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섯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재 Jan 27. 2019

눈이 고슬고슬
내리는 날의 다섯

모든 게 희미해지는 어느 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1. 눈이 온다. 물기를 한가득 머금고 고슬고슬하게 내린다. 하루 종일 공치고 초라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내 머리 위에도 차분히 내려앉는다. 나는 쌓인 눈을 털지 않고 내버려둔다. 그것으로 어디론가 숨고 싶은 마음을 대신한다.


2. 문장이 머릿속을 맴돈다. 제목에 사로잡혀서 한참 동안 붙잡고 있었는데,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 한다. 기계처럼 같은 문장을 반복하다가, 다시 빈칸으로 돌아온다. 대단한 글도 아닌데 손가락 끝에 너무 힘을 주었나 싶다. 조금 가볍게 단어 몇 개 적어보지만 소용이 없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실은 쓸 말이 없었는데 제목 때문에 억지로 붙잡고 있었던 건 아닐까. 제목에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는 노트북을 닫고 모든 게 희미해지는 어느 날을 기약하기로 한다. 


3. 회사에 일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팀에 일이 없다. 팀이랄 것도 없다. 팀을 꾸리는 도중에 매니저가 나가면서 사실상 공중분해되었기 때문이다. 신생 팀에 와서 겪는 우여곡절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럴싸한 프로젝트 하나 없을 줄은 몰랐다. 다들 최선은 다하고 있다. 매니저와 디자이너도 채용하고 있고, 새로운 프로젝트 영업도 하고 있다. 탓할 사람 하나 없다. 오롯이 내 잘못이다. 모험을 선택한 내 잘못, 참을성이 부족한 내 잘못, 혹은 만족을 모르는 내 잘못. 그런데 오늘은 내 잘못이라는 걸 괜히 인정하기가 싫다. 


4. 유일한 희망은 사이드 프로젝트. React와 Netlify CMS로 웹 프런트엔드를 구축하고 있다. 사실 대단한 개발은 아니다. 그냥 라이브러리 설치하고, 튜토리얼 코드 복사 붙이기 한 다음 한 두 줄 고치는 수준이다. 그냥 내가 이제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 싶은 기분에 뿌듯하고 좋다. 회사에서 깎아 먹은 자존감에 그나마 밥을 주고 있다. 이번 주말, 고민은 잠시 내려놓고 여기에 조금 더 욕심내 보기로 한다. 


5. 삼겹살 거리가 어쭙잖게 남았다.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가 대충 썰어서 한참 버섯을 볶고 있던 프라이팬 위에 던졌다. 아차차. 이렇게 볶으면 기름 범벅이 될 텐데 구워서 넣을걸 그랬나. 이미 늦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급히 굴소스와 후추를 털어 넣고, 센 불로 올려 빠르게 볶았다. 적당한 그릇에 담아 식탁에 올렸다. 고기 한 점, 버섯 한 조각 집어 입에 넣었다.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굴소스가 소중한 저녁을 살렸다.


눈이 작년보다는 적게 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섯 매거진의 다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