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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Sep 09. 2019

대학축제에 술의 자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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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봄에 국세청과 교육부는 갑작스럽게 대학축제에서 술의 판매를 금지했다. 허가받지 않고 술을 판매하는 것은 주세법을 어기는 것이라는 주장과 술이 없는 건전한 대학축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이러한 금지의 근거가 되었다. 국가기관의 금지조치에 의해 수십년 동안 대학축제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던 주점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금지는 축제의 의미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인간은 안정을 바라지만, 동시에 자유를 원한다. 인간은 질서를 욕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질서로부터의 해방을 욕망한다. 축제는 이러한 인간의 상반된 욕망을 해결하는 해방구였다. 고된 노동의 공간과 엄숙한 사회적 질서는 축제의 공간에서 잠시 그 기능을 멈춘다. 중세 유럽의 축제인 카니발은 삭막한 교회질서에 갇힌 사람들에게 자유분방하게 놀 수 있는 공간이었으며, 조선시대의 장터에서의 탈춤도 신분질서를 해학적으로 풍자하는 공간이었다. 이처럼 축제는 억눌린 욕망을 자유롭게 풀어내는 것이 본연의 기능이다. 그리고 억눌린 욕망이 풀리는 축제라는 공간에서 술이 빠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술은 질서를 잊게 만드는 음료이므로, 축제의 취지와 너무도 잘 어울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축제의 공간에 질서를 적용해 술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축제의 본연의 기능을 망가뜨리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규제가 정당하다면 각지에서 유행하는 지역축제들에서도 술의 판매를 금지해야 한다. 그러나 지역축제들은 예외규정을 적용하여 술 판매의 자유를 인정해주고 있다. 같은 축제인데 지역축제는 술의 자유를 허하고, 대학축제는 술의 자유를 금한다. 이러한 모순은 어디에서 오는가? 지역축제를 주관하는 지방자치단체들은 힘이 있지만, 대학생 청년들은 힘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모순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청년은 그 사회의 미래를 움직이는 힘이 있는 세대이다. 그것은 청년이 힘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권력은 기성세대가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다. 적은 권력을 가진 청년이 사회의 미래를 책임지는 이유는 새로운 상상력과 기득권으로부터의 자유를 가진 청년이 기존 질서를 혁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존 질서를 혁신시키는 힘은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기존 질서로부터 자유로운 공간과 그 공간에서 기존 질서를 뒤엎는 연습이야 말로 청년이 기존질서를 쇄신하게 만드는 경험이 된다. 축제는 그러한 청년정신의 상징이자 산실이다. 축제마저 부당하게 억압받는 청년이 자유와 해방의 경험을 어디에서 쌓을 수 있겠는가? 자유와 해방의 경험이 없는 청년이 어떻게 미래를 움직이는 힘을 가질 수 있겠는가?

대학축제에 술이 반드시 필요한지 아닌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술이 필요한지 아닌지는 국세청과 교육부가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는 점이다. 대학축제는 질서를 위한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자유와 해방의 공간이다. 그 공간에서 무엇을 할지는 질서와 기성권력이 아니라 청년 스스로가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 급한 것은 대학축제에까지 스며들어온 권력과 질서의 칼날을 몰아내는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구호는 이것이다.

“대학축제에 술의 자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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