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시절
눈이 내리면 길부터 끊겼다던 진뫼, 어쩌다 바람에 떠밀려 길을 잃은 구름이나 찾아들 만큼 외진 곳. 물길은 어찌 알고 이 속살 깊은 곳까지 더듬어 흘러든다. 바위에 걸려 강물이 넘어진 자리마다 깊게 파인 웅덩이에 물고기가 모여 살 듯 고만고만한 집들이 키 낮은 지붕을 이어가며 산자락을 따라 앉았다. 하루 내내 버스가 오지 않았던지 큰길에 쌓인 눈이 여전히 소복하다. 들어오는 이도 나가려는 이도 없다. 겨울 해는 앞산 마루를 겨우 오르더니 높이 날지도 못하고 이내 비스듬히 마을 뒷산으로 기울어 간다. 시간도 멈춰 선 듯 얼어버린 강물 위로 당산나무가 있는 뒷산 그림자가 길게 키를 키운다. 스멀스멀 이른 땅거미가 한 집 두 집 집어삼키다가 큰길 옆 손바닥만 한 논 자락이며 마른 고춧대만 남은 빈 밭에도 어둠이 기어든다. 연 날리던 아이들도 보이지 않고 밥때를 알리는 어머니의 채근도 없는 저녁 하늘로 하나둘 굴뚝에 마른 연기가 피어오른다.
시인은 집에 없었다. 대신 마루 한 귀퉁이에 농협 마크가 찍힌 문패가 놓였고 물 끓이는 주전자와 믹스 커피 몇 개가 길손을 맞았다. 새 단장을 마친 ‘회문제回文齊’는 깔끔했다. 더는 살림을 하지 않는 집 마당에 장독대는 보이지 않고 키를 낮춘 돌담 너머로 마을 앞 풍경이 헐하게 넘어왔다. 회문제를 끼고 바짝 뒤로 시인의 살림집이 자리하고 마을회관 쪽으로 돌아나가던 뒤란길 너머로 문학관도 생겼다.
‘섬진강 시인’이 김용택이듯 진뫼도 ‘시인의 마을’이다. 추억은 저마다의 것이지만 그림 같은 시는 모두의 마음에 뿌리내리며 자란다. 섬진강 회문제에서 그리움은 전염된다. 고향을 가진 자와 고향을 떠난 자가 가슴으로 만나고 고향을 갖지 못한 자가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강물 같은 세월은 아픈 상처마저도 아물게 한다. 가난해서 혹은 수상한 시절 탓에 도망치고 쫓기듯 고향을 떠나야 했던 이웃들, 친구들. 상처가 아문 자리에 되살아 오른 굳은살처럼 그리움이 박혀있다. 그리움은 서서히 밀려들지만 한번 휩쓸리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한다. 흠뻑 젖어 허우적거리고 만다.
시인의 마을에서는 모든 집과 나무와 강가의 바위마저도 고유명사가 된다. 추억을 되새김질하며 그리움을 품은 자의 힘이다. 욕 잘하는 인간 박한수, 진뫼 마을 맨 끝자락에 있다던 한수 형님네 집을 두리번거리게 되고, 어렸을 때부터 짓궂고 쌈을 잘했다던 용조 형, 한 살 터울 사촌 형이 살았다던 집도 더듬어 본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 도롱이를 쓰고 젖은 강가에서 꺽지를 낚던 성만이 양반네, 뒤란 우물가에 앵두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제일 부잣집이라던 집을 점찍어보기도 한다. 외진 마을이어도 마흔 가구에 마흔이 넘는 국민학생들이 살았던 시절도 있었다. 이삿짐 실은 삼륜차를 배웅했다던 마을회관 앞마당, 깃대봉 옆에 매달렸던 스피커, 뒷산 당산나무와 강변에 두 그루 느티나무에도 해묵은 추억이 묻어 있다. 개울보다 조금 큰 물길을 가로 건너는 징검다리와 시멘트 다리에도 사연이 담겼다. 멱을 감다 몸을 말리던 벼락바위, 잰피나무 찧은 물로 고기를 잡던 뱃마당 두루바위……. 강물에 잠긴 바윗덩이 하나하나에도 부르던 이름이 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겨 가면 마치 보물 찾기라도 하듯 풍경에 감춰진 오래 묵은 추억이 되살아온다.
시인의 마을에도 봄이 왔다. 몇 년 사이 마을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소를 키우는 외양간도 없고 쇠죽을 끓이는 아궁이도 없지만, 허름했던 가난의 자취가 무너져 내렸던 자리에 창 넓은 새집들이 차곡차곡 들어앉았다. 눈이 오던 날, 울력을 알리던 스피커보다 훨씬 덩치 큰 재난경보기가 마을 앞 냇가에 섰고, 울퉁불퉁 자갈이 깔린 흙탕길이었던 천담 가는 길을 따라 차도 다니고 자전거도 달린다. 포장도로 옆에는 몇몇 시비도 나란히 놓였다. 마을 앞까지 버스가 들어와서 굳이 큰길까지 나갈 일도 없겠지만, 그 길을 돌아가면 스물세 살 시절에 멈춘 그 여자네 집이 있고, 그 집 살구나무 꽃만 다시 피었다. 이제 가을이면 강 건너 감나무는 씨알 굵은 감을 달겠지만, 똥값이 된 감값에 울화통이 터졌던 아버지는 그리움으로만 남아 있다. 땅에 떨어진 감으로 야구를 했던 아이들도 없고 아이들을 나무라던 어머니도 보이지 않는다. 칠순을 훌쩍 넘긴 그의 머리에도 희끗희끗 한세월이 내려앉았다.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풀들의
몸 다 누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전문 『섬진강』, 김용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