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찾다가
텃밭에
흙 묻은 호미만 있거든
예쁜 여자랑 손잡고
섬진강 봄물을 따라
매화꽃 보러 간줄 알그라
- 「봄날」 전문, 김용택
봄을 불러오는 건 매화다. 섬진강의 달뜬 봄을 맞는 것은 광양 다압리 매화 군락이다. 매화마을은 예전 섬진나루가 있었다던 바로 그 동네다. 강가에는 처녀를 업은 두꺼비 동상이 섬진강 유래비와 함께 서 있다. 수월정이라는 정자 부근에는 세월에 풍화된 공적비 몇 기가 남았고 작은 선외기 몇 척이 겨우 포구의 기억을 이어가고 있다. 가파른 백운산 자락을 끼고 앉은 매실농원은 별세상이다. 뿌연 백색에 이따금 연분홍이 번지는 풍경은 아늑한 봄기운에 풀려 나른하다. 매화 향기는 찌르지 않고 녹아든다. 다가설수록 끌려드는 유혹을 마음은 쉽게 털어버리지 못한다. 몸은 이미 무력하다. 웅웅 거리는 벌들의 소리가 현기증 날만큼 울렁거린다. 그들의 몸짓은 노동의 수고로움보다는 본능에 이끌린 행위처럼 취해있다. 시선을 고정하지 못하고 반나절 내내 헤매다 돌아 나오는 발걸음에서 달큼한 봄 냄새가 뚝뚝 떨어진다.
이곳을 다녀가는 발걸음이 연간 150만 명이라고 한다. 수치의 근거를 따져 물을 수 없으나 평일에도 밀려드는 상춘객의 물살을 보면 과연 그럴만하다. 구례 산수유가 시들고 화개천 십리 벚꽃이 피었다가 다시 곡성 장미축제로 이어지는 늦봄까지 섬진강은 내내 꽃 몸살을 앓는다. 그중에서도 봄의 최전선에서 척후병으로 소개되는 광양 매화마을은 압권이다.
매화꽃구경에 유난을 떨었던 사람들은 이전에도 있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다. 남들보다 먼저 일찍 피어난 매화를 찾아 눈 쌓인 골짜기마저 마다하지 않았던 김시습은 유명한 탐매가探梅家다. 그는 특히 달빛에 비친 매화를 좋아했다는데 그를 부르는 호마저도 매월당梅月堂이다. 화분에 키운 매화가 입춘보다 먼저 꽃을 피우기를 기다렸다 벗들을 불러 술도 마시는 이들도 많았다. 간혹 얼음을 잘라 구멍 속에 초를 켜서 매화를 비춰 보며 시를 짓고 놀았다는데 빙등조빈연氷燈照賓筵이라 했다. 더러는 꽃이 진 매화 가지를 화로에 넣고 태워 향을 맡으며 아쉬움을 달래기도 하고 차에 꽃을 띄우거나 담배에 섞어 즐기기도 했다. 유언으로 “저 매화나무에 물을 주라”했다던 이황의 일화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이황은 107수에 달하는 매화 시를 지었고 그중 91수를 ‘매화시첩’으로 엮어 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조선 초기의 문신 강희안은 ‘매화는 비스듬히 기울어 성기고 여윈 것과 늙은 가지가 기이하게 생긴 것을 귀하게 여겼다’는 기록을 남겼다. 고목이 되어 구부러지고 오래 묵어서 늙은 태가 많을수록 좋은 매화로 대접받았다. 이런 경향은 문인화에도 남겨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매화 사랑을 성리학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주장도 있으나 그럴듯하면서도 선뜻 그렇다고 하기도 어렵다.
꽃도 꽃이지만 열매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다. 매실 농원 사람들이다. 매화는 시가 되고 그림도 되지만, 매실은 약이 되고 돈도 된다. 꽃이 지고 석 달이면 매실을 딴다. 대략 계절이 바뀌는 유월 초순이면 따기 시작한다. 익으면 살구처럼 노랗게 변하지만, 매실은 완전히 익기 전에 딴다. 술을 빚거나 장아찌를 담그려는 수요에 맞춰 생과 상태로 시장에 낸다. 농축액을 만들거나 된장이나 고추장과 함께 담아 팔면 시간과 기술이 들어간 만큼 가격도 더 받을 수 있다. 벌레들이 극성을 부리는 계절이 오기 전에 수확을 마칠 수 있어 한편 깔끔하다. 매화는 추위에도 강하고 햇볕만 좋으면 척박한 산비탈도 마다하지 않아 가난한 산골 살림에 여간 이로운 게 아니다. 물론 거름도 챙겨주고 때맞춰 가지치기도 해야겠지만, 다른 농사일에 비하자면 훨씬 손이 덜 가는 편이다.
열매를 기다리는 입장에서 너무 이른 꽃은 근심거리다. 아무리 추위에 강하다고는 하지만 서리에 냉해를 입거나 수정을 시켜줄 벌조차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날씨 속에 설중매雪中梅는 배고픈 아름다움이다. 배고픈 아름다움은 다소 억지스럽고 배부른 아름다움은 못내 사치스럽다. 일생이 추워도 결코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화지만 열매는 팔아야 한다. 그래야 농부는 먹고산다. 관념과 유물의 대립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 세상 이치다. 인심도 곳간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지만, 차고 넘치는 곳간도 나누지 않으면 인심이 흉흉해지는 것 또한 세상살이다. 다행히도 매화는 꽃도 열매도 모두 가졌다. 사람이 지고지순한 꽃을 탐하던 실속 있는 열매를 탐하던 상관없이 매화는 세상의 논쟁을 무력하게 만들고 만다. 꽃이 좋으면 열매도 실해서 누이 좋고 매부도 좋다.
세상의 평화가 이 작고 여린 꽃송이에 달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이른 봄의 설렘이 고단한 섬진강 농부의 마음에도 안식을 주었으면 좋겠다. 농사와 농부를 말할 때, 농農자가 별 진辰과 노래 곡曲이 더해졌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짓는 농사, 흙 묻은 호미 한 번 내던지고 섬진강 매화 구경 다녀오면 딱 좋을 계절이다.
* 참고자료
우리 매화의 모든 것 / 안완식, 눌와, 2011
조선의 매화시를 읽다 / 신익철, 글항아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