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여행 노트] 5. 팔레트 위 물감을 보기 위해

6개월 배낭여행의 기록 첫번째: 태국 - 코라트

by 진보

느즈막하게 일어나 호스텔에서 만난 친구들, 옆집 카페 이탈리아 부부와 간단하게 작별을 고하고 후아람퐁 역으로 갔다. 코라트(Korat/Nakhon Ratchasima)로 가는 기차표를 구매했다. 시간이 30분 정도 남아 길거리에서 파는 과일로 아침을 해결했다. 파파야는 별로였고 망고는 아삭한 게 맛있었다.


방콕에서 코라트까지 약 3시간 정도 걸렸다. 도심을 벗어나니 숨통이 좀 트였다. 열린 창문 틈으로 나뭇가지가 살짝 스쳐 지나갈 정도로 자연과 가까운 거리에서 즐거운 여행을 했다. 카라마조프의 형제를 마저 읽었다.

기차의 속도에 맞게 변하는 바깥 풍경을 보며 '개발'에 관한 생각을 했다. 무의식적으로 개발=현대화라는 사고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도시와 시골을 나누는 일반적인 기준은 인구밀도이며 밀도가 높을수록 주어진 공간에서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활동하게끔 도시의 기능을 수행해야 하므로 빌딩은 높아지고 인프라는 더 고도화된다. 정돈되고 절제된 개인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여유란 찾아볼 수 없다. 개개인에게 기대치를 부여하고 거기에 맞게 살도록 강요된다. 나와 다름을 속으로 멸시하게 되고, 인내심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겉은 웃으며 마음 속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에 남이 말하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효율성이 발전과 개발에서 중요한 지표지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위한 개발을 위해서라면 잠시 멈춰 간과한 부분이 없는지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각 국가의 수도는 형형색색 고유한 그 나라의 역사, 관습, 문화, 사고방식이 세계화의 물결에 쓸려 멋대로 그려진 수채화 같다. 방콕에선 보기 힘들었던 팔레트 위 물감을 보고 싶었다.


코라트(Nakhon Ratchasima)역에 도착했다. 기차역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숙소 검색을 하고 있는데 친절한 직원분이 숙소를 추천해주고 냅킨에 약도까지 그려주셨다.


냅킨 지도 덕분에 무사히 숙소를 찾을 수 있었다. 세 명이 더블베드 방 하나를 구해 내기에서 진 사람이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자기로 했다. 저녁을 먹고 벤은 일찍 쉬기 위해 숙소로 돌아갔고 나와 데이빗은 숙소 앞 농구 코트에서 농구를 했다. 풀코트 게임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두세 게임을 뛰고 간만에 땀을 쭉 뺀 뒤 숙소로 돌아와 쉬었다. 게임에서 진 내가 바닥에 침낭을 펴고 누웠다. 꿀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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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달리는 기차 밖 / 우: 지도란 본디 정확해야 하는법!

4개월 전.

데이빗은 로스쿨진학시험을 무사히 마치고 나의 말년휴가에 맞춰 한국으로 들어왔다. 한국에 오기 전 선불교에 대한 책을 읽고 왔다며 템플스테이를 해보자고 데이빗이 제안했다. 휴가를 나오기 전 부대 전화박스로 여러 군데 자원봉사를 할 수 있는지 수소문을 해보았고, ‘월정사’에서 긍정적인 답변이 왔다. 자원봉사를 하며 부담 없이 지내도 된다는 것이다. 속세를 뒤로하기 전 거하게 막걸리 한 상을 벌여 원 없이 술을 마셨다. 진부행 고속버스를 타고 하차한 뒤 다시 오대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늦은 저녁에 도착했다.


우리의 일은 공양간의 보살님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 비몽사몽으로 공양간으로 향했다. 벌써 보살님들은 채소를 손질하고 계셨다. 스님들의 식사가 끝나면 설거지와 공양간 청소를 한다. 보통 하루에 세 끼를 먹기 때문에 아침 공양 시간이 끝나면 거의 바로 점심 공양준비를 해야 한다. 점심과 저녁 사이에는 시간적 여유가 있어 짧게 산책을 하기도, 월정사 찻집에 앉아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서둘러 여행경비를 모아야 했다. 전역하자마자 일을 시작하는 것이 목표였다. 쉬는시간마다 짬을 내서 자기소개서와 입사지원서를 여러군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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