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심삼십일 취향편 #25
파리 현지 시간으로 4월 20일 새벽 4시 46분,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부활절 휴가로 파리에 도착해서 2층 침대에 누운 지 5시간 만의 일이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아서 몇 시간을 뒤척이고 있었는데,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그랬던 걸까.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는 안 와도 괜찮다고 하셨지만, 굳이 가겠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회사에 메일을 보내고 당일 저녁 서울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기왕 왔으니 조금이라도 보고 가자는 마음으로 아침나절 파리 시내를 돌았지만, 마음이 썩 편치는 않았는지 한참을 헤매다 숙소로 돌아왔다. 빠르게 짐을 챙기고 할 것도 없는 공항으로 향했다. 짐을 부치고, 자리에 앉아 잠시 생각을 하다가 메모장을 켰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였다. 나는 그런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 막내딸의 막내 손자인 데다가 본인과 비슷한 체격에 비슷한 걸 좋아하고, 비슷하게 크고 있으니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여느 막내가 그러하듯 사랑과 관심이 당연한 줄 알았다. 친형, 친척 형, 누나들이 질투하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다. 진재라는 이름도 외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 재는 아버지 쪽 돌림자, 진은 어머니 쪽 돌림자였는데, 아들이 없으셨던 할아버지는 나를 본인 아들처럼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8살 무렵, 우리 가족은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2년 정도를 같이 살았다. 그 당시 이미 은퇴하신 외할아버지는 할 일이 뜸한 날이면 옆으로 누워서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나는 그런 외할아버지 옆에 꼭 붙어서 같은 자세로 누워서 담배 연기를 맡았다.
할아버지는 늘 내 학교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마중을 나오셨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뭐가 그렇게 부끄러웠는지 쫓아오지 말라고 소리치고는 후다닥 도망을 갔고, 할아버지는 저 멀리에 숨어서 그런 나를 몰래 따라오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본인이 기르시던 바나나 나무를 기증하셨고, 내 교실이 보이는 화단에 나무를 심으셨다. 그렇게 해서라도 항상 지켜보고 싶으셨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산타 할아버지도 실은 아버지가 아니라 외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이른 25일 아침, 형과 내가 자고 있는 방에 살금살금 들어오셔서 머리맡에 사탕과 초콜릿으로 가득한 검은 비닐봉지를 놓고 가셨다. 어릴 적부터 귀가 밝았던 나는 형을 깨워서 할아버지가 선물울 놓고 가셨다고 했다. 형은 산타할아버지가 왔다 갔나 보다고 했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그럴 리가. 내 동심을 지켜주고 싶었던 형의 거짓말이었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 이후 대방동으로 이사를 갔고, 할아버지, 할머니는 새 집을 지어서 다시 시골로 내려가셨다. 시골집에는 배추와 고추밭도 있고, 작은 동물원도 있었다. 집 앞 울타리에서는 다래와 머루를 따먹을 수 있었고, 강아지도 있었다. 나와 친척 형들은 당시 농구에 빠져있는데, 그런 손자들을 위해 집 앞마당에 농구대를 설치해주셨다. 창 밖으로 황금빛으로 출렁이는 논이 보이던 2층 다락방도 있었고, 김치 냄새가 코를 찌르는 베란다도 있었다.
시골집에는 책, 스크랩북, 사진 앨범, 신기한 물건 등으로 가득 찬 할아버지의 서재도 있었다. 방 절반이 창문이라 늘 햇살이 쏟아지던, 그러나 통풍을 고려하지 않아서 여름이면 찜질방으로 돌변하던 이 방은 할아버지 머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공간이었다. 이 방은 나와 친척형, 누나들의 보물 창고였다. 우리는 명절이면 할아버지 서재에 숨어 들어와 서랍에서 이것저것 꺼내보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유모레스크를 좋아하셨다. 나는 어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는데, 가끔 할아버지께 유모레스크를 켜드렸다. 지금도 손이 기억하는 걸 보면 다른 곡은 몰라도 그 곡만은 열심히 연습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앞에서 연주를 하고 있으면, 할아버지는 그윽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셨다. 좋아하셨던 건 물론이고. 그 어린것이 본인 좋아하는 노래를 켜는데, 싫을 수가 있을까.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사춘기가 왔고, 공부를 핑계로 시골에 내려가는 일이 줄어들었다. 내려가더라도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 많아졌다. 할머니는 그런 내 손에 본인이 모으신 500원짜리 동전 뭉치를 손에 몰래 쥐어주셨다. 나는 그 사이 고등학생이 되고, 수능을 봐서 대학을 가고, 군대를 갔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변함없는 사랑과 관심을 주셨고, 불편하신 몸을 끌고 군대 면회까지 오셨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사이 연세가 많이 드셨다. 몸이 불편해지시고, 지지부진한 병원 치료가 이어지다 보니 시골에서 계시기 어려워졌고, 병원과 가깝고, 이모들이 찾아오기 좋은 우리 집 근처로 이사를 오셨다. 한 동안은 그래도 괜찮았다. 두 분 모두 연세가 많으셨지만 정정하셨다. 그러다 할머니가 크게 넘어지셨다. 작은 부상도 회복이 쉽지 않았다. 침대에서 몇 년을 고생하시던 할머니는 모두가 모여있던 어느 추석 연휴에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는 할아버지와 대화도 점점 쉽지 않아 졌다. 발음도 점점 어눌해지시고, 가끔 저 멀리 어렸을 적으로 돌아가신 듯했다. 나는 들어드리는 것 말고는 할 게 없었다. 할아버지는 본인 어릴 적에 이런 일이 있었다, 저런 일이 있었다고 하시고는, 책장에서 스크랩북을 꺼내셨다. 스크랩북에는 내 명함, 잡지에 나온 내 인터뷰, 어릴 적 사진, 신문 기사 등이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어떻게 귀를 돌릴 수 있을까. 집에 가기 전까지 들어드리는 것, 맞장구 조금 쳐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난겨울에는 요양원에 들어가셨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몇십 년인데, 얼마나 속이 상하셨을까. 할아버지를 뵈러 갔을 때 그 초췌한 모습으로 눈물을 글썽거리며 웅얼대시는데,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서 그냥 손 꼭 붙잡고 싱긋싱긋 웃어댔다. 할아버지는 그날 기분이 한 껏 좋으셨는지 말씀도 많이 하시고, 조카들 안부도 물었다. 나는 금방 또 오겠노라, 요양원에서 건강히 잘 계시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짧은 두 차례의 면회를 마치고 스톡홀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게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조금 더 건강하셨을 때, 조금 더 가까이 살았을 때, 조금 더 찾아가지 않은 게 후회스럽다. 뭐가 그리 바쁘다고, 뭐가 그리 힘들다고 그랬을까. 그냥 아주 잠깐 얼굴만 비춰도 좋아하셨을 텐데. 그렇게 궁금해하시는데, 전화 한 번을 안 했다. 받은 사랑에 비해 너무 못되게 굴었다. 못된 손자였다. 할아버지, 편히 쉬세요.
#작심삼십일_취향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