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고 예민한 렌즈로 세상과 사람 바라보기
페이스북에서 <디자이너가 알아야 할 심리학 원칙 OO가지>라는 제목의 글을 보면 괜스레 마음이 불편했다. 어려운 심리학 개념을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전달하는 좋고 유익한 글인데 나는 왜 그렇게 마음이 불편했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만 알고 싶던 혁오가 모두가 사랑하는 혁오가 되었을 때처럼 뒤틀린 질투심 혹은 내 심리학과 졸업장에 대한 자부심 때문일까?
잘 생각해보니 질투심이나 자부심보다는 걱정하는 마음에 가까웠다. 주로 사용자가 일상에서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글에서 읽은 심리학 원칙을 적용하겠지만, 디자이너 혹은 회사가 겪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용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사적인 이익을 위해 사용자의 마음을 이용하는 경우, 아무리 잘 설계하고 디자인한다 해도 사용자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고, 필연적으로 윤리적인 문제가 따라온다. 그런데, 위에 글에서도 이런 부분을 지적하고 있을까?
카카오톡을 생각해보자. 나는 매 순간 카카오톡에 매어 산다. 출퇴근하고, 밥 먹고, 일하는 시간은 물론이고, 집에 와서 TV를 보면서도 5분에 한 번 화면을 바라본다. 일림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린다. 화면에는 가족, 친구, 지인, 회사, 광고 등 오만 곳에서 보낸 메시지가 보인다. 눈보다 빠른 손은 이미 답장을 하고 있다. 자기 전까지도 화면에 알림이 없는지 확인하다가 겨우 잠이 든다.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렇게 빠져든 것은 분명 내 잘못이지만, 이렇게 만든 카카오톡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례를 들어보자. 2014년, 페이스북의 애덤 크레이머는 네트워크를 통해 대규모 감정이 전이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연구는 페이스북 사용자 수십만 명을 대상으로 긍정적 포스트와 부정적 포스트를 게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는데, 문제는 사용자는 그들이 실험에 참가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는 점이다. 사용자가 가입 시 개인 정보 이용에 동의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고 하지만, 이게 만약 실험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페이스북은 우리 감정을 조작할 권리가 있을까?
심리학은 인간의 행동 패턴이 적힌 커닝 페이퍼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이해하기 위한 학문이다. 다른 학문보다 역사가 짧고, 여전히 개척할 영역이 많다. 들어가 보지 않고서야 알기 어려운 마음보다는 관찰이 가능한 행동을 연구하고 있으며, 매해 기술 발달에 따라 새로운 연구 방법론이 등장하면서 관찰이 가능한 영역이 늘어나고 있다. 그럴 때마다 기존 연구가 타당한지 재확인하는 연구가 진행되며, 기존과 다른 결과가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심리학 원칙으로 알려진 원칙이 다시 보니 틀렸다고 밝혀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심리학에서 연구 윤리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올바른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과정부터 제대로 되어야 한다. 연구자는 참가자가 연구 참가에 동의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감정, 더 나아가 앞으로의 삶에 영향을 줄 권리는 없다. 또 심리학 연구 결과는 인간에 대한 내용을 다루기 때문에 인간은 이렇다, 혹은 저렇다는 식으로 일반화되기 쉽기 때문에 표본 집단에 다양성을 포괄해야 하며, 인과관계와 상관관계를 구분하고, 연구 마지막에 한계를 분명하게 명시해야 한다.
나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공부했다. 4년 동안 나와 상대방의 행동과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한 다양한 접근법을 배웠다. 비록 지식은 기억 속에 희미하지만, 그때 배운 마음가짐만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사실 어렵고 대단한 무언가는 아니다. 진지하고, 예민한 렌즈에 가깝다. 그래도 꼭 쓰고 싶었다. 심리학을 공부하고 디자이너로 일하는 내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과 사람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우리는 모두 편향되어 있다. 모두 무언가에 근거하고 있다. 근거는 각자 살아온 시대, 환경, 언어, 나이, 성별, 정치 성향, 지역, 인종, 종교 등에서 보고, 듣고, 느끼고, 배우고, 믿는 것에서 온다. 나한테 당연한 게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고, 상대에게 당연한 게 나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각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면서, 비슷한 사람들끼리 어울린다는 점이다. 자신과 다른 걸 믿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 싶지도 않고,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알 생각도 없고, 듣고 싶어조차 하지 않는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확증 편향이라고 부른다. 이 외에도 수많은 인지적 편향이 있다.
"남들과 똑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은 없다. 생물학적으로 타고난 성향부터 학습된 편향에 이르기까지 온갖 요소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사람마다 정보를 다르게 관찰하고 주목하고 수집할 뿐 아니라 수집한 정보를 다르게 지각한다." <우아한 관찰 주의자>
편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 모두 배운 게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며, 믿는 게 다르고, 논리 구조가 다르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근거하고 있고, 무엇을 믿는지, 어떤 편향이 있는지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마찬가지로 상대도 어떤 사람인지,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지, 어떤 편향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런 마음가짐은 디자인에서 특히 사용자 리서치에서 요긴하게 쓰인다. 내가 누구인지 알고, 평소에 무엇을 놓치는지 알아야 보다 객관적인 눈으로 사용자를 바라볼 수 있다. 이는 내 작은 세상에서 벗어나 사용자의 눈으로 어떤 부분이 문제고, 무엇이 필요한지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모든 행동에는 원인이 있다. 그냥 하는 행동은 없다. 심리학은 그런 인간 행동의 원인이 무엇인지 연구한다. 연구 방법은 간단하다. 관찰하고, 질문하고, 의심하고, 가설을 세운다. 다시 관찰하고, 다시 질문하고, 다시 의심하고, 여기서 얻은 데이터에서 패턴을 찾는다. 또 관찰하고, 질문하고, 또 의심하면서 가설을 검증한다.
