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재 Mar 23. 2018

스톡홀름 신학대학교를
리브랜딩하다 (하)

스웨덴 디자인 스쿨 하이퍼 아일랜드 유학 이야기 #13

디자인 매거진 CA에 실린 하이퍼 아일랜드의 기록 2부 브랜딩 모듈 기사 일부입니다.

전문은 CA 2018년 1-2월호에서 확인하세요. 


4주차 콘셉트 아이데이션 

브랜드 전략은 어느 정도 마무리했고, 이제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고민할 차례다. 여기서부터는 디자인 경험이 없는 잭, 크리스티나, 나, 굴리 형이 그래픽 디자이너가 되고 브랜딩 경험이 있는 비슈누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회의를 주도했다. 비슈누는 일단 전략 만들면서 굳은 머리를 풀어줘야 한다면서 아이디어 스피드 데이팅 워크숍을 진행했다. 큰 틀은 지난번과 같지만, 방식을조금 바꿨다. 기존에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를 가운데 적고 그에 대한 아이디어를 글로 적어야 했지만, 이번에는 전략에서 뽑아낸 브랜드 가치를 적고, 이에 대한 아이디어를 그림으로 그렸다. 두 바퀴 정도 돌고 나서 각자 아이디어 중 마음에 드는 것 한두 가지를 뽑았다. 우리는 지평선, 맞잡은 손, 열린 문, 지문, 교집합 등을 뽑았고, 시각적 단서 삼아 각자 로고를 그려오기로 했다. 


그렇게 양손 가득 할 일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걱정이 한바탕 몰아쳤다. 아이디어 스피드 데이팅 과정에서 제대로 된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고,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팀에 전혀 도움이 안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브랜드 전략은 그래도 한두 번 해봐서 괜찮았는데, 브랜드 아이덴티티 디자인이라니,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조형 요소도 잘 모르고, 행여나 운 좋게 괜찮은 무언가를 찾더라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디자인 툴이 없는데, 이걸 어떻게 하지. 하이퍼 아일랜드만 가면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빈 종이 위에 스케치 몇 개와 걱정만 잔뜩 늘어놓다가 아침이 밝았다.  



아침 해를 바라보다보니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나는 하이퍼 아일랜드에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으러 왔다. 그래픽 디자인을 배우러 온 게 아니다. 모든 걸 잘할 필요도, 재미있어할 필요도 없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고 내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찾으면 된다. 어제의 좌절은 그래픽 디자인은 내 적성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학교에 가서 프로젝트 매니저 아드리안에게 내 생각을 전하고, 그래픽 디자이너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드리안은 큰 걸 깨달았다면서 잘했다고 격려해줬다. 그리고 지금은 아이데이션 단계이기 때문에 디자인에 부담 느낄 필요 전혀 없이, 영감을 준다고 생각하고 시도하라고 조언해주었다. 그럼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면 뭐하지. 


오늘은 마침 스타이너의 두 번째 강의가 있었다. 주제는 인터페이스이자 경험으로서 브랜드의 역할. 사람들은 BMW가 추구하는 가치를 겉모습뿐 아니라 차에 타서 핸들도 돌려보고, 직접 밟아보면서 느낀다. 안전을 추구하는 볼보 역시 마찬가지다. 조금 투박해 보이는 인테리어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서 볼보가 추구하는 가치를 느낀다. 스타이너는 디자인은 이렇듯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추구하는 모든 경험을 사용자에게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한 총체적 접근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는 타이포그래피, 색, 이미지, 아이콘, 인터페이스 패턴, 레이아웃, UX 등이 포함되며 모든 개별 요소가 모든 걸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분야가 오케스트라처럼 하나로 묶여서 소비자에게 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강의가 끝나고 복잡했던 머리가 맑아졌다. 디자인에는 그래픽 디자인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하긴, 내가 그걸 잘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의 경험, 디자인을 포함한 모든 요소가 한목소리로 사용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우리 프로젝트를 다시 들여다보니 내가 채워야 할 부분이 보인다. 새로운 브랜딩이 사람들에게 어떤 느낌을 줘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구체적으로 떨어지는 콘셉트, 콘셉트와 디자인을 연결하는 이야기, 스톡홀름 신학대학교만의 차별화된 브랜드 어조 등이 필요했다. 다른 팀원들이 로고 디자인 시안을 만드는 사이, 나는 잭, 카롤리나와 함께 콘셉트를 구체화하고, 브랜드 스토리를 만드는 데 집중했다.



5주차 디자인 

아이디어 스피드 데이팅에서 나온 마주 잡은 손, 일출, 지평선을 모티브로 작업한 로고 디자인 시안 4개가 만들어졌다. 우리는 시안 4개를 벽에 붙여놓고 어떤 방향으로 가면 좋을지 회의했다. 시안마다 분명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로 좁히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계속 고민하다가 반 친구들에게 의견을 구하기로 했다. 반 친구 대부분이 디자이너라서 구체적이고 날카로운 피드백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이 피드백에 근거해 시안을 두 가지로 좁혔다. 


단순하고 어떻게 보면 평범하지만, 완성도도 높고 설득력 강한 시안이었다. 다른 시안은 마주 잡은 두 손, 수평선, 개방성을 하나의 원 안에 담았다. 마주 잡은 두 손을 통해 지식 제공을 통한 인재 육성을, 산과 만나는 수평선을 통해 안정성과 미래를, 열린 원들을 통해 개방성을 표현했다. 이렇게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각 요소를 하나로 더하면 최종 로고가 완성된다. 설득력은 모자라지만 시각적으로 세련되고, 강한 시안이었다. 


