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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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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재 Mar 24. 2020

버티는 디자인의 다섯

재미와 호기심마저 잃으면 정말 끝이다.

1. 연중행사처럼 슬럼프가 왔었다. 모든 게 지루했다. 이래저래 힘이 안 들어가서 침대에 누워서 하염없이 소셜 미디어 피드를 내려봤지만, 역시나 지루했다. 여행을 떠나든 밖에 나가서 뭐라도 해야 하는데, 요즘 같은 시국에는 나가기조차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있나.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내 마음가짐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2. 어제는 띄어쓰기를 바로잡고, 오늘은 대소문자를 바로잡았다. 내일은 메뉴 순서와 설명 이미지를 바로잡을 차례. 여기에 더해 기능이 차에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해달라는 요청, 무언가 잘못되었으니 고쳐달라는 요청, 새로운 기능을 추가해달라는 요청까지 여기저기에서 쉬지 않고 들어온다. 제품이 단종되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일을 붙잡고 하루 종일 나만의 작은 싸움을 해나간다. 


3. 그냥 지나쳐도 모를 작고 사소한 무언가에 집착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럼에도 내가 타협하면 거기서 끝이라는 걸 알기에, 내가 아니면 누구도 신경 쓰지 않을 일이라는 걸 알기에, 그 정성이 결국 제품의 완성도로 이어지기 때문에 잘 해내고 싶다.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해야 같은 문제가 반복해서 나타나지 않도록 체계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수많은 사람이 엮인 복잡한 프로세스를 개선할 수 있을까, 어떻게 자동화해야 여기에 쓰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까, 그래서 내 시간과 노력을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을 만드는 데 쓸 수 있을까 고민한다. 


4. 시작이 있으면 끝도 있다. 시작만 하고 끝나는 디자인도 있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끝나는 디자인도 있다. 제품은 그 모든 과정을 견뎌야 세상에 나온다. 띄어쓰기 하나, 단어 하나, 픽셀 하나까지 살피며 제품을 완성하는 지루함을 견디는 요즘, 버티는 디자인을 생각한다. 


5. 디자이너가 일하기에 자동차 회사는 아직까지도 세련된 곳은 아니다. 나는 다만 자동차라는 프로덕트가 좋아서, 하루가 다르게 모든 게 변하고 있어서, 그 모든 역경을 견딜만하다. 게다가 아직도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하루에 하나씩은 꼭 배우고, 어떻게 하면 더 좋게 만들지, 쉽게 일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재미와 호기심마저 잃으면 정말 끝이다. 


차근차근. 한 계단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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