나는 일상에서도 이 방법을 종종 사용한다. 새로운 장소에 가거나 새로운 상황에 놓이면 일단 여기는 어떻게 돌아가는지,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면서 패턴을 찾는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도 마찬가지다. 관찰하면서 모은 정보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존재하는지 생각해보고, 이해가 안 되는 지점에 질문을 던져서 그에 대한 답을 찾는다. 그러나 내가 찾은 패턴이 실제로 존재하는 규칙일까? 우연히 이 상황에 맞아떨어진 것은 아닐까? 의심은 내가 발견한 패턴을 더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이 과정은 주어진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예측 가능성을 높여서 긴장감과 불안함을 줄여주며, 상대와의 의사소통을 돕는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상황, 익숙한 사람이어도 이 방법은 유용하다. 평소와 무엇이 다른지 파악하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질문하고, 의심하면서 빠르게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관찰하고, 질문하고, 의심하는 습관은 사용자 경험을 디자인하는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끊임없이 사용자 행동을 관찰하고, 사용자를 이해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여기에서 찾은 인사이트에서 솔루션을 디자인하고, 그 솔루션을 다시 의심하면서 개선해나간다. 누군가는 이를 초식동물 같은 예민함이라고 부르겠지만, 나는 그 덕을 보고 있다.
UX 디자인 관련 글이나 책을 읽다 보면 사용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제품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사용자와의 공감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내용이 종종 등장한다. 그런데, 내가 겪어보지도 않은 일을 어찌 감히 공감하고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 내가 겪어봤다고 한들 상대가 겪은 일과 같고, 상대가 느낀 기분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에게 공감이 어려운 일이다. 상대 머릿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한 상대가 무슨 생각하는지, 무슨 기분이 들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에게 쉽게 공감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상대의 생각과 감정을 함부로 내 머리로 헤아리거나 단정 지으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려고 애쓴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듣고, 존중하려고 애쓴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입이 근질근질거려서 참을 수가 없다가도 공감은 커녕 듣지도 못하는 디자이너가 무슨 사용자의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나 싶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중한다. 그러다 보면 조금은 상대의 생각이 무엇인지, 마음은 어땠는지 가늠할 수 있다.
지난가을, 스마트 스피커 사용자 10여 명을 대상으로 간단한 사용자 인터뷰를 진행했다. 나는 스마트 스피커와 음성 인터페이스에 회의적이었지만, 일은 일이므로 개인적 판단은 보류하고 일단 들어보기로 했다. 대부분은 노래를 틀고, 채널을 바꾸고, 음량을 조절하는 정도로 스마트 스피커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유아가 있는 사용자의 사례는 매우 흥미로웠다.
"저는 아이 달래거나 재울 때 동요나 자장가 트는 용도로 자주 사용해요. 너무 편하고 좋아요. 지금이야 그냥 동요 틀어달라고 하면 끝이지만, 예전에는 스마트폰에서 틀었었거든요. 그것도 일이었어요. 스마트폰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고, 화면으로 달려드는 아이를 붙잡고, 그 사이에 앱을 켜서 검색하고, 찾아서 겨우 틀고, 다시 달래고, 재우고... 스마트 스피커가 아기 둔 부모 여럿 살렸어요."
나는 아이를 키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들의 이야기에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다만,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용자가 솔직한 그들의 생각과 기분을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열린 귀와 마음으로 듣고, 적절한 질문을 던지면서 공감 비슷한 무언가라도 해보려고 애쓰는 것이다.
나는 나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들은 성숙한 삶과 심리학 수업 이야기로 답을 대신해볼까 한다. 이 수업은 매주 두 번씩 짧은 감상문을 써서 게시판에 제출하는 것 빼고는 시험도 없고, 수업도 여유로워서 마지막 학기에 듣기에 적절했다. 감상문은 그 날 수업을 듣고 느낀 점을 적는 것이었는데, 과목이 인간이 성숙하게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내용이다 보니, 내 글은 자기반성으로 가득했다.
나는 첫 번째 감상문에 강의를 들으며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고 싶다고 적었다. 수업이 진행되고, 감상문이 하나씩 쌓여갔다. 나는 시계를 천천히 거꾸로 돌려 어떤 사건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 천천히 살펴보았고, 감상문에 초등학교 때 어머니 몰래 미니카를 사고 거짓말하다가 혼난 일부터 시작해서 중학교, 고등학교, 재수학원, 대학교, 군대, 취업 준비하면서 느낀 점까지 꼼꼼하게 적었다.
비록 결석도 하고, 과제도 몇 번 빼먹어서 좋은 학점을 받지는 못했지만,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이해하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감정은 언제나 내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면서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좌절하고 그만할지, 아니면 극복하고 나아갈지 정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다시 넘어진 적도 있었다. 그러나 현상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지 말지, 담아둘지, 아니면 나아갈지 정하는 일도 내 마음가짐에 달려있었다. 긍정과 부정, 행복과 불행, 깨달음과 후회 모두 내 마음 안에 있었다.
작년까지 내 화두는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그렇게 인터랙션 디자이너가 되었다. 올해는 그 화두가 어떤 디자이너가 되어야 할지로 옮겨갔다. 여기저기 보고, 강연도 듣고, 사람도 만나면서 답을 구해보려고 애쓰고 있지만, 실은 잘 알고 있다. 결국 내 안에 답이 있다는 것을. 디자이너로서 무엇을 디자인할 때 행복하고 보람을 느끼며, 앞으로 어떤 디자이너로 나아가야 행복할지는 나만 답할 수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