둘 다 강점이 분명한 시안이었기 때문에 결정하기 어려웠다. 의견도 팽팽하게 갈렸다. 사람들도 스토리는 전자를 좋아했지만, 디자인은 후자를 더 좋아했다. 어떤 시안으로 할지 마지막까지 이견을 좁히지 못하다가 결국 투표를 하기로 했다. 나는 전자를 지지했다. 왜 그러냐는 다른 팀원의 질문에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 로고를 누구를 위해 만들고 있는지 생각해보자. 스톡홀름 신학대학교다. 진지하고, 무겁고, 보수적인 브랜드다. 후자는 물론 디자인적으로 쿨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 브랜드에는 안 맞는다. 브랜드를 옷에 비유해보자. 아무리 예쁜 옷도 안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우베와 소피아를 생각해보자. 전자는 그들에게 꽤 어울리지만, 후자는 생경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다행히 모두가 이 생각에 동의했고, 투표할 필요도 없이 첫 번째 시안을 최종으로 결정했다. 이제이 모든 생각과 디자인을 최종 프레젠테이션과 브랜드 북에 담으면 된다. 나는 크리스티나와 브랜드 스토리텔링, 카롤리나는 프레젠테이션, 잭, 굴리 형은 카피라이팅, 비슈누는 브랜드 북, 아드리안은 로고 디자인 완성에 들어갔다. 그동안 원체 많은 내용을 논의했다 보니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5주차 금요일, 우리는 클라이언트 피드백에 대비해 브랜드 북만 남기고 모든 작업을 끝마쳤다.



6주차 프레젠테이션 

클라이언트에게 최종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가기 전, 인더스트리 리더와 다른 팀 학생들에게 피드백을 받는 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각자 맡았던 부분을 발표하기로 했고, 나는 영상과 사진 촬영을 하기로 했다. 각자 순서대로 자기가 맡은 부분을 발표했다. 발표는 20분 동안 진행되었고, 큰 실수 없이 끝났다. 발표가 끝나고 스타이너에게 전반적으로 탄탄하고 논리적이었으며, 클라이언트 앞에서 그대로 해도 괜찮은 수준이며 자기도 본분을 잊고 빠져들어서 볼 정도로 아주 매끄러웠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이외에도 전체적인 컬러 톤과 슬라이드 배치에 대한 세부적인 조언도 받았다. 특히 굴리 형이 발표한 매니페스토를 좋아했는데, 자기가 느낀 그 기분을 자료를 읽는 사람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이 피드백을 어떻게 반영할까. 비슈누, 아드리안은 컬러 톤, 크리스티나와 잭은 브랜드 어조와 카피라이팅, 카롤리나는 프레젠테이션 문서를 다듬기로 했고, 나와 굴리 형은 스타이너 피드백을 토대로 영상을 만들기로 했다. 


영상에는 두 가지를 담아야 했다. 새로운 브랜드 콘셉트와 굴리 형의 발표. 일단 브랜드 콘셉트는지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로 표현하기로 했다. 최종 프레젠테이션까지 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촬영은 바로 다음 날 새벽, 굴리 형 집 근처 도로에서 진행되었다. 우리는 촬영을 마치고 근처 카페에 앉아 발표 영상을 돌려보았다. 굴리 형은 그 짧은 순간에도 무용수다운 유연한 선과 표정 연기를 보여주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그 움직임과 표정을 보여주는 것. 그 안에 일출을 담으면 어떨까. 이를 통해 소명 의식을 가진 학생과 학교가 지향하는 가치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형과 학교로 돌아와 형의 표정과 움직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리고 이중 노출 기법으로 마치 얼굴과 움직임 안에 지평선이 떠오르는 것처럼 표현했다. 여기에 굴리 형이 녹음한 나레이션과 직접 제작한 배경음악을 더했다. 이렇게 발표 준비가 끝났다.



마지막 프레젠테이션을 하러 가는 지하철 안, 묘한 긴장감이 맴돈다. 잭이 언제나처럼 농담으로 분위기를 녹였고, 조금 서두른 덕분에 이번에는 늦지 않았다. 학교에 도착하니 우베와 소피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장비 세팅을 마치고 정시에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한 명씩 차례대로 자기가 맡은 부분을 발표했다. 리서치 결과, 브랜드 전략, 콘셉트를 지나 새로 디자인한 로고를 하나씩 선보였다. 


슬슬 분위기가 무르익자 우리는 매니페스토와 영상을 보여주면서 프레젠테이션을 마무리했다. 우베는 인상적이었다는 코멘트를 남겼고, 소피아는 고맙다는 인사와 새로운 브랜딩을 적용할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 물어보았다. 우리는 프레젠테이션이 끝나고 학교에 돌아와 최종 프레젠테이션, 매니페스토 영상, 그리고 브랜드 북을 전달했다. 6주간의 짧고도 길었던 프로젝트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 퍼블리와 인터랙션 디자인에 관한 리포트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에서 확인하세요.

매거진의 이전글 스톡홀름 신학대학교를 리브랜딩하다 (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