤 때는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내가 한국인(K-friend)이라서 친구 먹고 싶나... 하는 생각도 들 정도다.


이유가 어찌 되었던 사랑받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이제 한국인들은 개미나 당나귀처럼 그저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는 민족이 아니라, 고퀄의 제품과 콘텐츠를 생산하는 세상에서 손꼽히는 브레인이 되었다. 한국인의 미다스의 손이 닿으면 모든 제품이든 서비스든 고퀄로 변한다고 믿는 것 같다. 세월의 흐름과 함께 찾아온 인식의 변화가 참 낯설면서도 신기하다. 이제 해외에서 살아가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다. 인플루언서가 내가 누구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듯이, 이제 나의 한국인 명함은 웬만한 곳에서 다 통한다. 물론 팬데믹과 함께 생겨난 'Asian hate'와 미국 사회 저변에 깔린 이민자에 대한 불신 때문에 항상 몸을 사리는 편이지만, 예전 프랑스에서 겪었던 차별과 외국인 혐오에 비교하면, 나는 정신적으로 꽤 호강하고 있다.


아름다운 무기를 벼릴 것


런데 <파친코>를 보고 읽으며, 프랑스에서 보낸 그 시절이 아련하게 그리워졌다. '개미'라고 뒷담화를 까는 또는 '당나귀'라고 대놓고 폭언을 퍼붓는 프랑스인들을 보며 분노를 집어삼켜야 했는데 말이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일본 여자아이와 비교당하고 길거리에서도 폭언을 듣는 지긋지긋한 차별을 당했는데 그때로 왜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정여울 작가님의 글을 읽으며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그때 어린 날의 나에게로 돌아가 말해주자.
먼 훗날 너는 이 시기를 견뎌내고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나를 지킬 수 있는 아름다운 무기를 벼리는 일,
그것이 나에게는 인문학을 공부하고 예술을 사랑하고 글을 쓰는 길이었다.

《1일 1페이지, 세상에서 가장 짧은 심리 수업 365》, 정여울


가장 최고의 복수는 '잘 사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 않는가? 20-30년 전 개미였던, 당나귀였던 그 한국인은 지금 꽤 잘 살고 있다. 한국인들이 개미처럼 한 땀 한 땀 일구어온 이야기보따리에 꽃이 피고 있다. 피폐한 억압의 역사를 지나, 억세게 경제발전을 일구었고, 한과 흥으로 똘똘 뭉친 한국인들의 콘텐츠에 세계가 열광하고 있다. 나는 한국 문화 확산에 기여한 K-pop 가수도 아니고 영화배우, 또는 작가도 아니다. 하지만 해외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내며, 다양한 외국인의 시선을 경험했다. 멸시도 받았고 사랑도 받았다. 내게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았고 '두고 보자'고 이를 악물었다. 언젠가 한국을 알아주는 날이 올 거라고... 나도 이런데, 일본강점기를 살아낸 분들은 오죽했을까.


지금 일고 있는 한국 열풍이 순간의 유행(fad)은 아니기를 바란다. 오랜 시간 마이너리티로 취급받았던 한국인과 한국 문화가 코리안 모먼트로 훨훨 날아오를 수 있기를 바란다. 불타는 애국심, 민족주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뒤늦게 찾아온 이 코리안 모먼트가 너무 반갑고 시원할 뿐이다. 프랑스 어학연수 시절 이후 내려가지 않았던 체증이 요즘 한꺼번에 내려가는 것 같다. 또한 콘텐츠와 문화의 힘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요즘이다. BTS(방탄소년단), 배우 윤여정, 송강호, 이민진 작가 등 (리스트는 끝도 없을 것이다), K-culture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데 공헌한 주역들에게 감사하다. 


해외에 살며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나는 대체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음... 나도 일단 내 삶을 열심히 살며 아름다운 무기를 벼리겠다 생각해 본다. 우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본업에 집중하고 내 일을 '똑띠' 해내야지... 그리고 짬 시간에 글도 더 열심히 써야지. 개미처럼 한 땀 한 땀 부지런히 사는 건 나쁜 게 아니다. 초라한 것도 아니다. 그 하루하루의 내러티브가 쌓여 역사가 되고 꿈이 이루어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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