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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Apr 06. 2019

몸은 저 멀리에서,
마음은 제 자리에서 다섯

바닥에 가라앉은 홑 씨가 된 기분으로 맞는 봄

1. 런던에 다녀왔다. 이번 여행에서는 걷고 또 걸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우박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걸었다. 무언가를 보려고 하지도, 어딘가로 향하지도 않고 그냥 걸었다. 갑자기 내가 외국에 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집은 더 이상 한국이 아니었다. 이상하고도 복잡한 기분. 둥둥 떠다니다가, 바닥에 차분히 가라앉은, 시간이 흘러 눌러앉은 홑 씨가 된 기분. 가벼운 바람에 또 흩날리겠지만, 일단은 내려앉았다. 


2. 머리를 잘랐다. 런던 뉴몰든에 있는 코리아타운에서. 망해봐야 얼마나 망하겠나 싶어서 눈에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다. 약간 소심해서 구글 리뷰를 찾아보기는 했지만. 결과는 성공이었다. 머리에 이 정도 정성은 오랜만이라 조금 감동했다. 저녁은 석영이와 만나 중국집에 갔다. 짬뽕 하나, 짜장면 하나, 탕수육 하나 시켜놓고, 쉼 없이 젓가락질을 했다. 둘이 맛있게도 먹었다. 이게 뭐라고. 


3. 돌아오는 날,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나는 신호등 앞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고 계속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기다리는데, 오늘은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 덕에 한 발짝에도 멀리까지 날아다녔다. 나 말고는 모두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문득, 내 마음이 가벼운 변화에도 그렇게 흔들리던 이유는 어디에도 뿌리내리려고 생각도,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4. 말뫼 오피스로 출장을 왔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4주씩이나. 계획에 없던 출장이라 처음에는 영 탐탁지 않았다. 스톡홀름에서 어렵사리 안정을 찾았는데, 한 달이나 떠나 있을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2주가 지난 지금은 그럭저럭 괜찮다. 숙소에서 회사까지는 걸어서 40분인데,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날씨도 좋아서 운동하는 셈 치고 걸어 다니고 있다. 하루하루 봄이 오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참여하고 있는 프로젝트도 정신없이 돌아가서 출근하면 숨 쉴 틈 없이 일하고, 집에 오면 지쳐서 침대에 누워서 그대로 잠에 든다. 이런 삶이라면 말뫼로 내려와서 살아도 괜찮겠다는 생각까지도 든다. 


5. 30일 동안 꾸준히 글을 쓰는 프로젝트, 작심삼십일 3기로 참여하고 있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매일 한두 시간씩 내 취향에 대한 궁상맞은 글을 쓴다. 길게 고민하지 않은 단어와 어수룩한 문장을 툭툭 던진다. 산만하기 짝이 없다. 비틀어서 생각하거나, 깊게 파고들어갈 틈이 없어서 그냥저냥 한 글이 나오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솔직한 글이다. 쓰고 나면 속이 시원하다. 이제 13일 차, 아직까지는 잘 쓰고 있다. 30일이 지나면 어떤 기분일까? 브런치에 쓴 글을 올릴지 말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조금 어설프고, 평소보다 더 개인적인 글이라 그대로 올리기 무섭지만, 글 쓰는 순간의 기분이 잘 담겨있어서 그대로 올리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주말에 다녀온 루이지애나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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