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하다는 착각> 서평
편집자 주 : 회원 jobozwa(필명)님의 <공정하다는 착각> 서평입니다.
신이 한 청년에게 ‘다음 생에 가지고 태어날 세 가지 재능’을 주겠다고 말했다. 청년은 ‘소재가 떨어지지 않고 재미있는 웹툰을 그릴 수 있는 능력’ ‘임요환을 능가하는 프로게이머의 재능’ ‘로또 번호를 맞출 수 있는 능력’ 세 가지를 요구했다.
그렇게 청년은 ‘소재가 무한한 재밌는 웹툰을 그릴 수 있는 최고의 프로게이머 억만장자’의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선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네이버에 연재되었던 웹툰 <마음의 소리> 84화에 나오는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는 우리의 능력이나 재능이 얼마나 ‘사회적’인 것인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마이클 샌델은 이런 상황을 일컬어 “내가 재능을 후하게 보상하는 사회에 산다면 그것 역시 우연이며, 내 능력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고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샌델의 말대로 내 성공이 온전한 나의 재능이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의 재능과 능력이 누군가에게 빚진 것이라면(유전이든, 우연이든, 사회 시스템 덕분이든) 우리가 거기서 비롯된 혜택을 온전히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내가 이룬 성공이 온전히 내 실력 때문이라고 여긴다면? ‘공정하다는 착각’은 오만을 잉태한다. 나보다 운이 따라주지 않았던 이들을 무능하다고 비난한다. 샌델의 주장이 흥미로운 점은 이런 오만과 착각에서 민주당 주류로 대표되는 미국 진보정치의 실패를 읽어냈다는 점이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볼 때, 엘리트의 오만은 짜증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도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서고 싶지 않다. 그러나 능력주의 신앙은 그들이 입은 상처에 굴욕까지 보탠다. 자신의 곤경은 자신 탓이라는 말, ‘하면 된다’는 말은 양날의 검이다. 한편으로는 자신감을 불어넣지만 한편으로는 모욕감을 준다. 일자리가 없거나 적자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나의 실패는 자업자득이다. 재능이 없고 노력을 게을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은 헤어나기 힘든 좌절감을 준다.”
이 좌절감이 트럼프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샌델의 분석이다. 기성 정치가 대변하지 못한 하층-백인-노동계급은 세계화로 인해 일자리를 위협받았으며 계층 상승의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든 상황에 놓였다. 그렇게 불평등이 심각해진 상황에서 기회의 평등과 계층 상승을 운운하며 아메리칸드림이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말하는 ‘능력주의자’ 엘리트들이 재수 없었던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억만장자였던 트럼프가 자신과 전혀 다른 이들의 분노와 억울함을 대변해주었다. 그는 승자와 패자에 대해 거친 표현을 퍼붓고, 우리를 힘들게 만든 구체적인 적들을(중국, 외국인노동자 등등) 지명했다.
샌델은 능력주의 비판을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제기한다. 오로지 ‘불평등 해결’ ‘경제문제 해소’만 주구장창 외친다고 해서 트럼프와 브렉시트로 드러난 하층-노동계급의 분노를 달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층 계급을 도덕적, 문화적으로 계도하려 들면서 도덕적 우월성을 뽐내는 정치, 이들을 사회의 주체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정치가 없다면 아무리 ‘불평등 해소’를 외친들 씨가 먹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는 포퓰리즘적 민족주의의 준동을 단지 이민과 다문화주의에 맞선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증의 반발로 치부한다. 다른 일부는 이를 주로 경제 문제의 일환으로 본다. 글로벌 무역과 신기술이 빚어낸 일자리 감소에 대한 반발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포퓰리즘적 저항을 편협한 시각이라고 무시하거나, 이를 다만 경제적 불만의 표출일 뿐이라고 받아들이는 일은 잘못이다. 영국에서 브렉시트가 승리한 것처럼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수십 년 동안 불평등이 커지고 상류층에게는 혜택을, 보통 사람들에게는 무력감을 안겨준 세계화가 진행된 데에 대한 분노의 판결이었다. 이는 또한 경제와 문화 조류에서 뒤떨어져 버린 사람들의 항의를 나 몰라라 한 테크노크라트 정치에의 반발이기도 했다.”
“괴로운 진실은 트럼프가 각종 불안, 고민, 합당한 불만의 결과 당선되었다는 점이다. 주류 정당들은 그런 불평불만들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유럽 민주주의를 대신해 버린 포퓰리즘적 저항에서 배워야 한다. 외국인 혐오증과 극단적 민족주의를 복사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추한 감정과 얽혀 있는 정당한 불만을 진지하게 다뤄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그러한 불만이 단순히 경제적인 불만일 뿐 아니라 도덕적, 문화적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불만은 단지 임금과 일자리에만 있는 게 아니라 사회적 존중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한국식 버전으로 이야기해보자. 지난 2020년 총선을 전후로 원래 진보의 편이라 여겨졌던 ‘20대 남성’이 더 이상 범진보정당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화제가 됐다. 손쉬운 해법은 ‘청년 남성용’ 정책을 앞세우는 것이다. 한 정당에서 ‘병사 월급을 100만원’으로 올리겠다는 공약을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 표를 돈 몇 푼으로 사려 든다”는 청년층의 반발이 만만치 않게 제기됐다.
