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다섯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재 May 02. 2020

책 정리하는 4월의 다섯

가지고 있던 책의 절반을 정리했다. 반은 버리고, 반은 팔았다.

1. 서점에 들락거리는 게 낙인 때가 있었다. 퇴근길에는 강남 교보문고 혹은 집 근처 영풍문고에 들렀다. 친구와 약속이 있는 주말에는 광화문 교보문고와 홍대 앞 땡스북스에 들렀다. 서점 구석구석에는 보물이 쌓여있었고, 나는 그 안에서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제목과 표지, 때로는 목차까지 읽고 설레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꼭 책을 한 권씩 사 들고 나왔다.


문제는 읽는 속도보다 사는 속도가 빨랐다는 점이었다. 책장에는 안 읽은 책이 계속 쌓여갔다. 즐거움이 아니라 죄책감이 부채처럼 쌓여갔다. 언젠가 읽을 거니까 괜찮다며 자신을 위안했지만, 안 읽은 책이 20권을 넘어가면서 그 말도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서점은 잠자고 있던 불안을 자극할 뿐이었다. 스웨덴에 가기 전 책 정리를 시도했다. 언젠가 보고 싶을지도 모르고, 필요할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2. 그렇게 3년이 지났다. 나는 서울에 돌아왔지만, 책장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안 읽은 책도 그대로였다. 책 대부분은 보고 싶지도, 필요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책 버리는 일은 여전히 어려웠다. 죄책감도 여전했다. 그러던 지난 주말, 마음의 짐을 떠나보낼 수 없다면, 책장이라도 비워보자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던 책의 절반을 정리했다. 꼬박 4일이 걸렸다. 반은 버리고, 반은 팔았다.


100여 권을 팔았는데, 통장에는 10권 남짓 살 수 있는 돈이 돌아왔다. 허무하기도 하고, 속 시원하기도 하고. 통장만 보면 마음이 복잡하다. 요즘 그래서인지 몰라도 잠들기 전 책장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본다. 언제쯤 서점에 가서, 책 고르고, 사고, 돌아다니면서 틈틈이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일련의 행위가 죄책감에서 다시 설렘으로 바뀔까.



3.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이면 아는 게 많아질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점점 더 모르겠다. 세상 일이 이럴 수도 있지만, 저럴 수도 있다.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내 논리도 맞고, 저 사람 논리도 맞다. 이럴 때일수록 각자 얽혀있는 이해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 그렇다고 문제를 꼭 잘 해결하는 건 아니겠지만. 에이 모르겠다.



4. 입사 6개월 차, 어느새 지금 회사에 들어온 지 반년이 지났다. 업무 이해도가 높아져서 일에 몰입해서 그런 건지, 그냥 일 때문에 허덕이다 보니 그런 건지 몰라도, 좀비와 다름없는 상태로 퇴근을 한다. 그럼에도 굳이 불평하지 않는 것은 원하는 일을 하면서 나름의 보람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대단한 무엇을 만들 수 있을 거라 믿지 않는다. 제품을 완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작은 일, 큰 일 모두 경험하면서, 최선을 다해 최대한 부딪혀보려고 한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경험하려고 한다. 훗날의 내가 비슷한 어려움에 처하지 않고 슬기롭게 헤쳐나갈 지혜를 얻으려고 한다.



5. 운 좋게도, 새로운 인포테인먼트 플랫폼의 UX 컨셉을 만드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 기존 제품에 끊임없이 질문하며, 나름의 답을 찾아보려고 애쓰고 있다. 거시적으로는 디자인 원칙을 수립하고, 미시적으로는 개별 문제를 개선할 수 있는 화면을 그려보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지금은 작고 소소한 변화겠지만, 이런 개선점들을 모아 언젠가 모두의 보편타당한 상식에 맞는, 구구절절하게 설명할 필요 없는, 사용자가 시스템의 구조와 로직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이 사용자 행동을 이해하는 그런 제품을 디자인하고 싶다. 상식적인 UX를 디자인하고 싶다.



숨 돌릴 때 종종 찾아보는 글립토테크 미술관 사진


매거진의 이전글 버티는 디자인의 다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