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마을에서
구례의 3월은 노랗게 피어난다. 봄볕은 색이 없지만 산수유 노란빛은 봄볕처럼 어지럽다. 노랑이 아련하게 피어 봄의 전선을 형성하는데 지리산 서쪽 줄기를 타고 해발 4백 미터 능선에 바짝 달라붙어 있다. 높이 1433미터 만복대 정상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봄은 마을을 점령하고 아래로부터 겨울을 포위하듯 에워싸고 있다. 산꼭대기로 몰린 겨울 잔당과 밀고 밀리는 3월의 바람은 아직 차갑다. 차갑지만 사납지 못해서 바람은 옷깃을 파고들지 못한다. 밤낮의 온도 차가 크고 간혹 된서리 같은 눈이 분탕질을 놓지만 세차게 흐르는 서시천 물줄기처럼 시간은 후퇴할 줄 모른다. 꽃들의 포위망은 느슨하면서 견결하다. 하위, 상위, 월계 마을로부터 서시천 물길을 타고 반곡, 대음마을을 해방시키고, 19번 국도로 빠져나가는 온천단지 아래까지 길게 뻗어 내렸다. 골짜기 전체가 꽃 사태라도 난 듯 동네마다 지붕과 다락논만 겨우 남기고 사방은 온통 노란빛이다. 포위된 겨울이 더 이상 도망칠 퇴로는 없어 보인다.
구례 산수유와 광양의 매화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앞다투어 핀다. 그렇다고 서두르지는 않는다. 한겨울 꽃봉오리는 조바심 나게 애를 태우는데 입춘을 넘기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한다. 그러다 문득 매화가 터지듯이 피어나고 산수유는 잠시 한눈을 판 사이 알게 모르게 피어있다. 달큼한 향을 품고 화사한 빛깔로 마음 달뜨게 하는 매화라면, 산수유 향기는 은근하고 꽃이 나른해서 어느새 취해 있다. 산수유꽃은 두 번 피고 오래 피어있다. 작은 봉오리가 열리면서 가느다란 꽃대가 폭죽처럼 퍼지고 저마다 꽃대에서 노란 별처럼 핀다. 이제 꼼짝없이 봄이다. 벌써 소문을 듣고 찾아드는 발길도 막아설 수 없다.
이 작은 산골 동네가 해마다 봄이면 꽃 몸살을 앓는다. 산 아래 풍경은 전망대가 자리한 상위 마을보다 월계 마을 쪽이 편하다. 능선을 타고 앉은 상위 마을이 더 높이 자리하고 있지만 왼편 산줄기에 막혀 시선이 뻗어나가지 못한다. 반면 저수지 아래로 내리막길을 끼고 앉은 월계 마을에서 굽어보는 풍경은 산수유 시목始木이 있는 19번 국도 건너편 마을까지 닿을 듯도 싶다. 전망 탓인지 마을로 이어지는 좁은 길은 3월 내내 자동차가 뒤엉켜 사람은 꾸역꾸역 다녀야 한다. 그래도 아기자기한 골목 구경과 돌담길을 따라 굽어 걷는 재미는 상위 마을이나 현천 마을이 낫다. 서시천을 따라 내려가면 ‘산수유 은유 시인’으로 알려진 홍준경의 시가 담긴 벽화도 볼 수 있다.
구례는 지리산과 섬진강을 빼고 말할 수 없다. 특히 임야가 80퍼센트가 넘는 산동면은 먹고살기 만만치 않은 산골이다. 산수유 노란빛에 취해 지리산을 베개 삼고 섬진강에 발을 담그는 호기도 잠깐이다. 이 산골 사람들을 먹여 살려온 건 산수유다. 꽃보다는 열매다. 만병통치는 아니어도 열매는 간과 신장을 보호하는 약효를 가졌다. 그래서 오미자, 구기자와 함께 귀한 약재로 여겨져 왔다. 산수유 세 그루만 있으면 자식 대학도 보낼 수 있다는 옛말이 있었을 정도다. 전국에서 거래되는 산수유 열매의 70퍼센트 이상을 이곳에서 생산한다. 산동면에 약 12만 주 이상 나무가 자라고 있다. 구례군 농가 넷 중 한 가구가 산수유나무를 키우고 있다고 한다.
마을의 역사는 천 년을 넘어 거슬러 오른다. 인근 계척 마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심었다는 고목이 아직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7미터 높이보다는 대여섯 갈래로 갈라져 넓게 자란 품이 산자락 아래 산골 동네의 풍경을 껴안고 있다. 계척 마을은 임진왜란을 피해 지리산으로 숨어든 오 씨와 박 씨가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고 하는데,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 시목의 수령은 천 년을 넘었다. 중국 산동 출신의 어느 처녀가 이곳으로 시집오면서 가져왔던 씨앗을 처음 심었다고 전한다. 사실이라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들여왔던 문익점보다 훨씬 오래전 일이지만, 멀리에서 이곳 산골짜기까지 시집온 범상치 않은 사연도 이름도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산수유가 만개하는 축제 일정에 맞춰 구례 유도회와 산동면 청년회가 주관하는 풍년기원제가 매년 열린다. 마을의 안녕과 주민들의 부귀가 산수유 농사에 달린 셈이다.
눈부시던 노랑 빛깔이 봄볕에 사위어 들어가면서 어느덧 완연한 봄이다. 이 작은 산골을 찾는 발걸음도 뜸해지면 축제도 파장이다. 사람들은 산수유꽃이 시들어가는 걸 눈치채지 못한다. 나무가 연한 녹색 잎을 내기 시작하면 꽃은 희미하게 늙어가며 저문다. 어떻게 사라지는지 기억에도 없다. 다만 꽃이 진 자리마다 맺힌 씨방을 여름 한철 산수유는 열매로 키우지만, 꽃은 열매가 자라는 걸 보지 못한다. 열매는 진녹색 잎 그늘에서 조용히 익어간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잎은 누렇게 퇴색하고 열매는 붉은색이 깊어진다. 산수유로 먹고사는 산골 사람들의 손길은 서리 내린 늦가을에 부산해진다. 지난봄이 그랬듯 산골의 겨울은 일찌감치 되돌아온다. 기계가 나오기 전까지 열매를 따서 말리고 씨앗에서 껍질을 까는 일은 내내 수작업이다. 나이 든 동네 아낙네들의 손가락 마디마디가 성했을 리 없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대를 물려가며 자식을 키워내던 세월의 빛은 검붉다. 늦가을 볕에 말라가는 산수유 열매는 마을 아낙들의 손가락에 끝에 박힌 빛깔을 닮는다.