문제는 공약 자체보다 공약을 제시한 이유였다. 목돈을 마련해 미래를 설계하도록 해주겠다는 것이 공약을 제시한 이유였다. 청년 병사 월급 인상은 매우 좋은 공약이지만, 과연 20대 남성들이 겪는 부당한 처우의 핵심이 목돈 마련을 할 수 없다는 것, 즉 경제적인 문제 때문인지는 의문이다. 당연히 그 영향도 있지만 나라를 지키기 위해 책임과 희생을 다했음에도 ‘사회적 존중’을 받지 못한다는 점도 청년 남성들이 느낀 박탈감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경제 문제에 대한 해결과 사회적 존중은 함께 가야한다. 만약 ‘나라를 지키는 청년 병사들에게 국가가 해줘야 할 당연한 책임’ ‘일한 만큼 그 대가를 보장받아야 하는 청년 노동자의 권리’의 차원에서 ‘청년 병사 월급 인상’ 문제에 접근했다면 더 많은 지지를 받지 않았을까.
일찍이 나는 페미니스트 벨 훅스가 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책을 두고 다소 당황스러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남성-여성 간 성별 분리주의를경계하며 레디컬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레디컬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한 지인이 이 책을 매우 재밌게 읽었다는 것이다. 그의 감상평은 이랬다. “벨 훅스 말대로 페미니즘은 모두에게 좋은 건데 왜 한남들은 페미니즘에 반대하지?”
이런 기적의 논리는 능력주의 비판을 수용하는 지점에서도 충분히 발생할 수 있다. 샌델이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능력주의’ 그 자체보다 ‘엘리트의 오만’이다. 이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자칫 ‘능력주의에 경도된 청년세대의 인식’(그것이 일부이건 다수이건)에 개탄하는 식의 결론에 도달하기 십상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주장이다.
“한국 사회가 공정성을 외치고 있다. 의사고시를 거부하는 의대생은 자신들의 ‘전교 1등 능력주의’는 공정하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의 다수는 분명 의대생들의 이런 공정성을 거부할 것이다. 하지만 성적에 바탕을 두고 계급 서열이 정해지는 이런 능력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합의는 한국 사회에 존재할까? 특히, 공정성을 부르짖는 20~30대들은 그런 능력주의가 부당하다고 생각할까? 일부 젊은층이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비난하고, 쪽방에 사는 이들이 종부세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걱정하는 현실을 보고서 하는 질문이다.”(정의길, “전교 1등 ‘능력주의’는 공정한가?”, 한겨레, 2020.9.11)
능력주의는 하나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능력주의는 분명 시험을 통한 서열을 정당화하고 모든 경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동한다. 하지만 세습자본주의라는 한국적 맥락에서는 지위와 재산을 세습하는 1% 기득권에 대한 다수의 반격 논리로 기능하기도 한다. 미래를 바꾸려 노력했지만 인정받지 못한 채 허망하게 무너져내린 사회적 약자들(구의역 김군과 김용균)에 대한 공감과 연대로 드러나기도 한다.
같은 아메리칸드림을 두고도 ‘흑인(오바마)이나 여성(힐러리)도 대통령을 하니 아메리칸 드림은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있고, ‘아메리칸드림을 위협하는 1% 정치경제 기득권과 맞서 싸우자’(버니 샌더스)고 말할 수도 있다. 샌델은 “흥미롭게도 버니 샌더스 역시(트럼프처럼) ‘기회’나 ‘사회적 이동성’은 거의 말하지 않는다. 대신 부와 권력의 불평등만 이야기한다”고 지적한다. 샌델이 놓친 것이 한 가지 있다면 버니 샌더스가 부와 권력의 불평등을 미국민 다수의 DNA에 새겨진 ‘아메리칸드림’에 기반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청년 세대의 지지’를 받겠다는 정치세력이라면 ‘청년들이 능력주의에 찌들어 있다’는 게으른 손가락질을 해선 안 되는 이유다. 우리 앞에 ‘서열에 따른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 세습자본주의에 맞설 우군을 양성해낼 수 있는’ 이념 체계를 가진 다수의 청년들이 있다면 우리의 선택이 어떠해야 할지는 너무 명백하지 않을까? 본인들의 이념 체계와 완벽히 일치하는 사람들을 대변하겠다면 차라리 다른 나라 국민을 찾아보는 게 나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샌델이 말하는 ‘엘리트의 오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