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지는 4월
열정의 발화發花는 관능이다. 벚꽃은 폭죽처럼 터져서 세상을 밝히는데 미적미적 달아오르던 봉오리가 터지기 시작하면 순식간이다. 아직 잎도 없는 가지는 꽃불만 밝힌 채로 타 오른다. 오로지 꽃을 피우기 위해 사는 것처럼 나무는 죽기 살기로 꽃을 피운다. 이렇다 할 향기도 쓸만한 열매도 남기지 않는 꽃을 나무는 한가득 품고 마치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산다. 산수유, 매화로 서막을 알린 섬진강의 봄은 벚꽃이 터지면서 절정이다. 구례에서 하동으로 이어지는 19번 국도 백오십 리 길을 따라 벚나무는 도열한다. 그 꽃의 향연에 초대받은 상춘객의 얼굴에도 상기된 웃음이 번진다. 너울대는 꽃그늘 아래 근심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그 길 그 나무 아래 서면 농염해진 봄기운에 진저리를 친다. 마음을 빼앗기고 넋을 잃고 만다.
화개장터에서 쌍계사로 이어지는 십리벚꽃길은 섬진강 봄의 대명사다. 길은 지류인 화개천 물길을 타고 오르는데, 저잣거리에서 부처님의 세상을 잇는 길처럼도 보인다. 절집에서 벚나무는 ‘피안앵彼岸櫻’이라 불린다. 이승의 번뇌를 해탈하여 열반의 세계로 가는 길을 벚꽃이 피어 밝히는데 극락 세상으로 가는 길이 열린 셈이다. 꽃의 본능이 색을 탐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겠지만 꽃의 관능을 공의 해법으로 풀어버리는 교리의 이치는 허무하다. 벚꽃의 도발에 쩔쩔매는 몸으로 절로 가는 십리벚꽃길은 너무 멀고 색즉시공을 화두 삼기에 발화의 절정은 찰나다. 팍팍한 길 위에서 저잣거리 꽃그늘 아래 평상은 불우한 중생의 목을 축이고 배를 채우기에 다시없는 자리다.
화엄사는 쌍계사처럼 널리 알려진 절이다. 이즈음엔 화엄사 계곡도 봄의 정취가 무르익는다. 절을 찾는 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황전 옆 홍매화가 여전하고 올벚나무를 비롯한 피안앵이 한참이어서 4월 초순의 화엄사는 가장 화려하다. 화엄사의 벚나무들은 줄을 서지 않고 흩어져 있다. 여기저기 동백숲 사이에도 있고 이제 막 새순이 오르는 나무들과 어울려 피어있다. 꽃을 보는 길을 따로 정해둔 것이 아니어서 긴장 풀린 발길은 자유롭다. 길을 따라가지 않고 길은 더듬어서 찾는 것이라고 화엄사 피안앵들은 말하고 있다.
지장암으로 뻗은 오솔길을 더듬다 보면 몇 평 남짓한 축대 위에 늙은 벚나무가 눈길을 끈다. 대략 수령이 350년 정도 된 올벚나무다. 다른 벚나무보다 이르게 꽃을 피운다고 올벚나무다. 전하는 말로는 병자호란 이후에 심긴 무리 중 유일하게 남겨진 고목이다. 통상 오육십 년이면 쇠약해지는 벚나무의 생리로 볼 때 올벚나무의 장수는 드문 일이다. 국내 최고령수로 짐작된다. 곁에 한 그루가 더 있었다는데 스님의 말로는 백 년쯤 전에 보수공사에 쓰려고 베어 절집 마루 밑장을 깔았다고 한다. 올벚나무를 심은 의도는 따로 있었다. 전란의 굴욕을 겪은 인조는 전쟁 무기로 쓸 벚나무 식재를 지시했다는데, 벚나무 껍질이 활의 탄성을 강하게 해서 화살이 멀리 날아가게 만든다고 한다. 활과 화살로 전쟁을 벌이는 시절이 아닌 만큼 올벚나무의 용도는 공소시효를 훨씬 넘겨 더는 베어낼 이유가 없겠으나 태풍에 줄기가 부러지고 속이 썩어 문드러져서 이미 여러 차례 외과수술을 받은 상태다. 얼마나 더 남겨진 봄을 맞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분분하게 피는 벚꽃만큼이나 바라보는 생각 또한 분분하다. 무기를 만들어 울분을 되갚으려 했던 인조의 의도는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 그때 심긴 나무들도 수명을 다했다. 속세에서 부처의 세계로 가는 길은 부처의 세계에서 속세로 돌아오는 길 위에 포개져 있다. 고승의 길을 따라가면 번뇌를 벗을 것도 싶지만, 하루에도 수백 번 번뇌의 바다를 헤매는 것은 정작 내 마음이다. 흘러내리는 것이 물길이지만 거슬러 오르는 것이 또한 생명이다. 바람은 시도 때도 없이 들썩이는데 내 걸음은 여전히 십리벚꽃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 손바닥처럼.
불꽃같은 벚꽃의 무리는 위험하다. 남으로 트인 섬진강은 북상하는 봄의 도화선이 타들어 가듯 바람을 타고 번져간다. 마치 민심을 등에 업은 반란의 무리가 임금이 사는 한양으로 진군해 가듯 벚꽃의 대오는 낙동강을 거슬러 문경새재를 넘고 우금치 거쳐 금강을 건넌다. 전라 경상 충청에서 뻗어 오른 삼남대로를 타고 마침내 서울 한복판 여의도까지 치닫는다. 하지만 그뿐이다. 꽃의 진군은 이내 지리멸렬하여 자진 해산하고 만다. 꽃잎은 바람에 날려 가고 봄비에 떠밀려 흩어진다. 이른 더위에 투항해 버린 봄, 꽃이 지면 봄도 시들해져 언제 그랬냐는 듯이 요동치던 민심도 사그라든다. 한 번도 성공해보지 못한 민란처럼 벚꽃의 도발은 매년 거듭되지만 헛되고 헛된 허상처럼 무너진 계절의 한복판에 아픈 기억만을 남겨두고 사라진다. 해마다 되풀이한다. 4월, 벚꽃의 낙화는 잔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