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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보너머 Feb 15. 2020

진보주의자들의 혐오는 어디로 향하는가?

혐오를 배제하자는 '자칭' 진보주의자들이 또 다른 혐오를 낳는 이유

진보너머 류호성 회원의 글입니다.


  한때 젊은 세대 사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던 ‘장도리’라는 만평이 있다. 요즘에는 다소 날카로운 맛을 잃어버렸는데, 작가분이 직접적인 정치 현장 이슈를 계속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쉽게 다룰 수 있는 소재인 기득권의 부패와 폭력을 되풀이해서 그려내곤 한다. 이럴 때면 언제나 5년 전에 있었던 대한항공 땅콩 회항 사건이 다시 불려 나온다. 사실 그게 요즘 세상에는 정말로 드물게 기득권 부유층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 케이스이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의 이명희와 조현아.


  그러나 사람들은 더 이상 폭력과 범죄를 기득권을 가진 부유층과 연결 짓지 않는다. 과거에는 진보적 시각을 가진 운동가들이 부유층을 탐욕스럽게 폭력을 휘두르는 이기주의자들로 표상하곤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묘사하는 데 한계를 느끼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실제 부유층들은 그런 모습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부유층들은 깔끔하고, 물리적 폭력을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며, 대체로 신사적이고 우아하다. 실제 내면은 어떻든 양성평등과 환경보존을 위해 아름다운 말들을 늘어놓는다.


  반면 하층민들의 폭력범죄는 보다 더 부유한 사람들의 행태보다 감정적으로 더욱 직접적이고 충격적으로 더 다가온다. 때문에 적당한 하층민들의 폭력을 시각적으로 전시하면 너무나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리하여 저 낯설고 흉폭한 사람들로부터 우리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무슨 짓을 하더라도 용납된다는 신념이 자라나는 것이다.


  "우리의 '안전'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며, 우리가 정당한 자격을 갖고 소유하고 있는 소중한 가치를 절대로 저 끔찍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폭력 범죄로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이는 대체로 전통적인 부르주아 우파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최근 들어 이런 입장이 거꾸로 신좌파들의 시각으로 변해버렸다. 좌파 일각에서도 폭력성과 범죄 경향이 높은 하층민들을 사회를 무너뜨리는 치명적인 병폐로 부각하는 움직임이 적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약자 보호를 중심 이념으로 삼은 좌파들에게 모순되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모순을 해소하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 폭력적인 약자들 역시 언제나 작은 기득권을 거머쥐고 더 약한 사람들을 찾아 폭력을 행사하려는 불쾌한 집단으로 묘사하면 되는 것이다. 이들 내면의 좌절감은 이런 해석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대체로 하찮은 취급을 당하며 외면받는다. 이제 이들은 신좌파들이 기득권 폭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제 1단계 계단, 가장 만만한 표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이런 하층민들의 물리적 폭력에 대한 불안감과 더불어 신좌파들이 부르주아 우파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이들의 비위생적인 이미지에 대한 혐오감이다. 원래 사용되던 뜻 그대로의 적나라한 혐오감 말이다. 폭력적이고, 더럽고, 사회적으로 그리 큰 쓸모도 없어 보이는 못난 모습은 결합되어 문자 그대로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기생충>의 한 장면.


  이렇게 보면 왜 진보를 자처하던 사람들이 그리도 이런 유형의 사람들을 미워하고 조롱하고 깔보았는지 이해가 된다. 정말로 많은 것들이 이해가 된다. 일용직 주정뱅이, 조선족, 난민, 트랜스젠더, 은둔형 외톨이 등등. 왜 이런 모습들이 스스로를 좌파이자 진보주의자로 규정하는 사람들 내부에서 흘러나왔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트랜스젠더의 경우, 적극적 페미니스트들에겐 남성 사회에서 실패한 패배자들이라는 경멸적이고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한다.


  요즘은 진보 진영 내에서 '혐오'라는 단어 자체가 이런 식의 기존에 써오던 용법대로 ‘더럽고 비위생적이고 불결한 것에 대한 거부감’의 의미로 쓰이지 않는 것 같다. 그보다는 '소수자를 고깝게 여기고, 고유한 주체로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태도' 정도로 이 단어를 사용하는 듯 보인다. 이렇게 되면서 폭력적이고 비위생적이라고 멸시받는 이들이 '혐오받아선 안 된다'라는 과거 진보의 중요한 미덕마저 상당수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


  과거에도 좌파 운동가들은 약자일수록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이해했다. 그러나 당시 좌파와 진보주의자들은 이런 범죄 자체를 나쁜 것으로 보기에 앞서, 약자들의 행위를 범죄로 규정하는 사법 시스템을 오히려 기득권의 구조적 폭력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부르주아 우파의 이런 가혹한 시각에 맞서 새로운 이론을 세우고 투쟁해왔다. 폭력적인 약자들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들의 존엄성을 존중했고, 그들을 그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만든 사회와 맞서기 위해 애썼다.


미셸 푸코(1926-1984)


"부르주아지의 소유권은 절대적인 소유권으로 되어 버렸다.... 그 결과, 농민들 편에서는 연쇄적인 반발사건이 있어 점점 더 위법적으로 되고 점점 더 범죄적이라 말할 수 있는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소유지에 대한 불법 침입, 가축의 강탈 내지는 학살, 방화, 폭행, 살인."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과거 부르주아 중심 사법체계에 대한 비판은 물론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엔 한계가 많다. 하지만 나는 갑갑하다. 이러한 좌파의 중요한 미덕을 되살려 낼 수는 없는 것일까.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문제는 많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언제까지나 '폭력적이고 비위생적인 얼굴을 한' 하층민들에 대한 혐오감으로 가슴을 가득 채운 채, 안전한 공간을 갈망하며 움츠려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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